'징벌적 과세'는 역사 '1라운드'부터 실패했다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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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10년 한나라 무제는 낙양 상인 집안 출신인 상홍양(桑弘羊)을 발탁해 국가 재정을 맡겼다. 상인 출신답게 상홍양은 기본적으로 현실적이고, 유물론적이며 상공업과 무역을 중시한 인물이었다.
상홍양의 정책 구상은 그의 저서 <염철론(鹽鐵論)>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재정과 외교, 도덕, 철학 등 다방면의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핵심은 경제적인 내용이었다. 고대 사회에서도 정치의 중점이 경제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특히 책의 정책 초점은 국가 재정에 맞춰져 있었다.
때마침 국가의 자금 수요가 폭증했다. 앞서 기원전 140년 무제 즉위 이후 한나라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안정되며 번영을 구가해왔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시기는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상류층의 사치품 수요가 급증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주변 이민족과 군사적 대립이 늘면서 국가 재정수요가 급증했다.
국가 재정을 늘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농민들에게서 걷는 세금을 늘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농민들에게서 쥐어짤 수 있는 한도만큼 세금을 쥐어짰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에 상홍양은 소금과 철을 국가에서 독점하는 ‘염철전매(鹽鐵專賣)’와 유통구조 개선 등을 통해 국고를 늘리는 정책을 시행했다. 하지만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는 게 세상사였다.
태행산 동부 지역에서 대형 물난리가 나면서 70여만 명의 농민이 땅을 잃고 떠도는 사태가 발생했다. 상홍양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산이 많은 사람에게서 일종의 재산세인 ‘산민전(算緡錢)’을 거뒀다.
산민전은 돈이 많은 상인과 수공업자, 고리대금업자 등에게 자발적으로 자산을 신고하게 해서 2민(緡, 1민은 1000전(錢))당 10%, 규모가 작은 상인에겐 5%의 세금을 걷는 식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부자세’를 통해 위기에 처한 농민을 구하려 한 셈이었다.
자산가들을 겨냥한 정책이 시행되자 그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던 상인들은 재산을 은닉하고 신고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정은 자산을 은닉한 사람은 일 년 동안 변방에 보내고, 신고에서 누락된 민전을 모두 몰수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숨겨놓은 자산을 신고한 ‘세파라치’에게 몰수재산의 반을 준다고 하면서 상인들을 압박했다.
이 같은 정책으로 일부 세수가 느는 효과는 분명히 있긴 했다. 하지만 사회에선 상대적으로 자산가들의 부담이 늘면서, 어렵게 부를 쌓기보다는 돈을 버는 대로 바로바로 써버리는 소비 행태가 나타났다.
이에 대해 당대의 관료들은 “황제가 고기 음식을 줄이고 비용도 절약해 내정(內廷)에 모아둔 돈을 꺼내 백성들을 구제하고 부세도 관대히 해줬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밭에 나가 농업에 힘쓰지 않는다”며 “상업에 종사하는 자만 더욱 늘고, 가난한 사람은 저축한 것이 없어 오직 조정에만 의지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특히 “백성들은 소비에 치중해 저축하거나 투자하지 않았다”는 <사기>의 사평은 후대에 두고두고 상홍양의 정책에 꼬리표로 따라다녔다. 사마천은 한무제 시대 상인 출신들이 대거 중앙정계에 진출한 것도 못마땅해했다. 양을 천여마리나 길렀다는 복식(卜式) 등이 장사로 조성한 막대한 재산으로 관직을 샀다며 직설적인 공격을 한 것이다. 공근(孔僅)과 동곽함양(東郭咸陽)에 대해선 “염철전매로 부자로 된 사람만 관직에 등용되고 있다”며 “상인만 관료로 들어올 뿐 올바른 인재는 선택받지 못하고 있다”고 날을 세웠다.
그나마 ‘부자세’ 도입으로도 국가의 재정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기원전 99년 한나라 장군 이릉(李陵)이 흉노에게 사로잡히자, 한무제는 다시 20여만 명의 군사를 투입했다. 상홍양은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세원을 발굴해야 했다.
상홍양은 소금과 철에 이어 술을 국가에서 독점키로 했다. 술의 원료를 포함해 생산에서부터 제조, 유통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국가가 관리키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과도한 세원 확대 정책은 “국가가 생활필수품을 매개로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동중서(董仲舒)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다.
당초 새로운 조세제도 도입 시 고려했던 효과와 달리, 실물경제의 왜곡과 비효율도 계속되면서 상홍양의 처지도 어려워졌다. 이후 한무제 마저 죽어버리자 강력한 바람막이를 잃은 상홍양의 입지는 빠르게 축소됐다. 결국 상홍양은 BC80년 75세의 나이로 모반죄에 몰려 멸족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모든 증세는 강한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중국사의 초기 단계부터 뚜렷하게 드러났다. 증세를 한다고 해서 필요한 액수를 모두 채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도 같이 증명됐다. 징세의 어려움이라는 조세 당국의 어려운 과제가 역사의 첫 장부터 제시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9일 민생토론회에서 “(이전 정부의) 징벌적 과세부터 확실히 바로잡겠다”며 “무모한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을 전면 폐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에서 5년간 공시가격을 연평균 10%씩 총 63%까지 올려 집 한 채 가진 보통 사람들의 거주비 부담이 급등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 사실 큰 매매 차익을 거뒀을 경우, 지나치게 잦은 매매에 따른 양도소득세나 다주택 소유자에 대한 합리적 수준의 가중 과세라면 몰라도 통상의 1가구 1주택자에 대한 중과세는 ‘정부의 폭력’에 다름없다는 지적이 적지 않게 제기됐다.
자연스레 납세자인 국민들은 세금을 두고 ‘폭탄’ ‘징벌적 과세’라고 부르며 불만을 드러냈다. ‘국가가 국민의 재산을 빼앗아 간다’는 인식을 줘서는 안정적인 조세 정책이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국민에게서 '갈취'하는 형태로는 세금을 걷는 게 쉽지 않았음이 역사의 초창기부터 잘 드러난다.
김동욱 오피니언부장 kimdw@hankyung.com
상홍양의 정책 구상은 그의 저서 <염철론(鹽鐵論)>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재정과 외교, 도덕, 철학 등 다방면의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핵심은 경제적인 내용이었다. 고대 사회에서도 정치의 중점이 경제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특히 책의 정책 초점은 국가 재정에 맞춰져 있었다.
때마침 국가의 자금 수요가 폭증했다. 앞서 기원전 140년 무제 즉위 이후 한나라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안정되며 번영을 구가해왔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시기는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상류층의 사치품 수요가 급증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주변 이민족과 군사적 대립이 늘면서 국가 재정수요가 급증했다.
국가 재정을 늘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농민들에게서 걷는 세금을 늘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농민들에게서 쥐어짤 수 있는 한도만큼 세금을 쥐어짰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에 상홍양은 소금과 철을 국가에서 독점하는 ‘염철전매(鹽鐵專賣)’와 유통구조 개선 등을 통해 국고를 늘리는 정책을 시행했다. 하지만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는 게 세상사였다.
태행산 동부 지역에서 대형 물난리가 나면서 70여만 명의 농민이 땅을 잃고 떠도는 사태가 발생했다. 상홍양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산이 많은 사람에게서 일종의 재산세인 ‘산민전(算緡錢)’을 거뒀다.
산민전은 돈이 많은 상인과 수공업자, 고리대금업자 등에게 자발적으로 자산을 신고하게 해서 2민(緡, 1민은 1000전(錢))당 10%, 규모가 작은 상인에겐 5%의 세금을 걷는 식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부자세’를 통해 위기에 처한 농민을 구하려 한 셈이었다.
자산가들을 겨냥한 정책이 시행되자 그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던 상인들은 재산을 은닉하고 신고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정은 자산을 은닉한 사람은 일 년 동안 변방에 보내고, 신고에서 누락된 민전을 모두 몰수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숨겨놓은 자산을 신고한 ‘세파라치’에게 몰수재산의 반을 준다고 하면서 상인들을 압박했다.
이 같은 정책으로 일부 세수가 느는 효과는 분명히 있긴 했다. 하지만 사회에선 상대적으로 자산가들의 부담이 늘면서, 어렵게 부를 쌓기보다는 돈을 버는 대로 바로바로 써버리는 소비 행태가 나타났다.
이에 대해 당대의 관료들은 “황제가 고기 음식을 줄이고 비용도 절약해 내정(內廷)에 모아둔 돈을 꺼내 백성들을 구제하고 부세도 관대히 해줬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밭에 나가 농업에 힘쓰지 않는다”며 “상업에 종사하는 자만 더욱 늘고, 가난한 사람은 저축한 것이 없어 오직 조정에만 의지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특히 “백성들은 소비에 치중해 저축하거나 투자하지 않았다”는 <사기>의 사평은 후대에 두고두고 상홍양의 정책에 꼬리표로 따라다녔다. 사마천은 한무제 시대 상인 출신들이 대거 중앙정계에 진출한 것도 못마땅해했다. 양을 천여마리나 길렀다는 복식(卜式) 등이 장사로 조성한 막대한 재산으로 관직을 샀다며 직설적인 공격을 한 것이다. 공근(孔僅)과 동곽함양(東郭咸陽)에 대해선 “염철전매로 부자로 된 사람만 관직에 등용되고 있다”며 “상인만 관료로 들어올 뿐 올바른 인재는 선택받지 못하고 있다”고 날을 세웠다.
그나마 ‘부자세’ 도입으로도 국가의 재정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기원전 99년 한나라 장군 이릉(李陵)이 흉노에게 사로잡히자, 한무제는 다시 20여만 명의 군사를 투입했다. 상홍양은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세원을 발굴해야 했다.
상홍양은 소금과 철에 이어 술을 국가에서 독점키로 했다. 술의 원료를 포함해 생산에서부터 제조, 유통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국가가 관리키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과도한 세원 확대 정책은 “국가가 생활필수품을 매개로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동중서(董仲舒)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다.
당초 새로운 조세제도 도입 시 고려했던 효과와 달리, 실물경제의 왜곡과 비효율도 계속되면서 상홍양의 처지도 어려워졌다. 이후 한무제 마저 죽어버리자 강력한 바람막이를 잃은 상홍양의 입지는 빠르게 축소됐다. 결국 상홍양은 BC80년 75세의 나이로 모반죄에 몰려 멸족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모든 증세는 강한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중국사의 초기 단계부터 뚜렷하게 드러났다. 증세를 한다고 해서 필요한 액수를 모두 채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도 같이 증명됐다. 징세의 어려움이라는 조세 당국의 어려운 과제가 역사의 첫 장부터 제시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9일 민생토론회에서 “(이전 정부의) 징벌적 과세부터 확실히 바로잡겠다”며 “무모한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을 전면 폐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에서 5년간 공시가격을 연평균 10%씩 총 63%까지 올려 집 한 채 가진 보통 사람들의 거주비 부담이 급등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 사실 큰 매매 차익을 거뒀을 경우, 지나치게 잦은 매매에 따른 양도소득세나 다주택 소유자에 대한 합리적 수준의 가중 과세라면 몰라도 통상의 1가구 1주택자에 대한 중과세는 ‘정부의 폭력’에 다름없다는 지적이 적지 않게 제기됐다.
자연스레 납세자인 국민들은 세금을 두고 ‘폭탄’ ‘징벌적 과세’라고 부르며 불만을 드러냈다. ‘국가가 국민의 재산을 빼앗아 간다’는 인식을 줘서는 안정적인 조세 정책이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국민에게서 '갈취'하는 형태로는 세금을 걷는 게 쉽지 않았음이 역사의 초창기부터 잘 드러난다.
김동욱 오피니언부장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