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이 '이별 여행' 됐다…"가난이 뭐길래" 부부의 눈물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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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의 교과서'
알프레드 시슬레 (1839~1899)
그가 그려낸 달콤씁쓸한 인생
알프레드 시슬레 (1839~1899)
그가 그려낸 달콤씁쓸한 인생

쭈뼛거리며 등기소에 찾아온 허름한 차림의 중년 남녀 한 쌍. 두 사람이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지은 건, 신혼부부라고 하기에 조금 많은 나이 때문이었습니다. 말을 꺼낸 신랑의 나이는 58세, 그 옆에 손을 꼭 잡고 있는 신부는 63세였거든요. 신랑은 말을 이어갔습니다. “저희가 신혼여행을 왔는데요…. 여행을 온 참에 여기서 서류를 내려고요.”
사실 이들은 30년 넘게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살아온 사이였습니다. 아들 하나 딸 하나씩 낳아 키워서 독립도 시켰고요. 당시 유럽에서 이런 ‘늦은 혼인신고’는 별로 드물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부모님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거나, 신분 차이 때문에 사회적인 시선이 신경 쓰인다거나, 돈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정식 결혼을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세월을 이겨내고 마침내 뒤늦게나마 법적인 인정과 축하를 받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1897년 8월 5일 영국 웨일스 카디프의 등기소를 찾은 이 부부는, 조금 사정이 달랐습니다. 이들의 신혼여행은 일종의 이별 여행이기도 했거든요. 아내는 불치의 병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몸. 남편의 몸에도 마찬가지로 종양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알프레드 시슬레(1839~1899). 훗날 ‘인상주의의 교과서’로 불리는, 그의 애잔한 삶과 작품 이야기.
느긋한 부잣집 도련님이었지만
행복이란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행복을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상황이 나아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가족의 병이 나아졌다든지, 좋아하는 사람과 좀 더 친해졌다든지, 월급이 오른다든지 하는 것들이요.이런 기준으로 보면 시슬레의 삶은 불행했습니다. 그의 삶은 계속 나빠지는 쪽으로 흘러갔기 때문입니다.

시슬레가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한 해는 1862년. 그의 나이 스물세 살 때였습니다. 그림을 배우러 들어간 화실에서 시슬레는 모네와 르누아르를 비롯해 훗날 명성을 날리게 될 인상주의 화가들과 만나 의기투합했고, 자신도 인상주의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이 보여주는 찰나의 아름다운 순간들. 그 아름다움을 캔버스에 담기로 한 것이지요. ‘외광파(外光派)’. 오늘날 이 화가들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입니다. 화실에 틀어박혀 작업하는 대신 야외에서 햇빛과 공기의 흐름을 그대로 담아내려 했다는 뜻이지요.
시슬레는 인상주의 화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들 중 대부분은 가난한 집 출신이었지만, 시슬레는 부유한 아버지가 넉넉히 용돈을 챙겨주는 덕분에 친구들에게 밥을 자주 살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성격도 좋았습니다. “시슬레는 구김살 없고 유쾌한 성격이었다. 재치 있는 농담 덕분에 그의 주변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동료 화가들은 당시의 그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하지만 시슬레는 조바심을 내지 않고 느긋하게 작품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친구들과 달리 부잣집 아들인 그는 생계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시슬레는 풍경화를 그리며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도 인상주의의 훌륭한 점을 알아줄 거야.” 그가 다섯 살 연상의 여인 외제니와 사랑에 빠져 같이 살기 시작한 건 이 무렵인 1866년입니다. 그리고 부부는 이듬해 첫 아이를 보게 됩니다. 시슬레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급격한 추락이 시작됩니다.

가장의 이름으로
이 해 시슬레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이런 게 있습니다. “부탁이 있어. 정말이지 돈이 필요한 상황이네. 아내는 아픈데,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다른 친구에게 내 바다 풍경 그림을 사달라고 설득해봐 주게나.”
3년 뒤인 1870년에는 상황이 훨씬 더 나빠집니다. 프로이센(현재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벌어지면서 무역이 위축됐고, 그 여파로 아버지의 사업이 아예 폭삭 망해버린 겁니다. 사업이 망해 파산하자 아버지는 화병을 얻었고 머지않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용서를 받을 수도 없게 된 것이지요. 시슬레 자신도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받았습니다. 파리 서쪽 근교의 작은 마을인 부지발에 있던 시슬레의 집이 프로이센 군대에 점령당해 숙소로 이용됐거든요. 이 과정에서 시슬레의 집은 초토화됐고 귀중한 초기 작품들은 땔감 신세가 됐습니다.

시슬레는 오직 자연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좀 더 완성도 높고, 그래서 돈이 되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그림. 시슬레가 가야 할 길은 그곳에 있었습니다. 당시 화가들과 달리 시슬레의 그림에 정치적인 의견, 사회 문제에 대한 주장, 화가 자신의 이야기가 거의 담기지 않은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작용했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
시슬레의 풍경화에는 작가 자신의 삶이 별로 녹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담고 있는 이야기랄게 없는 풍경화니까요. 하지만 그의 붓 터치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의 1860년대 중반 작품에서는 풍부하고 다양하지만 어딘가 자신감 없어 보이는 붓질을 읽을 수 있습니다. 취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림에 절박하게 매달리지도 않는, 부잣집 도련님 같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붓 터치는 빠르고 가벼워집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더 많은 작품을 빠르게 완성하고 팔아야 했던 애환이 그대로 그림에 남은 겁니다.
운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림이 좀 팔리는가 싶으면 경기가 안 좋아지거나, 미술품을 취급하는 딜러의 재정 상황이 나빠져서 돈을 받지 못하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조금씩 팬이 생겨나고는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시슬레의 인지도는 언제나 낮았습니다. 대중들의 인식도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이게 뭐야. 색은 물 빠진 것처럼 흐릿한 데다 그리다 말았잖아. 그림 안에 담긴 얘기도 없어. 이런 시골 풍경 따위를 그려서 뭘 하겠다는 거야.” 지금 시슬레 특유의 은은한 스타일과 매력, 개성으로 취급받는 요소들은 당시 대중에게 그저 단점으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 탓에 시슬레의 몸과 마음은 크게 상했고, 1880년대 중후반부터는 작품 수와 질도 전에 비해 눈에 띄게 나빠졌습니다. 이 무렵부터 인상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제야 성공의 기회가 찾아왔는데, 너무 오래 고생한 탓에 기회를 잡을 힘이 빠져 버렸으니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인상파 화가 중 가장 ‘신중하고 온화한’ 화가로 꼽혔던 시슬리. 이런 평가 덕분에 시슬리는 사람들이 인상주의를 인정하지 않을 때도 작품을 조금씩 판매하며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상주의가 대세가 되자 시슬레의 그림은 “재미없는 그림”으로 평가받았습니다. 모네와 르누아르 등 다른 화가보다 개성이 덜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과거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던 선택이 독이 돼 돌아왔던 겁니다.
곧이어 아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얼마 되지 않아 그 자신에게서도 종양이 발견되면서 시슬레의 모든 희망은 꺼져버렸습니다. 신혼여행이자 이별 여행을 갔다 오고 얼마 안 돼 아내를 떠나보낸 시슬레는 그 자신도 1899년 친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인상주의의 교과서가 되다
우리가 인상주의를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속에 강렬한 인생의 스토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광기와 예술혼을 넘나들며 강렬한 화풍을 만들어낸 고흐, 문명을 떠나 원시의 세계를 꿈꿨던 고갱,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그림에 천착했던 모네,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행복을 그렸던 르누아르. 이처럼 굴곡진 인생을 살면서도 예술혼을 불태웠던 화가들의 이야기는 가슴을 울립니다. 이렇게 힘들게 살아왔던 인상주의 화가 중에서도, 시슬레의 삶은 특히 기구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세상을 떠난 지금도 시슬레의 운명은 기구합니다. 그는 동료 인상주의 화가들에 비해 다소 인지도가 낮은 편입니다. 연구도 많지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영국 출신인데 프랑스에서 활동했다’는 겁니다. 그 탓에 영국의 미술사학자들도, 프랑스의 미술사학자들도 시슬레를 ‘외국 화가’로 여기며 제대로 조명하지 않았습니다. 강렬한 색채 대신 옅은 색을 쓰는 화풍, 극적인 장관 대신 소박한 시골과 마을 풍경을 그렸다는 점 때문에 ‘임팩트’가 덜하다는 점도 있습니다.

확실히 그의 삶은 행복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시슬레가 느낀 모든 순간이 불행이었던 건 결코 아니었을 겁니다. 불행만큼이나 그의 삶 구석구석은 가족에 대한 따뜻한 사랑,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 창작의 열정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이런 색이 담긴 시슬레의 작품은 강렬하지는 않아도 한 인간의 꿈과 투쟁의 흔적, 그리고 행복의 흔적을 담은 달콤씁쓸한(bittersweet) 맛이 있습니다.

*화장품 브랜드 'Sisley'의 어원이 바로 이 화가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수성을 담은 시슬레의 작품에 매료된 창업자가 그의 이름을 따서 브랜드 이름을 정했고, 좀 더 편한 발음인 시슬리라고 발음을 고쳤다고 합니다.
**이번 기사는 'Sisley' (Richard Shone 지음), 'Alfred Sisley' (Raymond Cognait 지음), 'Alfred Sisley: The English Impressionist'(Vivienne Couldrey 지음)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이번 기사는 <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 덕에 책이 예술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와 관련해, 4월 중 북토크 행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기자페이지 업데이트 및 인스타그램 계정을 참고해 주세요.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5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