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모래와 씨름한 그가 말했다, 난 그림자를 그릴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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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라의 파노라마
'본다는 것'에 질문 던지는 벽돌화가 김강용 화백
저 무거운 벽돌들을
어떻게 잘라 붙였지?
궁금해 다가가면 평면
정교한 선, 자연의 빛과
그림자들이 평면 위에
거침없는 환영 만들어
'본다는 것'에 질문 던지는 벽돌화가 김강용 화백
저 무거운 벽돌들을
어떻게 잘라 붙였지?
궁금해 다가가면 평면
정교한 선, 자연의 빛과
그림자들이 평면 위에
거침없는 환영 만들어
사각의 벽돌들이 캔버스 위에 나란히 정렬한다. 수백 개의 벽돌은 어딘가는 튀어나오고 어딘가는 들어가고, 각각의 운율로 노래한다. ‘저 무거운 벽돌들을 다 어떻게 잘라 붙였을까? 벽엔 또 어떻게 걸었을까?’ 궁금해하며 다가가면 눈을 의심하게 된다. 사실은 평면이어서다.
정교하게 그어진 선, 자연의 빛과 그림자를 평면 위에 거침없이 환영을 만들어내는 대형 그림들은 50년 넘게 모래와 싸워온 김강용 화백(74·사진)의 작품이다. 1970년대 극사실회화로 시작해 평면 위에 벽돌을 채워낸 작가는 이제 모래 전문가가 됐다. ‘벽돌화가’라는 수식어를 얻었지만 “난 벽돌을 그리는 게 아니라 그림자를 그리는 것”이라며 웃었다. 결과물도 놀랍지만 과정은 더 그렇다. 체에 걸러낸 고운 모래들을 캔버스 위에 펴 바르고, 스케치 없이 그려낸다. ‘오후 2시의 빛과 그림자’를 상상하며 그림자를 그리는 식이다. 지난 8일 서울 청담동 장디자인아트에서 개막한 개인전 ‘무한육면각체’에서 김 화백을 만났다. 왜 벽돌만을 그리는가의 대한 답은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1978년 홍익대 학부 졸업 당시 ‘사실과 현실’이라는 극사실회화 단체를 결성했다. 산업화가 한창이었고, 노동자들의 시위도 빈번한 때다. 풀과 벽돌을 쉼 없이 그렸다. 극사실 회화와 초현실 회화를 넘나드는 작품이 다수 탄생했다. 작은 풀들이 모여 숲을 이루고, 모래 한알 한알이 모여 벽돌이 되고 건축물이 되는 과정을 관찰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세상을 이루는 것에 비유한 셈이다.
어느 날 벽돌 더미를 그리다가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다가 모래를 캔버스에 바른 뒤 벽돌의 그림자를 그려 나가는 독보적인 기법을 도입했다. 벽돌은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 그려진 상(像). 그렇게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들고, 2차원의 회화를 3차원으로 확대하는 실험을 계속했다. 그의 그림 앞에 선 사람들은 여러 시점에서 보곤 한다. 까치발을 들어 위에서 내려다보는가 하면, 쭈그리고 앉아 아래에서 위를 보기도 한다. 오른쪽과 왼쪽으로 서서히 걸으며 평면 위에 펼쳐진 입체라는 환상에 빠져든다.
▷모래의 색이 다채롭습니다. 물감을 섞지 않고 어떻게 작업하나요.
“물감이 안 들어간 천연 재료들이에요. 나라와 지역마다 모래의 색깔과 굵기, 질감이 다릅니다. 한국 모래가 최고죠. 투명하고 여러 색의 규사가 섞여 질감과 색이 다양합니다. 그 모래들을 곱게 갈아 섞은 뒤 나만의 색을 만들기도 합니다. 접착제로 캔버스에 얇게 펴 바른 모래를 끌로 파내고, 그 자리에 다른 색상과 굵기의 모래를 집어넣는 작업도 합니다.”
▷재료를 다 어디서 구합니까.
“보통 한 달에 한두 번은 나가고, 서너 달에 한 번씩 가기도 합니다. 아내와 함께 ‘모래 채집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 목포~부산~강릉을 돌아서 오기도 합니다. 그렇게 수십 년 다니다 보니 모래만 봐도 삼천포 모래인지 만리포 모래인지 바로 알 수 있지요.”
▷점점 단순해졌습니다. 벽돌 한장을 그리는 경우도 있네요.
“강렬한 에너지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벽돌 회화는 시각예술이 가진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던 게 계기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믿게 하는 것. 착시(일루전)라는 것을 평면에 도입해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어보려는 시도였죠. 다양한 색채로 에너지를 전달하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김 화백은 1950년 전북 정읍 덕천면 산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8남매 중 장남이던 그는 서너 살 무렵부터 그림만 그렸다. 아버지 몰래 호롱불 밑에서 그림을 그린 날이 허다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해준 칭찬 한마디가 그를 화가의 길로 이끌었다. 읍내의 배영중학교에 입학하고, 1학년 미술교사였던 나병준 선생이 그를 미술반으로 이끌었다. 미술반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긴 설득 끝에 아버지로부터 서울 유학을 허락받았다. 서라벌예대 부속인 서라벌고에 차석 입학한 그는 1971년 홍익대 서양화과에 들어갔다. 단색화의 거장 고(故) 박서보 화백이 당시 지도교수. 1976년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그는 같은 해 특유의 첫 벽돌 그림 ‘현실+상(像)’을 발표했다. 1979년 극사실화로는 최초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을 수상했다. 1999년 쾰른 아트페어에서 출품작이 전부 팔려나갈 만큼 인기를 끌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이후 국제적인 아트페어에 다수 참여했다. 지금도 그는 양평 작업실을 매일 청소하는 걸 즐긴다. 대부분 작업을 조수 없이 혼자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아침 7시부터 새벽 1시쯤까지 온종일 그림만 그린다고.
▷스승 박서보 화백과의 인연을 돌아본다면.
“무척 엄하셨지만 그런 분이 계셨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었습니다. 박서보 선생님이 주도한 ‘에꼴 드 서울’(정기 그룹전)에 갓 졸업한 저를 참여시켰고, 무엇보다 극사실주의 회화 운동 ‘사실과 현실’을 시작할 수 있게 독려했지요. 당시 한국 화단은 추상회화가 대세였어요. 사물 그대로를 정확히 재현하는 사실주의는 진부한 예술로 폄훼되던 때였습니다. 국제적으로도 활동하던 박 선생님이 “세계미술운동의 흐름은 극사실주의 회화”라며 잡지도 가져다주시고, 가르치셨어요. 큰 힘이 됐죠.”
▷홍익대 교수 생활을 하다가 2004년 돌연 퇴직하고 10년간 뉴욕으로 떠났습니다.
“1999년부터 홍익대 미술대학원이 생기며 전임 교수가 됐죠. 학생들과 소통하고 가르치는 건 즐거웠지만, 논문 지도하랴 내 그림 그릴 시간이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영어 한마디 못 했지만 더 늦기 전에 내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브루클린 덤보의 한 오피스텔에 작업실을 차렸어요. 그러곤 2년 동안 집 밖에 안 나오고 작업실 가득 그림이 쌓일 때까지 몰입했습니다.”
▷뉴욕 시기를 지나면서 그림이 밝아졌습니다.
“맨해튼이 빌딩 숲인데 전부 벽돌로 돼 있더라고요. 벽돌 색깔이 다 다른데 그걸 매일 보며 영감을 얻었어요. 20년 넘게 모노톤으로 작업하며 모래색의 톤과 질감만 연구했고, 뉴욕에 살며 컬러 벽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과 세상에 알리는 일은 달랐을 것 같습니다.
“좌충우돌해야 하죠. 내 그림을 직접 보지 않고 어떻게 느낄 수 있겠습니까. 당시 프랫 인스티튜트의 저명한 평론가를 무작정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내 스튜디오에 한번 와달라’고 했어요. 흔쾌히 수락하더군요. 직접 와서 본 뒤 조금씩 길이 열렸습니다. 2006년 뉴욕 뉴호프 갤러리에서 전시 초대전을 했고, 그 인연으로 2008년 가나아트의 서울 전시가 열렸죠. 베이징에서의 초대전은 물론 2020년 성곡미술관에선 160여 점의 작품을 모은 대규모 회고전도 치렀습니다. 올해는 뉴욕 전시가 예정돼 있고요.”
▷모래와 수십 년, 이제 지겹지 않으십니까.
“수백 점의 작품 중 같은 그림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그린 건 다신 안 그립니다. ‘세상에 없는 것, 누구도 하지 못한 것’을 하자는 신념으로 살았어요. 나에게 있어 화가란 미래를 그리는 사람입니다. 모래알 하나하나를 여러 시점에서 보는 감상자들에게 사유의 시간, 보는 행위의 본질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모래 위에 그림자를 그릴 것 같습니다.”
김보라 문화부 차장/사진=임대철 기자 destinybr@hankyung.com
정교하게 그어진 선, 자연의 빛과 그림자를 평면 위에 거침없이 환영을 만들어내는 대형 그림들은 50년 넘게 모래와 싸워온 김강용 화백(74·사진)의 작품이다. 1970년대 극사실회화로 시작해 평면 위에 벽돌을 채워낸 작가는 이제 모래 전문가가 됐다. ‘벽돌화가’라는 수식어를 얻었지만 “난 벽돌을 그리는 게 아니라 그림자를 그리는 것”이라며 웃었다. 결과물도 놀랍지만 과정은 더 그렇다. 체에 걸러낸 고운 모래들을 캔버스 위에 펴 바르고, 스케치 없이 그려낸다. ‘오후 2시의 빛과 그림자’를 상상하며 그림자를 그리는 식이다. 지난 8일 서울 청담동 장디자인아트에서 개막한 개인전 ‘무한육면각체’에서 김 화백을 만났다. 왜 벽돌만을 그리는가의 대한 답은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1978년 홍익대 학부 졸업 당시 ‘사실과 현실’이라는 극사실회화 단체를 결성했다. 산업화가 한창이었고, 노동자들의 시위도 빈번한 때다. 풀과 벽돌을 쉼 없이 그렸다. 극사실 회화와 초현실 회화를 넘나드는 작품이 다수 탄생했다. 작은 풀들이 모여 숲을 이루고, 모래 한알 한알이 모여 벽돌이 되고 건축물이 되는 과정을 관찰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세상을 이루는 것에 비유한 셈이다.
어느 날 벽돌 더미를 그리다가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다가 모래를 캔버스에 바른 뒤 벽돌의 그림자를 그려 나가는 독보적인 기법을 도입했다. 벽돌은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 그려진 상(像). 그렇게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들고, 2차원의 회화를 3차원으로 확대하는 실험을 계속했다. 그의 그림 앞에 선 사람들은 여러 시점에서 보곤 한다. 까치발을 들어 위에서 내려다보는가 하면, 쭈그리고 앉아 아래에서 위를 보기도 한다. 오른쪽과 왼쪽으로 서서히 걸으며 평면 위에 펼쳐진 입체라는 환상에 빠져든다.
▷모래의 색이 다채롭습니다. 물감을 섞지 않고 어떻게 작업하나요.
“물감이 안 들어간 천연 재료들이에요. 나라와 지역마다 모래의 색깔과 굵기, 질감이 다릅니다. 한국 모래가 최고죠. 투명하고 여러 색의 규사가 섞여 질감과 색이 다양합니다. 그 모래들을 곱게 갈아 섞은 뒤 나만의 색을 만들기도 합니다. 접착제로 캔버스에 얇게 펴 바른 모래를 끌로 파내고, 그 자리에 다른 색상과 굵기의 모래를 집어넣는 작업도 합니다.”
▷재료를 다 어디서 구합니까.
“보통 한 달에 한두 번은 나가고, 서너 달에 한 번씩 가기도 합니다. 아내와 함께 ‘모래 채집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 목포~부산~강릉을 돌아서 오기도 합니다. 그렇게 수십 년 다니다 보니 모래만 봐도 삼천포 모래인지 만리포 모래인지 바로 알 수 있지요.”
▷점점 단순해졌습니다. 벽돌 한장을 그리는 경우도 있네요.
“강렬한 에너지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벽돌 회화는 시각예술이 가진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던 게 계기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믿게 하는 것. 착시(일루전)라는 것을 평면에 도입해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어보려는 시도였죠. 다양한 색채로 에너지를 전달하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김 화백은 1950년 전북 정읍 덕천면 산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8남매 중 장남이던 그는 서너 살 무렵부터 그림만 그렸다. 아버지 몰래 호롱불 밑에서 그림을 그린 날이 허다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해준 칭찬 한마디가 그를 화가의 길로 이끌었다. 읍내의 배영중학교에 입학하고, 1학년 미술교사였던 나병준 선생이 그를 미술반으로 이끌었다. 미술반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긴 설득 끝에 아버지로부터 서울 유학을 허락받았다. 서라벌예대 부속인 서라벌고에 차석 입학한 그는 1971년 홍익대 서양화과에 들어갔다. 단색화의 거장 고(故) 박서보 화백이 당시 지도교수. 1976년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그는 같은 해 특유의 첫 벽돌 그림 ‘현실+상(像)’을 발표했다. 1979년 극사실화로는 최초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을 수상했다. 1999년 쾰른 아트페어에서 출품작이 전부 팔려나갈 만큼 인기를 끌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이후 국제적인 아트페어에 다수 참여했다. 지금도 그는 양평 작업실을 매일 청소하는 걸 즐긴다. 대부분 작업을 조수 없이 혼자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아침 7시부터 새벽 1시쯤까지 온종일 그림만 그린다고.
▷스승 박서보 화백과의 인연을 돌아본다면.
“무척 엄하셨지만 그런 분이 계셨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었습니다. 박서보 선생님이 주도한 ‘에꼴 드 서울’(정기 그룹전)에 갓 졸업한 저를 참여시켰고, 무엇보다 극사실주의 회화 운동 ‘사실과 현실’을 시작할 수 있게 독려했지요. 당시 한국 화단은 추상회화가 대세였어요. 사물 그대로를 정확히 재현하는 사실주의는 진부한 예술로 폄훼되던 때였습니다. 국제적으로도 활동하던 박 선생님이 “세계미술운동의 흐름은 극사실주의 회화”라며 잡지도 가져다주시고, 가르치셨어요. 큰 힘이 됐죠.”
▷홍익대 교수 생활을 하다가 2004년 돌연 퇴직하고 10년간 뉴욕으로 떠났습니다.
“1999년부터 홍익대 미술대학원이 생기며 전임 교수가 됐죠. 학생들과 소통하고 가르치는 건 즐거웠지만, 논문 지도하랴 내 그림 그릴 시간이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영어 한마디 못 했지만 더 늦기 전에 내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브루클린 덤보의 한 오피스텔에 작업실을 차렸어요. 그러곤 2년 동안 집 밖에 안 나오고 작업실 가득 그림이 쌓일 때까지 몰입했습니다.”
▷뉴욕 시기를 지나면서 그림이 밝아졌습니다.
“맨해튼이 빌딩 숲인데 전부 벽돌로 돼 있더라고요. 벽돌 색깔이 다 다른데 그걸 매일 보며 영감을 얻었어요. 20년 넘게 모노톤으로 작업하며 모래색의 톤과 질감만 연구했고, 뉴욕에 살며 컬러 벽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과 세상에 알리는 일은 달랐을 것 같습니다.
“좌충우돌해야 하죠. 내 그림을 직접 보지 않고 어떻게 느낄 수 있겠습니까. 당시 프랫 인스티튜트의 저명한 평론가를 무작정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내 스튜디오에 한번 와달라’고 했어요. 흔쾌히 수락하더군요. 직접 와서 본 뒤 조금씩 길이 열렸습니다. 2006년 뉴욕 뉴호프 갤러리에서 전시 초대전을 했고, 그 인연으로 2008년 가나아트의 서울 전시가 열렸죠. 베이징에서의 초대전은 물론 2020년 성곡미술관에선 160여 점의 작품을 모은 대규모 회고전도 치렀습니다. 올해는 뉴욕 전시가 예정돼 있고요.”
▷모래와 수십 년, 이제 지겹지 않으십니까.
“수백 점의 작품 중 같은 그림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그린 건 다신 안 그립니다. ‘세상에 없는 것, 누구도 하지 못한 것’을 하자는 신념으로 살았어요. 나에게 있어 화가란 미래를 그리는 사람입니다. 모래알 하나하나를 여러 시점에서 보는 감상자들에게 사유의 시간, 보는 행위의 본질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모래 위에 그림자를 그릴 것 같습니다.”
김보라 문화부 차장/사진=임대철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