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 압박이 사라지자 '원초적 여성' 주도의 베드신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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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효정의 금지된 영화 욕망의 기록
두 번째 기록 <매혹당한 사람들> 2부
두 번째 기록 <매혹당한 사람들> 2부
[1부에 이어]
▶▶▶(1부) 서부 액션 거장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성적 노리개'로 만든 이유
영화에서는 여러 가지 시대적 기운이 느껴진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핍박 받아 온 영화 창작자의 한 맺힌 분풀이가, 그리고 1970년대를 지배했던 2차 페미니즘 운동이 그것이다. 영화는 보란듯이 무수한 섹스신 (적어도 기숙학교의 학생 수 만큼은 등장한다)으로 105분의 러닝타임을 채운다.
마치 1970년대 니카츠 로망포르노 영화들이 70분의 러닝타임 동안 적어도 7개의 섹스신을 포함해야 한다는 법칙을 고수했던 것처럼 말이다. 과연 검열의 철폐가 이루어 낸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줄거리에서 드러나듯, 이 모든 섹스는 존이 아닌 학생들, 즉 여성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이전의 할리우드 영화 속 여성들과는 전혀 다른, 적극적인 형태로 이들은 존을 유혹한다. 영화의 반전이라고 언급했던 영화의 후반은 이러한 여성주도적 이야기의 결정판을 보여준다. 교장은 자신의 유혹을 거부하고 다른 학생과 관계를 가진 존을 벌하기로 한다. 그녀는 존에게 의도적으로 부상을 입히고 의식을 잃은 존에게 절단 수술을 시행한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 존은 자신의 다리가 없어진 것을 발견한다.
이 대목에서 존의 다리 절단은 사실상 (그리고 은유적으로) ‘거세’나 다름이 없다. 여성의 세상에 침입해 생태계를 교란시킨 존에게 가장 응당한 처벌은 ‘거세’ 뿐인 것이다. 여자들의 응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겁에 질린 존이 학교를 떠나려 하자 학생들과 교장은 존을 죽이기로 마음 먹는다. 이들은 숲에서 캔 독버섯으로 수프를 만들어 존에게 마지막 만찬으로 선물한다. 의심치 않고 이들이 만들어진 수프를 맛있게 먹은 존은 그대로 쓰러진다. 그리고 시체가 되어 이들의 손에 들려 나간다.
누군가는 내용만으로 영화를 코미디로 오해할 수 있겠지만 분명 이 영화는 ‘심각한’ 톤 앤 매너를 가지고 있다. 물론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강도 높은 에로티시즘과 함께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영화는 이전 할리우드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여성중심적 서사를 보여준다. 존은 이 여자들의 책략에 단 한번의 의심도 품지 않는 아둔한 남성이면서, 궁극적으로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인물이다.
이쯤 되면 이 영화를 1970년대의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페미니스트적 관점을 취하고 있는 작품으로 해석 할 수 있겠지만 (감독 돈 시겔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영화의 저변만큼은 그렇지가 않다. 무엇보다 영화 속 여학생들, 그리고 여자 교장의 성적 호기심과 욕망은 마치 <애마부인>의 애마가 그러하듯 지극히 동물적이고 원시적이다. 이들의 욕망은 즉각적이고 끊임 없으며 집착적이다. 영화 속 여성과 남성은 성적 괴물과 그 피해자로 이분법적인 캐릭터성을 갖는다. 마침내 존이 시체로 실려 나갈 때, 관객은 통쾌함보다 동정심에 가까운 감상을 갖게 될 것이다. 비슷한 경향은 <매혹당한 사람들>이 개봉하기 몇 년 전에 만들어진 <졸업> (마이크 니콜스, 1967)에서도 반복된다. 이제 대학을 졸업한 벤의 이웃이자 부모님의 친구인 로빈슨 부인은 ‘순진한’ 벤을 유혹해 성적으로 이용하고 그가 진정한 사랑을 찾았을 때 (로빈슨의 딸인 일레인) 벤을 향한 복수를 감행한다.
이 영화들은 이른바 ‘뉴 할리우드 시네마’의 범주에 속하는 영화들로 검열의 철폐와 텔레비전의 부상에 영향을 받은 할리우드의 산업 변화, 그리고 60년대 말에 일어난 사회문화적 사건들 (베트남전, 우드스탁, 민권운동 등) 의 중심부에서 탄생한 영화들이다. 특히 앞서 언급했던 ‘검열의 철폐’와 관련해서 이 영화들은 분명 선대에 시도하지 못했던 이야기, 캐릭터들로 작은 혁명을 이루어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주지해야 할 것은, 이전에 표현할 수 없었던 섹스와 욕망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이 새롭게 정의 (적어도 스크린 위에서는) 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의 표백된 할리우드에서 볼 수 없었던 능동적 여성 캐릭터의 등장은 지극히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이들의 욕망은 여전히 남성적 시선에 갇혀 있는 맹목적이고, 원초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이러한 여성들 앞의 남성들은 (존 처럼) 약자이거나 피해자 일수 밖에 없다. <매혹당한 사람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분명 산업의 변화와 시대의 공기를 머금은 유의미한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재고가 필요한 이유다. /김효정 영화평론가
▶▶▶(1부) 서부 액션 거장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성적 노리개'로 만든 이유
영화에서는 여러 가지 시대적 기운이 느껴진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핍박 받아 온 영화 창작자의 한 맺힌 분풀이가, 그리고 1970년대를 지배했던 2차 페미니즘 운동이 그것이다. 영화는 보란듯이 무수한 섹스신 (적어도 기숙학교의 학생 수 만큼은 등장한다)으로 105분의 러닝타임을 채운다.
마치 1970년대 니카츠 로망포르노 영화들이 70분의 러닝타임 동안 적어도 7개의 섹스신을 포함해야 한다는 법칙을 고수했던 것처럼 말이다. 과연 검열의 철폐가 이루어 낸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줄거리에서 드러나듯, 이 모든 섹스는 존이 아닌 학생들, 즉 여성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이전의 할리우드 영화 속 여성들과는 전혀 다른, 적극적인 형태로 이들은 존을 유혹한다. 영화의 반전이라고 언급했던 영화의 후반은 이러한 여성주도적 이야기의 결정판을 보여준다. 교장은 자신의 유혹을 거부하고 다른 학생과 관계를 가진 존을 벌하기로 한다. 그녀는 존에게 의도적으로 부상을 입히고 의식을 잃은 존에게 절단 수술을 시행한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 존은 자신의 다리가 없어진 것을 발견한다.
이 대목에서 존의 다리 절단은 사실상 (그리고 은유적으로) ‘거세’나 다름이 없다. 여성의 세상에 침입해 생태계를 교란시킨 존에게 가장 응당한 처벌은 ‘거세’ 뿐인 것이다. 여자들의 응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겁에 질린 존이 학교를 떠나려 하자 학생들과 교장은 존을 죽이기로 마음 먹는다. 이들은 숲에서 캔 독버섯으로 수프를 만들어 존에게 마지막 만찬으로 선물한다. 의심치 않고 이들이 만들어진 수프를 맛있게 먹은 존은 그대로 쓰러진다. 그리고 시체가 되어 이들의 손에 들려 나간다.
누군가는 내용만으로 영화를 코미디로 오해할 수 있겠지만 분명 이 영화는 ‘심각한’ 톤 앤 매너를 가지고 있다. 물론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강도 높은 에로티시즘과 함께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영화는 이전 할리우드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여성중심적 서사를 보여준다. 존은 이 여자들의 책략에 단 한번의 의심도 품지 않는 아둔한 남성이면서, 궁극적으로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인물이다.
이쯤 되면 이 영화를 1970년대의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페미니스트적 관점을 취하고 있는 작품으로 해석 할 수 있겠지만 (감독 돈 시겔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영화의 저변만큼은 그렇지가 않다. 무엇보다 영화 속 여학생들, 그리고 여자 교장의 성적 호기심과 욕망은 마치 <애마부인>의 애마가 그러하듯 지극히 동물적이고 원시적이다. 이들의 욕망은 즉각적이고 끊임 없으며 집착적이다. 영화 속 여성과 남성은 성적 괴물과 그 피해자로 이분법적인 캐릭터성을 갖는다. 마침내 존이 시체로 실려 나갈 때, 관객은 통쾌함보다 동정심에 가까운 감상을 갖게 될 것이다. 비슷한 경향은 <매혹당한 사람들>이 개봉하기 몇 년 전에 만들어진 <졸업> (마이크 니콜스, 1967)에서도 반복된다. 이제 대학을 졸업한 벤의 이웃이자 부모님의 친구인 로빈슨 부인은 ‘순진한’ 벤을 유혹해 성적으로 이용하고 그가 진정한 사랑을 찾았을 때 (로빈슨의 딸인 일레인) 벤을 향한 복수를 감행한다.
이 영화들은 이른바 ‘뉴 할리우드 시네마’의 범주에 속하는 영화들로 검열의 철폐와 텔레비전의 부상에 영향을 받은 할리우드의 산업 변화, 그리고 60년대 말에 일어난 사회문화적 사건들 (베트남전, 우드스탁, 민권운동 등) 의 중심부에서 탄생한 영화들이다. 특히 앞서 언급했던 ‘검열의 철폐’와 관련해서 이 영화들은 분명 선대에 시도하지 못했던 이야기, 캐릭터들로 작은 혁명을 이루어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주지해야 할 것은, 이전에 표현할 수 없었던 섹스와 욕망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이 새롭게 정의 (적어도 스크린 위에서는) 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의 표백된 할리우드에서 볼 수 없었던 능동적 여성 캐릭터의 등장은 지극히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이들의 욕망은 여전히 남성적 시선에 갇혀 있는 맹목적이고, 원초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이러한 여성들 앞의 남성들은 (존 처럼) 약자이거나 피해자 일수 밖에 없다. <매혹당한 사람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분명 산업의 변화와 시대의 공기를 머금은 유의미한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재고가 필요한 이유다.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