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여행을 계획 중인 직장인 김현수 씨는 고민에 빠졌다. 국적 항공사를 이용하면 직항으로 14시간 만에 갈 수 있지만, 항공권 가격이 1인당 220만원이 넘는다. 반면 중동 국적 항공사를 이용하면 항공권 가격이 140만원대로 뚝 떨어진다. 김씨는 “환승 시간을 포함해 21시간 넘게 걸리지만, 항공사가 무료로 제공하는 두바이 시내 호텔에서 하루 자면서 두바이 관광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중동 항공사 '인천상륙작전'…유럽 '황금 노선' 뺏길라
중동 항공사들이 ‘오일머니’를 타고 한국으로 몰려오고 있다. 저렴한 항공권과 환승 연계 관광상품을 앞세워 노선을 공격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소비자 편익이 커지는 듯 보이지만, 장기적으론 국적기 주요 노선이 줄고 한국 항공 시장이 잠식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31일 항공정보포털에 따르면 지난해 인천국제공항에서 에미레이트·카타르·에티하드항공을 이용해 출입국한 여행객은 80만4795명으로, 국토교통부가 관련 통계를 집계한 1997년 1월 후 가장 많았다. 중동 항공사들은 석유로 돈을 쌓은 정부가 소유한다. 이에 따라 유류세 등을 따로 내지 않는다. 다른 국적 항공사보다 30% 이상 가격을 낮출 여력이 있다.

낮은 가격을 무기로 중동 항공사들은 아시아 항공 ‘허브(거점) 공항’인 인천 노선을 최근 들어 공격적으로 늘리고 있다. 에미레이트항공은 지난 2월부터 인천~두바이 노선을 주 7회에서 주 10회로 확대했다. 카타르항공도 오는 5일부터 인천~도하 노선을 주 7회에서 8회로, 에티하드항공 역시 5월부터 인천~아부다비 노선을 주 7회에서 11회로 늘린다.

중동 정부들은 관광업 육성 차원에서 자국 항공사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지리적 이점을 살려 관광산업을 ‘포스트 오일’ 시대 핵심 산업으로 키우겠다는 전략이다. 환승 시 제공하는 호텔 숙박권도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혜택인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항공업계는 우려하고 있다. 대한항공은 주 7회 운항한 인천~두바이 노선을 주 5회로 줄였다. 두바이 왕복 노선의 대한항공 여객 수가 2019년 18만 명에서 지난해 10만8600명으로 크게 줄어든 탓이다. 중동 항로에서 한국 국적기가 차지하는 노선 점유율은 2019년 18.7%에서 지난해 11.8%로 낮아졌다.

현재와 같은 비정상적인 경쟁 체제가 이어지면 한국 국적기 노선이 축소되거나 대폭 정리될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2010년대 아랍에미리트(UAE)와 항공 자유화 협정을 맺은 미국에선 델타항공이 애틀랜타~두바이 노선, 유나이티드항공이 워싱턴~두바이 노선을 단항했다. 호주 콴타스항공도 비슷한 시기 중동 항공사의 저가 공세에 호주에서 로마, 파리,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노선을 순차적으로 폐지했다.

허브 공항으로서 인천국제공항의 지위도 흔들린다. 중국·일본인 관광객이 인천에서 환승해 유럽으로 가지 않고 중동 국가로 바로 간 뒤 현지에서 환승하는 형태가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중동 외항사 항공권 가격이 현재는 저렴해 보이지만 한국 항공사 노선이 모두 폐지된 뒤에도 값싼 항공권이 유지될지는 미지수”라고 했다.

김진원 기자 jin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