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과 죽음과 지하에서 구원과 생명과 초월을 끌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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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허남웅의 씨네마틱 유로버스
영화 <키메라 (La chimera)>
서로 다른 세계를 실 한 줄로 엮다
영화 <키메라 (La chimera)>
서로 다른 세계를 실 한 줄로 엮다
제목의 ‘키메라 (chimera)’는 사전적으로 한 개체 내에 서로 다른 유전적 성질을 가진 현상을, 그리스 신화에서는 머리와 몸통과 꼬리가 서로 다른 기이한 짐승 혹은 괴물을 의미한다. 그럼 이 영화는 일종의 크리처를 다루는 장르영화인가?
이탈리아 출신의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은 국내 팬들에게 <행복한 라짜로>(2018)로 유명하다. 자본주의의 계급 현실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바보 라짜로(아르디아노 타르디올로)의 시점에서 접근한 현대의 우화 같은 작품이었다. 이 영화로 그해 칸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받기도 했는데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신작이라면 아무래도 장르물과는 거리가 멀 테다.
<키메라>의 주인공 아르투로(조쉬 오코너)는 라짜로처럼 신비한 능력을 갖췄다. 땅속에 유물이 묻혀있는지 여부를 귀신같이 알아낸다. 사람들의 감시가 닿지 않는 곳이나 늦은 시간을 이용해 불법으로 땅을 판다. 함께하는 동료들과 다르게 발견한 유물로 큰돈을 벌고자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다. 잃어버린 연인 베니아미나(일 비아넬로)를 찾는 것이다. 옛 애인을 찾겠다면서 아르투로는 왜 도굴을 하는 것인가. 이는 어떻게 이 영화의 제목이 ‘키메라’가 되어야 했는지를 알려주는 힌트의 역할을 한다. 키메라는 실제로 극 중에서 아르투로와 친구들이 발굴한 유물로 머리가 없는 형태다. 머리만 있으면 거의 완벽한 형태로 고가에 거래될 것이 뻔하다. 우여곡절 끝에 알게 된 키메라 머리의 행방.
합법을 가장한 불법 경매 현장에서 키메라의 머리를 품에 안은 아르투로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깊은 물 속으로 던져 빠뜨린다. 그렇게 원하면서 실제로는 원하지 않는 아이러니의 상태는 제목이 지칭하는 키메라의 속성이면서 아르투로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현재는 이별의 상태이고, 지상에 존재하지만, 지하에 관심이 있고, (극 중 배경이 1980년대이기는 해도), 현대를 살지만, 과거에 얽매여 있는 등 아르투로는 그 자신이 키메라인 셈이다.
“숭고한 것을 가볍게, 신성한 것을 불경하게 다루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바“라고 연출론을 피력하는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목적은 <키메라>에 아이러니의 ‘물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물성이란 한 개체가 가진 고유한 성질을 의미하는데 감독은 극 중 아르투로의 성격을 형식으로 삼아 영화 자체를 ‘키메라’로 만든다. 관객은 <키메라>의 눈에 보이는 정보 외에 그 아래 매설된 숨은 의미를 찾는 것으로 감독의 의도에 동참하게 된다. 아르투로의 여정 혹은 시선에서 영화를 관람한다는 것으로 그럼으로써 스크린의 안과 밖 세계는 구별 선이 사라지고 하나의 세계 안에서 사고(思考)하게 된다. 이는 정확히 아르투로의 정신 상태와 처지를 반영한 것인데 그는 현재와 과거를, 지상과 지하를, 현실과 환상을, 무엇보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존재다.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말을 가이드 삼는다면 <키메라>의 마지막 장면은 꽤 마술적으로 다가온다. 유물이 묻힌 공간을 감별하던 아르투로는 지반이 무너지면서 추락해 그만 땅 아래 갇히고 만다. 꽤 오랜 시간 암전이 이어진 후 아르투로는 모습을 드러낸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가 싶은데 작은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며 줄이 하나 길게 늘어진다. 이를 잡아당기자 반대편이 모습을 드러내고 땅속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아르투로가 그렇게 찾던 베니아미나와 조우한다.
현실일까, 아니면 환상일까. 아르투로는 살아남은 것인가, 혹은 죽은 후 천국으로 간 것인가. 여러 가지 해석 여부는 차치하고 이 장면으로 알리체 로르바케르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를 하나의 줄로 연결해 키메라처럼 일원화한다. 영국인 배우 조쉬 오코너(<더 크라운>의 찰스 왕세자!)가 연기한 극 중 아르투로가 어둠, 죽음, 지하와 같은 세계를 탐험하는 가운데 감독은 거기서 삶을, 생명을, 구원을, 화해를, 초월의 순간을 끌어낸다. 어느 하나로 규정이 불가능한 <키메라>는 모든 것을 품은 세계 그 자체다. /허남웅 영화평론가
이탈리아 출신의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은 국내 팬들에게 <행복한 라짜로>(2018)로 유명하다. 자본주의의 계급 현실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바보 라짜로(아르디아노 타르디올로)의 시점에서 접근한 현대의 우화 같은 작품이었다. 이 영화로 그해 칸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받기도 했는데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신작이라면 아무래도 장르물과는 거리가 멀 테다.
<키메라>의 주인공 아르투로(조쉬 오코너)는 라짜로처럼 신비한 능력을 갖췄다. 땅속에 유물이 묻혀있는지 여부를 귀신같이 알아낸다. 사람들의 감시가 닿지 않는 곳이나 늦은 시간을 이용해 불법으로 땅을 판다. 함께하는 동료들과 다르게 발견한 유물로 큰돈을 벌고자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다. 잃어버린 연인 베니아미나(일 비아넬로)를 찾는 것이다. 옛 애인을 찾겠다면서 아르투로는 왜 도굴을 하는 것인가. 이는 어떻게 이 영화의 제목이 ‘키메라’가 되어야 했는지를 알려주는 힌트의 역할을 한다. 키메라는 실제로 극 중에서 아르투로와 친구들이 발굴한 유물로 머리가 없는 형태다. 머리만 있으면 거의 완벽한 형태로 고가에 거래될 것이 뻔하다. 우여곡절 끝에 알게 된 키메라 머리의 행방.
합법을 가장한 불법 경매 현장에서 키메라의 머리를 품에 안은 아르투로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깊은 물 속으로 던져 빠뜨린다. 그렇게 원하면서 실제로는 원하지 않는 아이러니의 상태는 제목이 지칭하는 키메라의 속성이면서 아르투로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현재는 이별의 상태이고, 지상에 존재하지만, 지하에 관심이 있고, (극 중 배경이 1980년대이기는 해도), 현대를 살지만, 과거에 얽매여 있는 등 아르투로는 그 자신이 키메라인 셈이다.
“숭고한 것을 가볍게, 신성한 것을 불경하게 다루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바“라고 연출론을 피력하는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목적은 <키메라>에 아이러니의 ‘물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물성이란 한 개체가 가진 고유한 성질을 의미하는데 감독은 극 중 아르투로의 성격을 형식으로 삼아 영화 자체를 ‘키메라’로 만든다. 관객은 <키메라>의 눈에 보이는 정보 외에 그 아래 매설된 숨은 의미를 찾는 것으로 감독의 의도에 동참하게 된다. 아르투로의 여정 혹은 시선에서 영화를 관람한다는 것으로 그럼으로써 스크린의 안과 밖 세계는 구별 선이 사라지고 하나의 세계 안에서 사고(思考)하게 된다. 이는 정확히 아르투로의 정신 상태와 처지를 반영한 것인데 그는 현재와 과거를, 지상과 지하를, 현실과 환상을, 무엇보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존재다.
“마침내 나는 이 다층적인 이야기, 두 세계 사이의 관계를 다룬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고, 이 3부작(<더 원더스>(2014) <행복한 라짜로> <키메라>)의 마지막 부분은 ‘과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췄다. 도굴꾼들의 말처럼 우리의 인생길에서 생명을 주는 것은 죽은 자들이다.“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말을 가이드 삼는다면 <키메라>의 마지막 장면은 꽤 마술적으로 다가온다. 유물이 묻힌 공간을 감별하던 아르투로는 지반이 무너지면서 추락해 그만 땅 아래 갇히고 만다. 꽤 오랜 시간 암전이 이어진 후 아르투로는 모습을 드러낸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가 싶은데 작은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며 줄이 하나 길게 늘어진다. 이를 잡아당기자 반대편이 모습을 드러내고 땅속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아르투로가 그렇게 찾던 베니아미나와 조우한다.
현실일까, 아니면 환상일까. 아르투로는 살아남은 것인가, 혹은 죽은 후 천국으로 간 것인가. 여러 가지 해석 여부는 차치하고 이 장면으로 알리체 로르바케르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를 하나의 줄로 연결해 키메라처럼 일원화한다. 영국인 배우 조쉬 오코너(<더 크라운>의 찰스 왕세자!)가 연기한 극 중 아르투로가 어둠, 죽음, 지하와 같은 세계를 탐험하는 가운데 감독은 거기서 삶을, 생명을, 구원을, 화해를, 초월의 순간을 끌어낸다. 어느 하나로 규정이 불가능한 <키메라>는 모든 것을 품은 세계 그 자체다. /허남웅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