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가난한 경제적 자유주의자의 고백
지난 3월 1일 금요일자 한국경제신문에는 ‘국민 경제이해력 50점대…경제교육 이대로는 안 된다’라는 사설이 실렸다. “기본 경제 지식도 없이 사회생활을 하는 국민이 절반이 넘는다”는 등의 걱정들과 학교의 경제교육 커리큘럼 강화와 경제 지도교사 양성에 더하여 인공지능(AI)을 이용한 경제교육까지도 적극 강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 좋은 얘기다. 다만 그 사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나는 심경이 좀 복잡했다. 요즘처럼 남녀노소가 돈과 돈에 관한 모든 것들에 몰두해 영악한 시절이 있었나 싶은 내 느낌은 대체 뭐지 싶었다. 하긴, 모를 일이다. 현실은 다양한 사실들의 총합이며, 진실은 현실에 대한 요약처럼 고지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니까.

심지어 진실은 ‘혼란’ 그 자체인 경우도 많다. 경제교육을 받으면 경제적으로 성공하거나 말거나 이전에, 그 경제교육이 진짜 경제교육인지는 무엇으로 증명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품는 까닭은, 자유시장경제를 이용하여 부를 충분히, 혹은 넘치게 축적해 누리고 사는 부류들 중에 자유시장경제를 ‘자본주의’라고 부르며 악마화하는 화이트칼라들과 고소득 귀족노조 노동자들이 당장 내 주변에, 이 사회 전반에 엄청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유한 지식인들 가운데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소개하는 위인들도 적잖다. 그러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레닌처럼 혁명을 일으켜 다 뺏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드는 것은, 나야말로 재테크는커녕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며 앞날도 별로 달라질 가망이 없는 원고지 막노동꾼이기 때문이다.

내 소원이 진짜 사회주의자 한 번 구경해보는 거였는데, 가짜 사회주의자들 설치는 것 좀 안 보고 사는 걸로 바뀐 지 오래다. 경제교육을 한들 그것이 자유시장경제 실현의 근간이 되는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적 입장을 담보하지 못한 채 도리어 경제와 정치에 대해 이중적이고 분열적인 태도를 양산하거나 방치한다면 그런 경제교육은 정신병동으로 보내야 맞다. 자유시장경제에 대해 적반하장과 배은망덕을 일삼는 ‘주둥이 공산주의자’들이 왜 이리 많은 걸까? 이 질문이 그 어떤 경제교육보다 우선돼야 하는 이유는 인간에 대한 진실과 세상에 대한 지식은 하나로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인문학도로서 경제공부를 하는 것은, 경제에 대해 떠들어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문학적으로 ‘개소리’를 하지 않기 위해서다. 무엇보다, 인문사회‘과학’이라는 말 자체가 결국은 거짓을 못 벗어나는 ‘과장’이다. 인문사회 연구를 정확하게 하자는 신념과 다짐의 차원일 뿐, 과학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거시적으로는 ‘문학’이거나 그 일종이고, 과학은 과학밖에는 없다. 어느 특정 분야의 훌륭한 전문가든지 세상에 대해 뭔가 개소리를 할 적에 가만 들여다보면 십중팔구는 사이비 신학(神學) 같은 사회주의적 교주나 교인 노릇을 하고 있기 마련이다. 심지어 경제학자라는 자들까지 그렇다.

물론 나 역시 386이라는 시대의 일부분으로서 ‘습관성 좌익 지사(志士)’였고 지금처럼 여러 관점에서 정리가 된 것은 십여 년이 안 되었다. 나는 내 무지함으로 세상에 폐를 끼치긴 싫었다. 나는 위선자인가? 그렇다. 나 역시 현실의 위선자이며 실존적으로는 죄인이다. 면피하려는 게 아니다. 악행을 할 바엔 차라리 알고 하지 모르면서 하고 싶진 않았고, 그게 심해서 위악적이라는 비난도 듣는 처지다. 하지만 이게 낫지 후회는 없다. ‘모든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다.’ 그런데 이 멋대가리 없는 말이 자유주의 철학의 빛나는 핵심이다. 나는 인간에 대한 오만(傲慢)의 아류이자 역사적 재앙의 원인인 위선보다는, 개인과 이기심의 역설적 도덕성과 직업정신을 믿는다.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뿐이고,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는 서로에게서만 정상 작동한다.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칭하는 사람들 중에서‘조차’ ‘경제적 자유주의자’는 드물고, 이게 우리 사회 내로남불의 뿌리다. 경제교육으로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주의자로서 한 인생을 살 수는 있다. 바닷물을 다 마셔봐야 바닷물이 짜다고 인정하는 어리석은 존재가 인간이다. 그러지 않는 게 자유주의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