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원(松石園)
김낙서

외상술에 거문고 들고 날마다 오가니
두 짝 신발 바닥 구멍 나도 기울 줄 모르네.
칠언장편으로 자웅을 다투거니
쇠를 치고 공을 때려 진부한 말이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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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에서 만난 200년 전 시인들 [고두현의 아침 시편]
시가 잘 써지지 않는 날에는 옛길을 걷습니다. 오늘은 서울 서촌 수성동(水聲洞) 계곡 아래 옥인동(玉仁洞) 길입니다. 이 동네는 200여 년 전 많은 시인이 모여 시구를 다듬고 합평을 하며 밤을 지새우던 곳이지요. 그들도 시가 잘 써지지 않으면 이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서로의 집을 오가며 책장을 더듬고 붓끝을 벼리면서 한 구절이라도 더 빛나는 문장을 얻기 위해 골몰했겠지요.

통인시장 지나 필운대로를 따라 올라가다 길가에서 ‘송석원(松石園) 터’ 푯돌을 만났습니다. 옥인동 47의 33번지, 전봇대 옆 좁은 보도에 차도를 등지고 서 있어서 그냥 지나칠 뻔했습니다. 송석원은 조선 후기 서얼과 중인 중심의 위항시인들이 모여 시회를 열던 곳입니다. 모임을 이끈 서당 훈장 천수경(千壽慶·1758~1818)의 집 이름이기도 하지요. 집 뒤로 큰 소나무와 바위가 있어 그렇게 불렀답니다.

천수경은 모임의 이름을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라고 지었습니다. 옥류동 계곡에서 자주 모인다고 해서 ‘옥계시사(玉溪詩社)’라고도 했지요. 시사(詩社)는 시를 짓고 즐기기 위한 모임으로 요즈음의 문학동인과 같습니다. 천수경과 함께 모임을 주도한 서당 친구 장혼(張混)이 <이이엄집(而已广集)>에 밝힌 모임의 의의는 이렇습니다.

‘장기나 바둑으로 사귀는 것은 하루를 가지 못하고, 술과 여색으로 사귀는 것은 한 달을 가지 못하며, 권세와 이익으로 사귀는 것은 한 해를 넘지 못한다. 오직 문학으로 사귀는 것만이 영원하다.’

처음에는 13명이 모였습니다. 직업은 규장각 서리부터 역관, 무관, 술집 중노미까지 다양했지요. 신분이 낮았지만, 시를 사랑하는 정신은 높았습니다. 규장각 서리였던 김낙서(金洛瑞)는 가난해서 신발에 구멍이 나도 고칠 수 없을 정도였지만, 거의 날마다 이곳을 찾았습니다.

위의 시 ‘송석원(松石園)’에 당시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지요. 돈이 없어 외상술을 들고 다니는 처지이지만, 시를 지을 때만은 쇠를 휘두르고 공으로 때리는 것처럼 했다는 얘기입니다. 최고의 작품을 완성하느라 배고픈 줄도 몰랐을 겁니다.

그런 김낙서의 집에도 가끔 시인들이 들렀습니다. 그는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을 ‘일섭원(日涉園)’이라고 불렀는데,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온 이름으로 출세와 거리가 먼 자족의 은유였지요. 집의 처마가 얼마나 낮았는지 ‘무릎이나 겨우 펼 정도’였습니다. 천수경의 시 ‘일섭원(日涉園)’에 그 장면이 나옵니다.

‘바위를 감싼 짙은 노을/ 그 위로 한가한 소나무./ 이를 위해 이엉 풀 베었으니/ 시냇가 사립문은 닫혔네./ 무릎이나 겨우 펼 처마며 마루/ 얼굴을 펴게 하는 숲의 나무들./ 가끔 흰 구름 바라보고/ 종일 푸른 산 마주 보네./ 살림살이 절로 한적해/ 인간 세상 같지가 않네.’

이 집에도 바위와 소나무가 등장하니 송석원과 닮았습니다. 집이 너무 작아서 마루에 겨우 무릎을 들일 정도이고 세간도 없이 초라하지만, 그 속에서 흰 구름과 푸른 나무를 벗하며 사는 모습이 한 폭의 수묵담채화 같습니다.

적적하고 쓸쓸한 생활 속에서도 이들은 세속을 초월해 시정(詩情)을 나누며 서로를 북돋웠지요. 시회의 인원이 늘자 1년에 두 번씩 수백 명이 편을 갈라 백전(白戰·맨손으로 싸우듯 치열한 시 대결)을 벌였는데, 여기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은 부끄럽게 여겼다고 합니다. 명필로 소문난 추사 김정희도 이곳 모임에 참석해 ‘松石園(송석원)’이라는 글씨를 써 주었죠.

당대 최고 화가인 이인문과 김홍도는 1791년 모임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이인문의 ‘송석원시사아회도(松石園詩社雅會圖)’는 낮 장면이군요. 너럭바위에 시인 9명이 2~3명씩 따로 앉아 시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수성동 계곡물과 바위, 소나무가 선명하죠? 주변 풍경으로 봐서 지금의 박노수미술관 부근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홍도의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는 밤 장면입니다. 너럭바위에 8명이 갓과 도포 차림으로 앉아 있고, 1명이 서 있습니다. 장소는 지금의 옥인동 서울교회쯤으로 보입니다.

송석원 건물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다세대 주택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몇 군데 남은 옛날 흔적마저 곧 사라질 위기죠. 시가 제대로 풀리지 않는 봄날, 옛길에서나마 실마리를 찾아보려는 노력은 별 소득도 없고 벌써 해가 저뭅니다.

옛날 이 길을 걸으며 시상을 가다듬느라 귀밑머리를 연신 비비던 시인들의 마음이 이랬을까요. 봄이라지만 아직 꽃은 어리고, 연한 나뭇잎만 미풍에 살랑입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