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닐 트리포노프. (c)Hyeonkyu Lee
다닐 트리포노프. (c)Hyeonkyu Lee
러시아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는 분명 우리 시대 피아니스트 가운데 가장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바로크부터 현대음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자랑하며, 그 대부분을 매우 높은 수준으로 연주해낸다. 협주곡 협연과 독주회뿐만 아니라 실내악이나 가곡 반주에도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편곡은 물론 작곡도 하고 있고, 작곡한 곡을 직접 연주하기도 한다. 이런 트리포노프가 전 세계에서 가장 수요가 많은 피아니스트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공연 전 인터뷰) '피아노 거장' 트리포노프 "20세기 가장 혁신적인 작품들로 한계 도전"

이틀에 걸친 이번 내한공연에서 내가 참관한 것은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첫 번째 공연이었다. 알반 베르크의 ‘피아노 소나타’(1908)부터 존 코릴리아노의 ‘오스티나토에 의한 환상곡’(1985)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음악으로만 채운 프로그램이었다. 이런 프로그램은 청중뿐만 아니라 연주자에게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게 보통이다. 현대음악 가운데는 이전 시대에 없던 연주기법이나 높은 정밀함을 요구하는 곡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프로그램을 밀어붙였다는 건 트리포노프다운 일이었고, 이런 공연이 만석을 이뤘다는 사실 역시 트리포노프다웠다. 이보다 덜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면 이런 공연은 엄두조차 못 냈을 터이다.

베르크의 ‘피아노 소나타’는 짙은 향수와 몽롱함이 특징인 연주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베르크보다는 스크랴빈과 라흐미나노프를 뒤섞은 듯한 해석이었고, 트리포노프 역시 러시아 낭만주의 스타일이 뼛속까지 몸에 밴 연주자구나 싶었다. 그런데 연주가 이어짐에 따라 이런 해석이 100% 연주자가 의도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두 번째 곡인 프로코피예프의 ‘풍자’와 세 번째 곡 버르토크 벨러(공연에서는 벨라 바르톡이라고 표기했지만 이쪽이 정확한 표기이다)의 ‘야외에서’의 경우, 후자의 4악장 ‘밤의 음악’처럼 나름대로 영묘한 느낌을 주는 대목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무겁고 답답해 역동성이 제대로 살지 못했다. 이렇게 된 데는 세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고 본다. 일단 다른 공연장에 비해 잔향이 심한 롯데콘서트홀 특유의 음향 조건을 들 수 있다.

두 번째는 연주에 사용한 파지올리 피아노인데, 무척 옹골찬 음향을 지녔지만 전체적으로 음이 무거워 저음역에 비해 고음역이 썩 부각되지 않았다. 이 두 가지는 적어도 공연하는 시점에서는 연주자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반면 세 번째는 트리포노프 자신의 문제였는데, 페달링이 너무 심했다. 이 세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1부 순서의 전반부는 기교적으로는 오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베일을 두른 것처럼 무척 답답하게 들렸다.
(c)Hyeonkyu Lee
(c)Hyeonkyu Lee
그러나 트리포노프가 페달링을 대폭 절제한 코플랜드의 ‘피아노 변주곡’부터는 명연의 연속이었다. 코플랜드의 곡은 제한적인 악상에도 불구하고 대조를 매우 엄밀하고도 극명하게 살렸으며, 메시앙의 <아기 예수를 향한 20개의 시선> 가운데 ‘아기 예수의 입맞춤’은 몽롱하지 않으면서도(메시앙이라면 무조건 이렇게 쳐야 하는 줄 아는 피아니스트가 적지 않다) 서정성과 경건함이 잘 어우러진, 감성 아니 영성이 충만한 연주였다. 여담이지만 이 곡은 원래 2부의 첫 곡으로 예정되어 있다가 1부의 마지막으로 변경되었는데, 전체적인 곡 구성으로 봤을 때 이렇게 한 것은 옳은 처사라고 생각한다.

2부 순서 역시 전체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수준이었다. 리게티의 <무지카 리체르카타>(전체 11곡 가운데 앞의 네 곡만 연주했다)는 리듬과 셈여림, 템포의 조절이 정확하고도 자연스러웠으며, 슈톡하우젠의 ‘피아노 소품 Ⅸ’에서는 날카롭고 절박한 고음이 강렬하게 와닿았다. 존 애덤스의 ‘차이나 게이트’ 역시 고음이 특히 돋보였는데, 이번에는 앞서와 반대로 무척 영롱한 터치였다. 이 두 곡은 트리포노프가 계속 페달링을 유지했다면 연주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을 법한 작품들이었다. ‘오스티나토에 의한 환상곡’에서 트리포노프는 무척 진중하고 경건한 연주로써 작곡가인 코릴리아노뿐만 아니라 작곡가가 인용한 베토벤에게까지 경의를 표했다.

트리포노프는 청중의 열화 같은 성원에 답해 앙코르를 연주할 것처럼 피아노 앞에 앉았지만,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았다. 왜일까 궁금해하다가 그가 그대로 일어서고 나서야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연주(?)한 것임을 깨달았다.

이 곡은 피아니스트가 4분 33초 동안 아무 연주도 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며, 공연장에서 나는 모든 소리가 그대로 ‘연주’가 되는 곡이다. 실제로 트리포노프는 이 곡을 앙코르로 즐겨 ‘연주’한다고 한다. 리게티의 곡에서 빛을 발했던 유머감각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황진규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