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을 잊지마 그리고 우리의 이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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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현호의 바벨의 도서관
그대의 이름
그대의 이름
빼앗긴 '그대'의 이름
세계적 비교신화학자인 조셉 캠벨과 미국의 저널리스트 빌 모이어스의 대담집 <신화의 힘>에는 타자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바라보게 되는 사례가 나옵니다.예를 들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대지의 모든 동물, 식물부터 돌과 바위 같은 무생물까지 생명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인가 그들의 대륙에 이방인들이 살게 되면서 그동안 신성시하며 존중으로 대했던 ‘그대’ 들소가 졸지에 ‘그것’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대살육(大殺戮)의 시기에는 들소의 가죽만 벗겨내고 살은 썩게 만들었다는 기록마저 있을 정도이니 ‘그대’를 무기력하게 바라봤을 아메리카 원주민의 분노와 슬픔은 컸을 터입니다. 물론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자연을 소중히 여기고 인간 이외의 다른 동식물과 공존을 동경했다는 사실이 실제보다 부풀려졌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1995)>나 고전 영화 <늑대와 춤을(1991)>을 통해 묘사된 모습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부를 보여주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평균적인 현대인과는 분명 다른 시각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할 따름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후손인 식물생태학자 로빈 월 키머러의 수필 <향모를 땋으며>를 읽으면, 이들이 한결같이 인간성·관계성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키머러는 향모(향기가 나는 여러해살이풀)라는 상징을 통해 땅(장소)과 언어(이름), 고유의 생활 방식을 잃지 않는 것이야 말로 스스로를 구원하고 치유할 수 있었던 비법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너의 이름'
이름이 중요한 영화라고 하면, 누구라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2)'을 떠올릴 것입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앨리스가 토끼굴을 통과하며 모험을 떠났듯, 치히로는 비밀스러운 공간을 통과한 이후 신들의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돼지로 변해버린 엄마, 아빠를 찾아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을 펼치는 가운데, ‘치히로(千尋)’는 온천장 주인이자 마녀인 유바바로부터 이름을 빼앗겨 ‘센(千)’으로 불립니다. 끝내 치히로는 하쿠, 가마 할아버지, 가오나시 등 동료들과 힘을 모아 엄마, 아빠도 무사히 구출하고 세상으로 돌아오게 되는데요. “절대로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하쿠의 조언 덕분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위기도 극복하게 됩니다.먼 옛날 아메리카에서는 ‘그대’가 ‘그것’으로 불리게 되며 비극이 시작되었던 반면, ‘치히로’는 이름을 빼앗겨 ‘센’이 되는 대신 자신을 지켜낸 것입니다. 치히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마침내 자신을 도와준 친구 하쿠의 이름인 ‘니기하야미 고하쿠누시(강의 신)’도 찾도록 해줍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낯선 장소와 상황에 처했을 때에는 더욱더 이름을 기억하는 일이 중요해집니다. 살아가면서 때때로, 이전까지는 경험하지 못했던 공포·물리적 협소함·고함(윽박지름) 등으로 인해 공황 상태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경험하는 훈련소에서의 시간이 딱 그렇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그 시간이 왜 그리 무섭게 느껴졌나 싶습니다. 스무 살 무렵에 느꼈던 그 불안의 원인은 마흔 살을 훌쩍 넘기고 나서야 조금 알게 되었는데요. 바로 사회심리학자인 어빙 고프먼의 <수용소>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역시 이번에도 ‘이름(정체성, 정신)을 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어빙 고프먼에 따르면, 누구든 수용소와 같은 격리된 장소에 ‘입소’할 때에는 ‘복종’을 동반한 일종의 환영식을 거쳐야만 한다고 합니다. 말이 환영식이지 어쩌면 본격적인 공포와 공황을 마주해야 할 순간이겠죠. 이 과정에서 ‘장소’에 먼저 자리를 잡은 이들(수용소 직원, 선임 재소자 등)은 새롭게 합류하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어떤 곤경이 펼쳐질지를 암시하기도 합니다. 일종의 통과의례가 있을 텐데요. 먼저 온 사람들은 나중에 온 사람을 향해 의도적으로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너희들은 낮은 지위에 속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상상만 해도 무섭습니다.
이 과정에서 격리 이전 장소에서 입었던 옷과 소유물도 모두 빼앗기게 됩니다. 어빙 고프먼은 이를 두고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유물에 자아의 감정을 투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소유물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전혀 물리적이지 않다. 바로 자신의 이름이다. 입소 이후 어떻게 불리건, 이름의 상실은 자아의 심각한 축소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라를 빼앗겼던 가슴 아픈 역사 속에서 이름마저 빼앗기는 일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 사건인지를.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에게 이름을 지켜내는 일은 여전히 가장 숭고하고 중요합니다.
당신이 누구라도, 어디에 있더라도
아주 가끔씩은, 비교적 안정적인 사회적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한없이 외롭고 스스로가 이방인처럼 느껴져 위축되고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김현경 선생의 <사람, 장소, 환대>를 다시 펼쳐 들고 존엄을 떠올립니다.독립연구자인 김현경 박사는 <사람, 장소, 환대>라는 엄청난 책을 통해 ‘사람다움(personality)’은 무엇인지, 장소에 따라 그것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관해 말합니다. 김현경 선생에 따르면 ‘우리가 우리를 인정하게 만들어주는 본질이자 사람다움은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그렇다고 믿어주는 것’에 가깝습니다. 이름을 불러주고 그렇다고 믿어주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설명입니다. 김현경 선생은 이 책을 통해 서로가 이름(정체성, 사회적 지위)을 불러주고 그것을 지켜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관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람다움을 지켜주는 일 외에도 할 일이 있습니다. 김현경 선생은 책의 말미에서 ‘끌어안아주고 보듬을 수 있는 환대’를 해결책의 하나로 강조합니다. 스스로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니 ‘그 사람이 어떤 계층에 속하는지에 관해 묻지 말고 존중할 것’과 ‘복수 대신 환대를 택할 것’을 당부합니다.
이름의 힘, 이름의 연대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실천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고 지켜주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치히로와 하쿠처럼 말이죠. 1980년대 중반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버지가 미국 사람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고 들고 오신 비디오 테이프를 틀었습니다. 노래를 잘 부르는 미국인 가수들이 같은 곡을 몇 시간이고 연습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가수들 중에는 케니 로저스와 스티비 원더가 유명하다고 설명해 주셔서 그렇구나 싶었고요. 먼 훗날 알게 됐습니다. 그 영상은 굶주리는 아프리카 국가 사람들을 위해 ‘이름을 내걸고’ 뭉쳤던 유에스에이 포 아프리카(USA for Africa)라는 프로젝트의 제작과정을 촬영한 것이었습니다.노래의 제목은 ‘위아더월드(We are the world)’
이 노래를 부른 친절한 이름은 마흔 명도 넘습니다. 환대의 마음을 담은 이름들이 불렀던, 서로의 연대를 강조했던 노랫말이 오늘도 귓가에 맴돕니다.
So let's start giving
그러니까 진심으로 베풀어요
There's a choice we're making
지금이야말로 우리 삶을
We're saving our own lives
구원할 기회입니다.
It's true we'll make a better day
맞아요, 우린 함께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해요
Just you and me
바로 당신과 내가 말이에요
- 노래 ‘위아더월드(We are the world)’ 중
김현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