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스크, 당신 생각뿐"…세일즈맨 된 반도체 CEO들
“바이든 대통령이 참석한 행사에서도, 저는 머릿속에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연애편지에나 나올 법한 이 오글오글한 속삭임을 건넨 사람은 ‘미국 반도체 챔피언’ 인텔의 팻 겔싱어 최고경영자(CEO)다. 얼마 전 자신의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63세 기혼인 겔싱어가 애정을 표현한 ‘당신’은 누굴까. 바로 전기차 회사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CEO다.

테슬라는 인공지능(AI) 가속기 ‘D1’, 자율주행 칩 ‘HW 4.0’ 등 첨단 AI 반도체를 직접 개발해 삼성전자 같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에 생산을 맡긴다. 최근 파운드리 사업을 키우겠다고 선언한 겔싱어가 테슬라 일감을 따내기 위해 ‘공개 구애 편지’를 보낸 것이다. 겔싱어는 글 말미에 “당신을 프라이빗 공장 투어에 초청하고 싶다”며 “쪽지(DM)를 통해 우리 이야기를 진전시키자”고 적었다.

B2B(기업 간 거래) 특성상 대외 활동을 꺼리던 반도체 기업 CEO들이 바뀌고 있다. SNS로 자사 제품을 홍보하는 건 기본. 수천 명 청중을 상대로 회사를 홍보하거나 직접 세일즈에 나서기도 한다. 반도체산업이 범용 제품을 마구 찍어 수많은 기업에 팔던 방식에서 각각의 고객이 원하는 스펙에 맞춰 제작하는 ‘수주산업’으로 바뀐 영향이다.

‘인텔의 1호 영업사업’으로 불리는 겔싱어가 그런 예다. 2021년 인텔 CEO에 취임한 겔싱어는 최근 들어 공개 활동을 늘리고 있다. 고객 수주가 중요한 파운드리 사업을 본격화하면서부터다. 파운드리 기업에 생산 물량을 맡기는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 영업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의 라이벌인 AMD에 대해서도 “리사 수(AMD CEO)를 고객으로 만나고 싶다”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AMD는 직접 설계한 CPU 생산을 대만 TSMC에 맡기는데, TSMC 대신 인텔에 일감을 달라는 얘기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도 ‘세일즈맨’ 대열에 합류했다. 올 들어 한 주에 한 번꼴로 글로벌 콘퍼런스에 등장하고 있다. 최근 메타, 아마존 같은 대형 고객사들이 ‘탈(脫)엔비디아’에 나서자 대외활동 보폭을 한층 넓히고 있다. 지난 18~21일 열린 엔비디아 개발자 콘퍼런스에서 삼성전자의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극찬한 게 대표적이다. 업계에선 “HBM을 독점적으로 납품하고 있는 SK하이닉스의 단가를 깎기 위한 노림수”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그동안 말을 아꼈던 국내 반도체 기업 CEO들도 변화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을 이끄는 경계현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장(사장)은 링크트인과 인스타그램을 마케팅 채널로 활용한다. 그는 29일 인스타그램에“삼성전자가 개발 중인 2나노미터(㎚) 파운드리에 관심을 갖는 고객사도 늘고 있다”고 썼다.

최근 열린 주주총회에선 10페이지 넘는 발표 자료를 들고 나와 지난해 반도체 경영 실적에 대한 반성과 올해 사업 계획을 주주들 앞에서 상세하게 공개했다. 이날 주총장 연단에 오른 13명의 삼성전자 사장단 중 마이크를 가장 오래, 가장 자주 잡은 사람도 경 사장이었다.

SK하이닉스를 이끄는 곽노정 사장(CEO)도 열린 경영자로 통한다. 지난 1월 ‘CES 2024’에서 SK하이닉스 CEO 최초로 질의응답 세션을 가졌고, 여러 차례 KAIST, 고려대 등을 찾아 강연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