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소사 동종 제작자는 대장금과 비견할 '초특급 승진'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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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보름의 내가 사랑했던 모든 유물들
국보 내소사 동종과 용뉴와 장인(匠人) 한중서
국보 내소사 동종과 용뉴와 장인(匠人) 한중서
‘용’은 한국의 미술문화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기에 용의 해만 되면, 신년을 즈음해 시작되는 전시와 각종 문화 칼럼의 주제로 많이 거론된다. 필자 역시, 시기가 시기인지라 ‘용’과 관련된 유물 이야기를 써보려고 생각하다, 고민에 빠졌다.
사실 구름 속을 노니는 용을 그린 그림이나 도자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가장 편하겠으나, 편하다는 것은 결국 또 뻔하다는 것이기에, 무언가 여러분께 한 단어라도 신선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단 ‘용龍’이 들어간 낱말을 쭉 써보았다. 용안, 용포, 용여, 용준, 용뉴, 용잠, 용연, 운룡, 쌍용, 용봉, 청룡, 황룡, 비룡, 이룡 ……. 목록을 한참 보다가, 갑자기 ‘용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쓰는 이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병아리 시절 일이다. 경매 위탁 물품으로 들어온 금속 유물들이 어느 정도 모여서, 전문가 감정을 받을 때가 되었었다. 작품의 세부 평가를 위해 넓은 공간에 평평하고 균형이 잘 맞는 테이블을 준비하고, 대상 유물들을 종류와 시기별로 구분하여 나열했다. 평가 진행은 선배님들께서 하시고, 신입들은 보조를 한다. 보조 역할도 나름 급(?)이 나뉘는데, 정말 갓 들어온 신입은 왔다 갔다 잔심부름을 하고, 그래도 좀 굴렀다 싶은 신입은 서기 역할을 한다.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우고 재빨리 받아 적느라고 정말 손목이 부러질 뻔했다.
그날따라 종(鐘)이 몇 개 있었다. 전문용어가 난무한다. ‘음통(音筒)’이 어쩌고, ‘당좌(撞座)’가 어쩌고, ‘상대(上帶)와 하대(下帶)’에 문양이 어떻고...... 정신없이 받아 적는 와중에 ‘용뉴’가 귀에 들어왔다. ‘응? 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받아 적었다. 감정이 다 끝나면, 받아 적은 사람은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곧장 평가 내용을 다시 파일에 옮겨 적는다. 칼퇴근을 원하는 자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춤춘다.
그러다가 ‘용뉴’에서 멈췄다. ‘분명히 용뉴라고 들었는데, 뉴? 뉴라는 글자가 있어?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용유’의 사투리 발음인 것 같은데, 물어보기는 좀 창피하니까, 일단 검색해 보자.’ 우와. 결과는 ‘용뉴’가 맞았고, 놀랍게도 ‘뉴’에 해당하는 한자가 있었다. ‘鈕’. 두음법칙에 따라 앞 글자로 가면 ‘유’, 뒤에 오면 ‘뉴’로 발음하는 글자였다. ‘인꼭지 뉴(유)’. 그러니까 종의 천판(맨 윗부분)에 달린 용 모양 고리라고 해서 ‘용뉴(龍鈕)’라고 하는 거였다.
다시 2024년으로 돌아와, 그때처럼 검색창에 ‘용뉴’를 쳐본다. 알고서 이 단어에 꽂힌 건 아니었는데, 딱 맞는 반가운 소식이 보인다. 청림사명 내소사 동종의 국보 지정 기사.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었다고 하니, 60년 만에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된 것이다. 내소사 동종은 유명하다. 높이 104.8cm로 고려 후기의 종 가운데 가장 큰 데다가,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그리고 청림사에서 지금의 부안 내소사에 언제 옮겨왔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명문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종은 고려 1222년에 한중서(韓仲叙)라는 장인(匠人)이 제작했다. 한중서가 제작한 국보 내소사 동종의 백미는 용뉴에 있다. 다른 종과 비교했을 때 역동적이고 매우 섬세하게 조각된 것이 특징이다. 전문가들은 고려 후기 범종에 사용된 화려한 용뉴 표현의 완성형이라고도 한다. 용은 얼굴을 들어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크게 벌린 입안으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혀 위로 보주를 들어 올리고 있다. 오른발은 천판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발톱을 아래로 향하고 있어 마치 바닥을 딛고 도약하려는 듯하다. 왼발은 머리 위로 뻗어 올렸는데 날카로운 발톱을 하늘로 바짝 세운 채 보주를 움켜쥐고 있다. S자형으로 굴곡을 이룬 목에는 비늘까지 세세하게 표현되어 있고, 용의 머리에서 뻗어 나온 갈기는 음통을 휘감고 있다. 한중서의 역동적 용뉴는 그만의 스타일인 듯하다. 그가 만든 것으로 확인되는 또 다른 동종인 ‘신룡사명 동종’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용뉴가 확인된다. 높이 22cm, 내소사 동종에 비하면 1/5 밖에 안 되는 작은 크기이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내소사 동종이 만들어진 1222년에서 16년 뒤에 제작된 1238년 작품으로, 내소사 동종의 명문에는 ‘장인 한중서’였던 소개가, 이 신룡사명 종에서는 ‘대장(大匠) 한중서’로 바뀌어 있다. 그 사이에 승진을 한 모양이다. 이 유물 역시 작년에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22년 10월에 신청서를 내고 약 1년 뒤인 2023년 9월에 지정되었는데, 그야말로 역대급 속도였다. 짐작하건대, 빠른 처리가 가능했던 이유는 한중서가 남긴 작품이라서 였을 것이다. 예술성은 기본이고, 시간이 지나 제작자가 승진한 것까지 알려주는 명문까지 남아 있으니, 고려 관장(官匠)들의 체계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 또한 높기 때문이다.
한중서가 만든 것으로 기록된 작품은 지금까지 총 다섯 점 확인되는데, 금고(金鼓, 청동북) 또는 반자(飯子)라고 해서, 북처럼 생긴 불교 의식구 3점과, 앞에서 말한 동종 2점이다. 그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현재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숭경2년(1213년) 고령사명 반자다. 거기에는 ‘侍衛軍 仲叙 (시위군 중서)’라고 명문에 남아있어, 당시엔 말단 군사였던 상태로 보이는데, 약 10년 후 1222년 내소사 동종에서는 장인이 되고, 16년 뒤 1238년 제작된 신룡사명 동종에서는 대장으로 승진했다가, 같은 해 만들어진 복천사 반자 명문에는 ‘별장동정(別將同正)’이라는 정7품 관직으로 소개된다. 그 별장동정이라는 직위는 14년 뒤인 1252년 제작된 안양사명 반자(현재 옥천사 소장, 보물)에서도 확인된다. 재미있는 것은 신룡사명 종을 만든 것도 무술년 4월이고, 복천사 반자를 만든 것도 무술년 4월이다. 승진의 단계로 생각해 보면 같은 4월이라도 신룡사명 종이 먼저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그때, 고종 25년, 무술년 4월, 한중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지 궁금해진다.
갑자기 드라마 대장금이 떠올랐다. 중종실록에 등장하는 네댓 차례의 의녀 대장금에 대한 기록 몇 줄이 그 길고 긴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들었다. 무한한 인간의 상상력이 더해져 임금님의 ‘맛이 좋구나’에까지 이른 것이다. 고려 후기의 입지전적 인물 한중서의 이야기도 대장금에 못지않다. 요즘은 성장캐(성장형 캐릭터)의 시대 아닌가.
대장 한중서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를 상상해 본다. 상감청자의 최고 절정기인 고려 13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라니, 미장센이 너무 화려하다. 거기에 금속기를 만드는 장면은 또 어떤가? 흙을 다루고, 세밀한 조각을 하고, 불을 다루고, 용암 같은 쇳물을 붓고…… 가만히 앉아서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 인물들보다는 훨씬 역동적이고 강렬한 장면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전쟁’ 같은 역사의 큰 사건은 세세히 기록되어 있어 각색의 여유가 너무 없지만, 이렇게 인물에 기대는 스토리는 빈칸이 너무도 많아 여지가 많다.
‘용뉴’라는 신기한 한 단어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이렇게 길었다. 그래서 한번 기대해 본다. 한중서라는 인물이 남긴 몇 가지의 흔적이 불러올 훗날의 대서사시를. /이보름 가나문화재단·가나아트 기획총괄
사실 구름 속을 노니는 용을 그린 그림이나 도자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가장 편하겠으나, 편하다는 것은 결국 또 뻔하다는 것이기에, 무언가 여러분께 한 단어라도 신선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단 ‘용龍’이 들어간 낱말을 쭉 써보았다. 용안, 용포, 용여, 용준, 용뉴, 용잠, 용연, 운룡, 쌍용, 용봉, 청룡, 황룡, 비룡, 이룡 ……. 목록을 한참 보다가, 갑자기 ‘용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쓰는 이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병아리 시절 일이다. 경매 위탁 물품으로 들어온 금속 유물들이 어느 정도 모여서, 전문가 감정을 받을 때가 되었었다. 작품의 세부 평가를 위해 넓은 공간에 평평하고 균형이 잘 맞는 테이블을 준비하고, 대상 유물들을 종류와 시기별로 구분하여 나열했다. 평가 진행은 선배님들께서 하시고, 신입들은 보조를 한다. 보조 역할도 나름 급(?)이 나뉘는데, 정말 갓 들어온 신입은 왔다 갔다 잔심부름을 하고, 그래도 좀 굴렀다 싶은 신입은 서기 역할을 한다.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우고 재빨리 받아 적느라고 정말 손목이 부러질 뻔했다.
그날따라 종(鐘)이 몇 개 있었다. 전문용어가 난무한다. ‘음통(音筒)’이 어쩌고, ‘당좌(撞座)’가 어쩌고, ‘상대(上帶)와 하대(下帶)’에 문양이 어떻고...... 정신없이 받아 적는 와중에 ‘용뉴’가 귀에 들어왔다. ‘응? 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받아 적었다. 감정이 다 끝나면, 받아 적은 사람은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곧장 평가 내용을 다시 파일에 옮겨 적는다. 칼퇴근을 원하는 자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춤춘다.
그러다가 ‘용뉴’에서 멈췄다. ‘분명히 용뉴라고 들었는데, 뉴? 뉴라는 글자가 있어?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용유’의 사투리 발음인 것 같은데, 물어보기는 좀 창피하니까, 일단 검색해 보자.’ 우와. 결과는 ‘용뉴’가 맞았고, 놀랍게도 ‘뉴’에 해당하는 한자가 있었다. ‘鈕’. 두음법칙에 따라 앞 글자로 가면 ‘유’, 뒤에 오면 ‘뉴’로 발음하는 글자였다. ‘인꼭지 뉴(유)’. 그러니까 종의 천판(맨 윗부분)에 달린 용 모양 고리라고 해서 ‘용뉴(龍鈕)’라고 하는 거였다.
다시 2024년으로 돌아와, 그때처럼 검색창에 ‘용뉴’를 쳐본다. 알고서 이 단어에 꽂힌 건 아니었는데, 딱 맞는 반가운 소식이 보인다. 청림사명 내소사 동종의 국보 지정 기사.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었다고 하니, 60년 만에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된 것이다. 내소사 동종은 유명하다. 높이 104.8cm로 고려 후기의 종 가운데 가장 큰 데다가,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그리고 청림사에서 지금의 부안 내소사에 언제 옮겨왔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명문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종은 고려 1222년에 한중서(韓仲叙)라는 장인(匠人)이 제작했다. 한중서가 제작한 국보 내소사 동종의 백미는 용뉴에 있다. 다른 종과 비교했을 때 역동적이고 매우 섬세하게 조각된 것이 특징이다. 전문가들은 고려 후기 범종에 사용된 화려한 용뉴 표현의 완성형이라고도 한다. 용은 얼굴을 들어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크게 벌린 입안으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혀 위로 보주를 들어 올리고 있다. 오른발은 천판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발톱을 아래로 향하고 있어 마치 바닥을 딛고 도약하려는 듯하다. 왼발은 머리 위로 뻗어 올렸는데 날카로운 발톱을 하늘로 바짝 세운 채 보주를 움켜쥐고 있다. S자형으로 굴곡을 이룬 목에는 비늘까지 세세하게 표현되어 있고, 용의 머리에서 뻗어 나온 갈기는 음통을 휘감고 있다. 한중서의 역동적 용뉴는 그만의 스타일인 듯하다. 그가 만든 것으로 확인되는 또 다른 동종인 ‘신룡사명 동종’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용뉴가 확인된다. 높이 22cm, 내소사 동종에 비하면 1/5 밖에 안 되는 작은 크기이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내소사 동종이 만들어진 1222년에서 16년 뒤에 제작된 1238년 작품으로, 내소사 동종의 명문에는 ‘장인 한중서’였던 소개가, 이 신룡사명 종에서는 ‘대장(大匠) 한중서’로 바뀌어 있다. 그 사이에 승진을 한 모양이다. 이 유물 역시 작년에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22년 10월에 신청서를 내고 약 1년 뒤인 2023년 9월에 지정되었는데, 그야말로 역대급 속도였다. 짐작하건대, 빠른 처리가 가능했던 이유는 한중서가 남긴 작품이라서 였을 것이다. 예술성은 기본이고, 시간이 지나 제작자가 승진한 것까지 알려주는 명문까지 남아 있으니, 고려 관장(官匠)들의 체계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 또한 높기 때문이다.
한중서가 만든 것으로 기록된 작품은 지금까지 총 다섯 점 확인되는데, 금고(金鼓, 청동북) 또는 반자(飯子)라고 해서, 북처럼 생긴 불교 의식구 3점과, 앞에서 말한 동종 2점이다. 그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현재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숭경2년(1213년) 고령사명 반자다. 거기에는 ‘侍衛軍 仲叙 (시위군 중서)’라고 명문에 남아있어, 당시엔 말단 군사였던 상태로 보이는데, 약 10년 후 1222년 내소사 동종에서는 장인이 되고, 16년 뒤 1238년 제작된 신룡사명 동종에서는 대장으로 승진했다가, 같은 해 만들어진 복천사 반자 명문에는 ‘별장동정(別將同正)’이라는 정7품 관직으로 소개된다. 그 별장동정이라는 직위는 14년 뒤인 1252년 제작된 안양사명 반자(현재 옥천사 소장, 보물)에서도 확인된다. 재미있는 것은 신룡사명 종을 만든 것도 무술년 4월이고, 복천사 반자를 만든 것도 무술년 4월이다. 승진의 단계로 생각해 보면 같은 4월이라도 신룡사명 종이 먼저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그때, 고종 25년, 무술년 4월, 한중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지 궁금해진다.
갑자기 드라마 대장금이 떠올랐다. 중종실록에 등장하는 네댓 차례의 의녀 대장금에 대한 기록 몇 줄이 그 길고 긴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들었다. 무한한 인간의 상상력이 더해져 임금님의 ‘맛이 좋구나’에까지 이른 것이다. 고려 후기의 입지전적 인물 한중서의 이야기도 대장금에 못지않다. 요즘은 성장캐(성장형 캐릭터)의 시대 아닌가.
대장 한중서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를 상상해 본다. 상감청자의 최고 절정기인 고려 13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라니, 미장센이 너무 화려하다. 거기에 금속기를 만드는 장면은 또 어떤가? 흙을 다루고, 세밀한 조각을 하고, 불을 다루고, 용암 같은 쇳물을 붓고…… 가만히 앉아서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 인물들보다는 훨씬 역동적이고 강렬한 장면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전쟁’ 같은 역사의 큰 사건은 세세히 기록되어 있어 각색의 여유가 너무 없지만, 이렇게 인물에 기대는 스토리는 빈칸이 너무도 많아 여지가 많다.
‘용뉴’라는 신기한 한 단어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이렇게 길었다. 그래서 한번 기대해 본다. 한중서라는 인물이 남긴 몇 가지의 흔적이 불러올 훗날의 대서사시를. /이보름 가나문화재단·가나아트 기획총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