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묵은 글이 곧 그림”…반 세기 바친 ‘붓의 길 먹의 마음’
‘젊은 명창은 있어도, 젊은 명필은 없다.’ 이 화두를 깨닫기까지 40년이 걸렸다. 시간과 노력 속에서 글씨(書)가 예술(藝)이 되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먹에 세월이 담기고, 각고의 노력이 스며들어 나만의 감각을 찾아낼 때 서예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라고 말하는 문봉선(63)은 서성(書聖) 왕희지를 임모(臨摹·원작을 본뜸)하면서도 자신만의 심상 언어로 재구축한 필묵을 찾았다고 한다.

서울 혜화동 JCC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붓의 길 먹의 마음’은 무여(無如) 문봉선이 50여년간 닦은 서예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자리다. 1~4층에 이르는 전시 공간을 모두 서예 작품들로 채웠는데, 층마다 주제가 다른 점이 흥미롭다. 1층이 고금을 통틀어 최고 서예가로 꼽히는 1700년 전 왕희지의 필법을 체득한 공간이라면, 점차 계단을 올라 ‘법고창신(法古創新)’이란 주제의 4층에 닿으면 옛것을 넘어 문봉선만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 나온다.
맹호연의 '춘효'를 문봉선의 초서체로 쓴 작품. '밤 야'자 위에 달이 뜬 것처럼 의도했다.
맹호연의 '춘효'를 문봉선의 초서체로 쓴 작품. '밤 야'자 위에 달이 뜬 것처럼 의도했다.
홍익대 동양화과를 나와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을 받은 문봉선은 화단에 수묵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화업의 본질은 언제나 ‘서화’에 있다. 그림의 정신적 바탕에 글씨가 있다고 확신하는 ‘서화동원’(書畵同源) 철학에서다. 불혹에 접어들고 나서부턴 직접 중국 남경을 찾아 5년간 초서 연구에 매달리는 등 서예에 더욱 매진해왔다. 그는 “글을 쓸 줄 알아야 수묵화도 그리는 것”이라며 “둘 중 하나도 해내기 쉽지 않지만, 마음이 통하면 길은 열리기 마련”이라고 했다.

서화가답게 서예에 수묵화가 스며있는 작품들이 인상적이다. 중국 당나라 시인 맹호연의 ‘춘효’(春曉) 를 쓴 작품의 경우 ‘夜來風雨聲’(밤사이 비바람 소리 들리더니) 구절에서 밤을 뜻하는 ‘야’(夜) 의 첫 획을 초승달처럼 그려 넣었다. 소동파와 교류한 화가 문동이 지은 ‘문여가화운당곡언죽기’(文與可畵篔簹谷偃竹記)에는 직접 글 사이사이 대나무를 그려 넣었다. 문봉선은 “마음속으로 대나무의 모양을 떠올리고, 그 심상을 높은 집중력으로 단숨에 그려내야 한다는 내용을 고스란히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전시는 4월 7일까지.
문봉선이 '소나무 송'(松) 한자를 소나무처럼 그려낸 작품.
문봉선이 '소나무 송'(松) 한자를 소나무처럼 그려낸 작품.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