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샤이' 작곡가 단독 인터뷰-코펜하겐 회색 하늘서 피어난 뉴진스의 솜털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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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 Shy’ 작곡가 겸 싱어송라이터
에리카 드 카시에 한국 최초 인터뷰
"빌보드 차트 올라본 적 없어"
뉴진스 노래 4곡 작곡 공로로
덴마크뮤직어워드 최우수 작곡가상
에리카 드 카시에 한국 최초 인터뷰
"빌보드 차트 올라본 적 없어"
뉴진스 노래 4곡 작곡 공로로
덴마크뮤직어워드 최우수 작곡가상
2022년과 2023년, 케이팝계는 뉴진스의 ‘솜털 강펀치’를 맞고 뿌리째 흔들렸다. 고자극, 고텐션으로 일방통행하던 가요계에 다섯 명의 소녀가 나타났다. 낯선 솜사탕을 든 채 군중을 거슬러 무심한 듯 역행했다. 귀엽게 톡톡 던지는 R&B 보컬, 그 뒤에서 강렬한 리듬의 균열을 일으키는 비트. 이율배반의 매력은 ‘좋은 케이팝’의 정의를 새로 써버렸다. 올해 가요 차트 성층권을 칭칭 휘감고 있는 ‘이지 리스닝’ 노래의 풍경도, 불현듯 뉴진스가 들고 나타난 저 달콤한 기암괴석에서 비롯됐다.
‘Super Shy’ ‘Cool With You’ ‘New Jeans’ ‘ASAP’.
지난해 뉴진스가 발표한 EP ‘Get Up’의 6곡 중 위의 4곡에 참여한 덴마크 싱어송라이터 에리카 드 카시에(Erika de Casier·34)를 최근 화상으로 인터뷰했다. 2014년 R&B 듀오 세인트 카버(Saint Cava)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드 카시에는 세 장의 솔로 앨범으로 피치포크, 가디언 등 유수 매체의 찬사를 받았다. 지난해 말에는 뉴진스의 곡을 쓴 공로로 덴마크 뮤직 어워즈에서 최우수 작곡가상을 수상했다.
최근 영국의 인디 음악 명가 ‘4AD’ 레이블에서 발표한 3집 ‘Still’은 Y2K R&B 팝에 드럼 앤드 베이스, 트립합 같은 장르가 혼재된 케이크다. 무기력과 관능 사이를 오가는 드 카시에의 소녀 같은 보컬이 저 단단한 비트 위에 얹히는 체리 토핑. 앨범의 대표곡 ‘Lucky’를 들으면 뉴진스의 환영도 보인다. 꿈틀대는 브레이크비트 사이를 오래된 교정의 유령처럼 뛰어다니는.
뉴진스의 솜털 구름 중 일부는 이렇게 멀리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왔다. 어지러운 세상이라는 폭풍의 댄스 클럽 한가운데서 달콤쌉싸래한 방백을 읊조리는 듯한 몽환적 음악. 뉴진스의 신곡을 기다리는 동안 드 카시에의 세계에 폭 빠져보는 것도 좋겠다. 코펜하겐 자택의 작은 방에서 화면을 켠 그는 조금 귀를 기울여야 잘 들리는 작은 목소리, 수줍은 표정으로 필자를 맞았다.
- 반가워요. 신곡 ‘Lucky’의 가사를 보면 ‘Copenhagen’s so grey’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오늘도 코펜하겐은 흐린가요. 코펜하겐이나 덴마크의 환경이 당신 음악에 영향을 끼치는지도 궁금해요.
“맞아요. 코펜하겐은 오늘도 회색이네요.(웃음) 한 6개월 동안은 쭉 이런 것 같아요. 어쩌면 영원히…. 좀 더 음악 창작에 집중하게 만드는 구석이 덴마크에, 코펜하겐에 있기는 하죠.”
- 포르투갈에서 태어나 살다가 여덟 살 때 가족과 덴마크로 이주했다고 들었어요. 마침 ‘Super Shy’의 뮤직비디오도 리스본에서 촬영됐죠. 포르투갈 어디서 살았나요. 모친은 벨기에계, 부친은 카보베르데계라고 들었어요. 다문화적 환경이 음악 세계에 미친 영향이 있을까요.
“리스본 외곽요. 요즘도 가끔 가고 싶은데 지금은 연고가 없어져서 아쉬워요. 알게 모르게 영향이 있겠죠? 자라면서 어떤 환경에 노출됐는지가 지금의 날 만들었을 테니까요. 아마 누구나 그럴 거예요.”
- 신보 제목 ‘Still’은 어떤 의미인가요. 닥터 드레의 곡 ‘Still D.R.E.’(1999년)도 떠올라요. 앨범 사운드에서 1990년대의 영향도 느껴지고요.
“그 시절에 대한 오마주 맞아요. 이런 뜻도 있죠. 나 자신이 과거의 나와 여전히(still) 같은 사람이어야만 하고, 그걸 증명해야 곧 나의 진정성을 인정받을 것 같은 압박감을 느낄 때가 있잖아요. 하지만 사실은 사람은 누구나 변화하죠. 그것 역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해요. 변화하는 자신이지만 내가 음악으로 박제한 그 시절만큼은 마치 정지화면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저의 앨범들은 매번 그런 나의 청각적 ‘스틸(still)’ 이미지죠.” - 앨범 표지도 독특해요. 뭔가 예술적이랄까.
“사진작가 콜린 솔랄 카르도가 찍어줬어요. 차가운 반사판으로 둘러싸인 저는 선글라스에 검은 롱코트를 입고 무표정하게 똑바로 서 있죠. 세상의 격변하는 카오스 속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조각상처럼 꼿꼿이 서 있는 자신을 뜻해요. 저한테는 표지 속 제가 그렇게 보이네요.”
- 안 그래도 당신의 음악을 듣다 보면 어떤 장면이 상상돼요. 장소는 아주 시끄러운 댄스 클럽. 그런데 당신은 중앙의 춤추는 무리에 섞이지 않고 클럽 뒤쪽 구석에서 혼자 수줍게 아주 소심한 춤을 추고 있죠. 혼잣말로 뭔가를 속삭이면서요. 혹시 당신, 이런 사람 맞나요?(웃음)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있는지에 따라 다르지만 제 첫인상은 좀 샤이한 편이 맞아요. 친해지면 저를 오픈하는 스타일이죠. 클럽에 가면, 처음엔 조금 샤이하게 시작해서 분위기가 익으면 플로어 중앙으로 슬슬 나가는 타입이죠.(웃음)”
- 제가 지난해 한국의 한겨레신문에 뉴진스 신드롬에 대한 칼럼을 기고했어요. 그러면서 ‘리듬과 비트는 강렬하지만 보컬은 부드럽고 귀엽다. 이런 대비가 뉴진스 음악을 특별하게 한다’는 취지의 글을 썼어요. 이런 이율배반적 음악 분위기가 조금은 수줍음을 타는 듯한 당신의 성격이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때요?
“어쩌면요. 제가 뉴진스를 대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제 음악에 관해서는 그게 바로 저의 표현법이라고 말해야겠네요. 혼돈의 세상에 둘러싸인 상황, 그러나 차분하고 분명히 제 메시지나 감정을 전달하고픈 마음. 이 두 가지의 대비가 그런 사운드로 표출되는 것일지도요. 또는, 몸속에는 불꽃놀이처럼 폭발하는 감정이 있지만 입밖으로 나오는 말은 조금 삼키고픈 주저함이랄까…. 음악적으로는 제가 브레이크비트(breakbeat)와 개러지(UK garage) 장르를 선호하는 까닭도 있겠죠.”
- 뉴진스의 음악이나 이미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봐요?
“뉴진스는 아주 획기적인 그룹이라고 봐요. 고만고만해지기 쉬운 팝 월드에 뭔가 확실히 신선한 것을 가져와 기여하려 분투하는 게 느껴져요.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음악, 남들과 다른 음악을 추구한다는 점이 쿨해요. 게다가 멤버들이 아직 어리잖아요. 그러니 5년쯤 뒤에는 또 과연 어떤 음악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게 만들어요. 뉴진스라는 이름처럼 늘 새로운 뭔가를 추구한다는 그 뉴진스의 콘셉트 자체가 무척 흥미로워요.”
- 케이팝 팬들은 열성적이기로 유명한데요. 뉴진스의 곡에 참여한 뒤 당신에게도 응원 메시지 같은 게 답지했나요.
“그럼요. 많이요. 제가 뉴진스의 음악에 기여했다는 것을 알게 된 팬들이 좋은 말씀을 정말 많이 전해주셨어요. 나쁜 건 단 한마디도 없었어요. 감사하죠.”
- 특히 ‘Super Shy’는 여기 한국에서 신드롬급 인기였어요. 아주 작은 아이들도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댄스 챌린지를 했죠.
“멋지네요. 자랑스러워요. 저의 곡이 4개나 (뉴진스 앨범에) 채택이 되고 그렇게 인기를 얻었다는 게 사실 믿기지 않아요. 사실 저는 전에 빌보드 차트 같은 데도 올라 본 적이 없거든요.”
- 애초에 뉴진스와 작업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코펜하겐에서 송캠프가 있었어요. 이곳의 동료 음악가들과 함께 참여를 했죠. 그런 송캠프는 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나 영국 런던에서 많이 열린다고 들어서 이번엔 우리 도시라는 데 호기심이 갔거든요. 사실 저는 다른 음악가와 이런 식으로 협업한 경험이 거의 없어요. 케이팝은 말할 나위도 없고요. 거의 그냥 경험 삼아 갔던 거예요. 그래서 아무런 기대 없이 그저 재밌게 놀 듯이 작업을 했죠. 어쩌면 ‘Super Shy’ 같은 곡들에 담긴 장난기 같은 것은 그렇게 스트레스도 부담도 없었던 송캠프 분위기 덕에 나왔는지도 모르겠네요.” - 지난해 말에 덴마크 뮤직 어워즈(Danish Music Awards)에서 ‘올해의 작곡가상’을 받았죠? 덴마크의 시상식인데 한국 그룹(뉴진스)의 작품에 기여한 공로로 상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대단히 이례적인 일 아닌가요?
“맞아요. ‘슈퍼 스페셜’ 했어요. 피네 글린트바드(Fine Glindvad)와 공동으로 수상했는데 그와는 ‘Cool With You’ ‘ASAP’ ‘New Jeans’를 함께 만들었고요. ‘Super Shy’는 저와 또 다른 작곡가들이 함께 작업했죠. 덴마크 뮤직 어워즈에 처음 초청받은 것만으로도 너무 영광이었어요. 저는 주로 영어 가사로 해외 시장에 소구하는 음악을 만들어왔으니까요. 그런데 시상식장에서 제 이름이 호명될 때는 정말 너무 놀라서 수상 소감으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말문이 막혀버릴 정도였죠.”
- 혹시 한국에 와본 적 있나요.
“아뇨. 중국과 일본은 가봤는데 한국은 아직요. 정말 정말 가보고 싶어요. 제가 또 한국 음식을 엄청 좋아하거든요. 한국에 갔다 왔다는 사람만 만나도 제가 먼저 한국 음식 이야기부터 꺼낼 정도예요.(웃음)”
- 코펜하겐의 음악대학 ‘리드믹 콘서바토리’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고 들었어요. 모범생과(科) 뮤지션인 것 같은데, 맞나요?
“그저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일 뿐이에요. 다섯 살 때부터 기타를 친 친구가 있는데 아직도 기타에 배울 게 많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비슷해요. 전 주로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지만 악기별 녹음법부터 배울 게 정말 끝도 없거든요.”
- 박사 과정에서 세부 전공은 뭐였어요?
“특별히 어떤 전공이라기보다 저의 2집 앨범 ‘Sensational’(2021년)을 완성하는 것이 사실상 최종 과제였어요. 팝 앨범에 대해서 교수님으로부터 피드백을 받고 학위를 취득한다는 게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오롯이 앨범 작업에 집중할 만한 시간과 동기를 부여받았다는 게 좋았어요.”
- 덴마크는 클래식과 재즈 음악으로도 유명하죠. 학구적인 음악가로서 혹시 그런 영향도 받나요. 당신 음악을 듣다 보면 재즈적인 화성진행도 곧잘 발견하거든요.
“확실히 재즈와 클래식을 알게 모르게 많이 접하게 되긴 해요. 제가 클래식 콘서트 가는 걸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전 음악에 대해서 이론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확실히 아니에요. 제 음악에서 재지한 걸 느끼신다면 그 이유는 되레 제가 음악학의 법칙보다는 감각적으로 좋게 들리는 것에 더 집중하는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 음악 작업에 즐겨 쓰는 장비나 소프트웨어, 플러그인이 있다면요?
“‘에이블턴 라이브’를 메인으로 많이 사용해요. 신시사이저로는 롤랜드의 JV-1010, (코르그의) 트라이톤, 액세스의 바이러스 인디고를 즐겨 써요. 사실 그때그때 장비는 달라지죠. 특별한 플러그인은 솔직히 잘 안 쓰고, 샘플에 이펙트만 조금 넣어서 사용할 때가 많아요.”
- 가사를 들여다보면 사랑과 이별, 연애 관계의 어려움, 관능적인 상황들이 자주 언급돼요. 가사를 쓸 때 즐기는 스토리라인이나 분위기가 있나요?
“딱히 그렇진 않아요. 사실 비트를 먼저 만들고 그 느낌에 따라 가사를 나중에 넣는 경우가 많죠. 내 안의 어떤 막연한 감정에 따라 사운드를 만들어 가다 보면 자연스레 동경과 갈망, 또는 슬픔과 우수 같은 것이 음악에 배어 나오게 되고, 그러면 가사도 결국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경우가 잦아요. 실은 어떤 것이 먼저인지 모를 정도로 감정과 음악은 정방향, 역방향으로 상호작용을 하죠.” - 음악 외에 일상에서 즐기는 것이 있다면요?
“독서요. 책 한 권 떼는 데 어떨 때는 반 년이 걸릴 정도로 엄청 느리게 읽는 편이긴 하지만요. 주로 심리학, 뇌과학, 문화인류학 서적을 좋아해요. 순회공연이든 여행이든 떠날 때는 무조건 책 한 권 가방에 넣어서 출발해요. 평소엔 콘서트를 보러 가거나 코펜하겐 시내나 동네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행사에 기웃대는 것도 좋아하고요. 요리, 그리고 고양이랑 놀기도 좋아해요.”
- 요즘 새로 빠져든 음악이 있다면 소개해줄 수 있어요?
“워낙에 다양하게 듣지만, 그 중에서도 흘러간 음악들 중 좋은 걸 계속 디깅하는 편이에요. 예를 들면, 최근엔 트립합(trip hop) 장르요. 트리키의 ‘Maxinquaye’(1995년)의 리믹스 앨범을 최근에 발견했는데 완전 미쳤어요. 음악을 하루 일과의 동반자, 자극제처럼 즐기기도 하죠. 눈을 뜨면 앰비언트 뮤직을 들어요. 브라이언 이노 같은. 최근엔 일본 아티스트 히로시 요시무라(1940~2003)의 ‘Wet Land’(1993년) 앨범에 빠졌죠. 느리게 하루를 시작한 뒤, 자전거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할 때는 좀 더 에너지를 주는 음악, 예를 들면 카디 비, 드레이크, 시저(SZA) 같은 힙합, R&B를 즐겨요. 좀 다른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땐 이곳 코펜하겐 출신 인디 음악가들의 훌륭한 음악들을 듣고요. 가끔은 아무것도 틀어놓지 않고 침묵 그 자체를 깊이 즐기기도 한답니다.”
- 향후 계획이 궁금해요. 혹시 케이팝 작업도 더 할 예정인가요?
“아직은 비밀이지만 또 다른 케이팝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어요. 여름 페스티벌 몇 곳에도 오르고 제 순회공연도 이어갈 예정이고요. 잘하면 가을쯤에 신곡을 발표할 생각도 있어요. 그리고 정말, 꼭, 반드시 한국에 가는 날이 빠른 시일 내에 왔으면 좋겠네요! 한국에 가게 되면 좋은 식당 소개해주세요!” / 임희윤 음악평론가
지난해 뉴진스가 발표한 EP ‘Get Up’의 6곡 중 위의 4곡에 참여한 덴마크 싱어송라이터 에리카 드 카시에(Erika de Casier·34)를 최근 화상으로 인터뷰했다. 2014년 R&B 듀오 세인트 카버(Saint Cava)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드 카시에는 세 장의 솔로 앨범으로 피치포크, 가디언 등 유수 매체의 찬사를 받았다. 지난해 말에는 뉴진스의 곡을 쓴 공로로 덴마크 뮤직 어워즈에서 최우수 작곡가상을 수상했다.
최근 영국의 인디 음악 명가 ‘4AD’ 레이블에서 발표한 3집 ‘Still’은 Y2K R&B 팝에 드럼 앤드 베이스, 트립합 같은 장르가 혼재된 케이크다. 무기력과 관능 사이를 오가는 드 카시에의 소녀 같은 보컬이 저 단단한 비트 위에 얹히는 체리 토핑. 앨범의 대표곡 ‘Lucky’를 들으면 뉴진스의 환영도 보인다. 꿈틀대는 브레이크비트 사이를 오래된 교정의 유령처럼 뛰어다니는.
뉴진스의 솜털 구름 중 일부는 이렇게 멀리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왔다. 어지러운 세상이라는 폭풍의 댄스 클럽 한가운데서 달콤쌉싸래한 방백을 읊조리는 듯한 몽환적 음악. 뉴진스의 신곡을 기다리는 동안 드 카시에의 세계에 폭 빠져보는 것도 좋겠다. 코펜하겐 자택의 작은 방에서 화면을 켠 그는 조금 귀를 기울여야 잘 들리는 작은 목소리, 수줍은 표정으로 필자를 맞았다.
- 반가워요. 신곡 ‘Lucky’의 가사를 보면 ‘Copenhagen’s so grey’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오늘도 코펜하겐은 흐린가요. 코펜하겐이나 덴마크의 환경이 당신 음악에 영향을 끼치는지도 궁금해요.
“맞아요. 코펜하겐은 오늘도 회색이네요.(웃음) 한 6개월 동안은 쭉 이런 것 같아요. 어쩌면 영원히…. 좀 더 음악 창작에 집중하게 만드는 구석이 덴마크에, 코펜하겐에 있기는 하죠.”
- 포르투갈에서 태어나 살다가 여덟 살 때 가족과 덴마크로 이주했다고 들었어요. 마침 ‘Super Shy’의 뮤직비디오도 리스본에서 촬영됐죠. 포르투갈 어디서 살았나요. 모친은 벨기에계, 부친은 카보베르데계라고 들었어요. 다문화적 환경이 음악 세계에 미친 영향이 있을까요.
“리스본 외곽요. 요즘도 가끔 가고 싶은데 지금은 연고가 없어져서 아쉬워요. 알게 모르게 영향이 있겠죠? 자라면서 어떤 환경에 노출됐는지가 지금의 날 만들었을 테니까요. 아마 누구나 그럴 거예요.”
- 신보 제목 ‘Still’은 어떤 의미인가요. 닥터 드레의 곡 ‘Still D.R.E.’(1999년)도 떠올라요. 앨범 사운드에서 1990년대의 영향도 느껴지고요.
“그 시절에 대한 오마주 맞아요. 이런 뜻도 있죠. 나 자신이 과거의 나와 여전히(still) 같은 사람이어야만 하고, 그걸 증명해야 곧 나의 진정성을 인정받을 것 같은 압박감을 느낄 때가 있잖아요. 하지만 사실은 사람은 누구나 변화하죠. 그것 역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해요. 변화하는 자신이지만 내가 음악으로 박제한 그 시절만큼은 마치 정지화면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저의 앨범들은 매번 그런 나의 청각적 ‘스틸(still)’ 이미지죠.” - 앨범 표지도 독특해요. 뭔가 예술적이랄까.
“사진작가 콜린 솔랄 카르도가 찍어줬어요. 차가운 반사판으로 둘러싸인 저는 선글라스에 검은 롱코트를 입고 무표정하게 똑바로 서 있죠. 세상의 격변하는 카오스 속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조각상처럼 꼿꼿이 서 있는 자신을 뜻해요. 저한테는 표지 속 제가 그렇게 보이네요.”
- 안 그래도 당신의 음악을 듣다 보면 어떤 장면이 상상돼요. 장소는 아주 시끄러운 댄스 클럽. 그런데 당신은 중앙의 춤추는 무리에 섞이지 않고 클럽 뒤쪽 구석에서 혼자 수줍게 아주 소심한 춤을 추고 있죠. 혼잣말로 뭔가를 속삭이면서요. 혹시 당신, 이런 사람 맞나요?(웃음)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있는지에 따라 다르지만 제 첫인상은 좀 샤이한 편이 맞아요. 친해지면 저를 오픈하는 스타일이죠. 클럽에 가면, 처음엔 조금 샤이하게 시작해서 분위기가 익으면 플로어 중앙으로 슬슬 나가는 타입이죠.(웃음)”
- 제가 지난해 한국의 한겨레신문에 뉴진스 신드롬에 대한 칼럼을 기고했어요. 그러면서 ‘리듬과 비트는 강렬하지만 보컬은 부드럽고 귀엽다. 이런 대비가 뉴진스 음악을 특별하게 한다’는 취지의 글을 썼어요. 이런 이율배반적 음악 분위기가 조금은 수줍음을 타는 듯한 당신의 성격이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때요?
“어쩌면요. 제가 뉴진스를 대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제 음악에 관해서는 그게 바로 저의 표현법이라고 말해야겠네요. 혼돈의 세상에 둘러싸인 상황, 그러나 차분하고 분명히 제 메시지나 감정을 전달하고픈 마음. 이 두 가지의 대비가 그런 사운드로 표출되는 것일지도요. 또는, 몸속에는 불꽃놀이처럼 폭발하는 감정이 있지만 입밖으로 나오는 말은 조금 삼키고픈 주저함이랄까…. 음악적으로는 제가 브레이크비트(breakbeat)와 개러지(UK garage) 장르를 선호하는 까닭도 있겠죠.”
- 뉴진스의 음악이나 이미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봐요?
“뉴진스는 아주 획기적인 그룹이라고 봐요. 고만고만해지기 쉬운 팝 월드에 뭔가 확실히 신선한 것을 가져와 기여하려 분투하는 게 느껴져요.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음악, 남들과 다른 음악을 추구한다는 점이 쿨해요. 게다가 멤버들이 아직 어리잖아요. 그러니 5년쯤 뒤에는 또 과연 어떤 음악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게 만들어요. 뉴진스라는 이름처럼 늘 새로운 뭔가를 추구한다는 그 뉴진스의 콘셉트 자체가 무척 흥미로워요.”
- 케이팝 팬들은 열성적이기로 유명한데요. 뉴진스의 곡에 참여한 뒤 당신에게도 응원 메시지 같은 게 답지했나요.
“그럼요. 많이요. 제가 뉴진스의 음악에 기여했다는 것을 알게 된 팬들이 좋은 말씀을 정말 많이 전해주셨어요. 나쁜 건 단 한마디도 없었어요. 감사하죠.”
- 특히 ‘Super Shy’는 여기 한국에서 신드롬급 인기였어요. 아주 작은 아이들도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댄스 챌린지를 했죠.
“멋지네요. 자랑스러워요. 저의 곡이 4개나 (뉴진스 앨범에) 채택이 되고 그렇게 인기를 얻었다는 게 사실 믿기지 않아요. 사실 저는 전에 빌보드 차트 같은 데도 올라 본 적이 없거든요.”
- 애초에 뉴진스와 작업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코펜하겐에서 송캠프가 있었어요. 이곳의 동료 음악가들과 함께 참여를 했죠. 그런 송캠프는 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나 영국 런던에서 많이 열린다고 들어서 이번엔 우리 도시라는 데 호기심이 갔거든요. 사실 저는 다른 음악가와 이런 식으로 협업한 경험이 거의 없어요. 케이팝은 말할 나위도 없고요. 거의 그냥 경험 삼아 갔던 거예요. 그래서 아무런 기대 없이 그저 재밌게 놀 듯이 작업을 했죠. 어쩌면 ‘Super Shy’ 같은 곡들에 담긴 장난기 같은 것은 그렇게 스트레스도 부담도 없었던 송캠프 분위기 덕에 나왔는지도 모르겠네요.” - 지난해 말에 덴마크 뮤직 어워즈(Danish Music Awards)에서 ‘올해의 작곡가상’을 받았죠? 덴마크의 시상식인데 한국 그룹(뉴진스)의 작품에 기여한 공로로 상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대단히 이례적인 일 아닌가요?
“맞아요. ‘슈퍼 스페셜’ 했어요. 피네 글린트바드(Fine Glindvad)와 공동으로 수상했는데 그와는 ‘Cool With You’ ‘ASAP’ ‘New Jeans’를 함께 만들었고요. ‘Super Shy’는 저와 또 다른 작곡가들이 함께 작업했죠. 덴마크 뮤직 어워즈에 처음 초청받은 것만으로도 너무 영광이었어요. 저는 주로 영어 가사로 해외 시장에 소구하는 음악을 만들어왔으니까요. 그런데 시상식장에서 제 이름이 호명될 때는 정말 너무 놀라서 수상 소감으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말문이 막혀버릴 정도였죠.”
- 혹시 한국에 와본 적 있나요.
“아뇨. 중국과 일본은 가봤는데 한국은 아직요. 정말 정말 가보고 싶어요. 제가 또 한국 음식을 엄청 좋아하거든요. 한국에 갔다 왔다는 사람만 만나도 제가 먼저 한국 음식 이야기부터 꺼낼 정도예요.(웃음)”
- 코펜하겐의 음악대학 ‘리드믹 콘서바토리’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고 들었어요. 모범생과(科) 뮤지션인 것 같은데, 맞나요?
“그저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일 뿐이에요. 다섯 살 때부터 기타를 친 친구가 있는데 아직도 기타에 배울 게 많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비슷해요. 전 주로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지만 악기별 녹음법부터 배울 게 정말 끝도 없거든요.”
- 박사 과정에서 세부 전공은 뭐였어요?
“특별히 어떤 전공이라기보다 저의 2집 앨범 ‘Sensational’(2021년)을 완성하는 것이 사실상 최종 과제였어요. 팝 앨범에 대해서 교수님으로부터 피드백을 받고 학위를 취득한다는 게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오롯이 앨범 작업에 집중할 만한 시간과 동기를 부여받았다는 게 좋았어요.”
- 덴마크는 클래식과 재즈 음악으로도 유명하죠. 학구적인 음악가로서 혹시 그런 영향도 받나요. 당신 음악을 듣다 보면 재즈적인 화성진행도 곧잘 발견하거든요.
“확실히 재즈와 클래식을 알게 모르게 많이 접하게 되긴 해요. 제가 클래식 콘서트 가는 걸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전 음악에 대해서 이론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확실히 아니에요. 제 음악에서 재지한 걸 느끼신다면 그 이유는 되레 제가 음악학의 법칙보다는 감각적으로 좋게 들리는 것에 더 집중하는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 음악 작업에 즐겨 쓰는 장비나 소프트웨어, 플러그인이 있다면요?
“‘에이블턴 라이브’를 메인으로 많이 사용해요. 신시사이저로는 롤랜드의 JV-1010, (코르그의) 트라이톤, 액세스의 바이러스 인디고를 즐겨 써요. 사실 그때그때 장비는 달라지죠. 특별한 플러그인은 솔직히 잘 안 쓰고, 샘플에 이펙트만 조금 넣어서 사용할 때가 많아요.”
- 가사를 들여다보면 사랑과 이별, 연애 관계의 어려움, 관능적인 상황들이 자주 언급돼요. 가사를 쓸 때 즐기는 스토리라인이나 분위기가 있나요?
“딱히 그렇진 않아요. 사실 비트를 먼저 만들고 그 느낌에 따라 가사를 나중에 넣는 경우가 많죠. 내 안의 어떤 막연한 감정에 따라 사운드를 만들어 가다 보면 자연스레 동경과 갈망, 또는 슬픔과 우수 같은 것이 음악에 배어 나오게 되고, 그러면 가사도 결국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경우가 잦아요. 실은 어떤 것이 먼저인지 모를 정도로 감정과 음악은 정방향, 역방향으로 상호작용을 하죠.” - 음악 외에 일상에서 즐기는 것이 있다면요?
“독서요. 책 한 권 떼는 데 어떨 때는 반 년이 걸릴 정도로 엄청 느리게 읽는 편이긴 하지만요. 주로 심리학, 뇌과학, 문화인류학 서적을 좋아해요. 순회공연이든 여행이든 떠날 때는 무조건 책 한 권 가방에 넣어서 출발해요. 평소엔 콘서트를 보러 가거나 코펜하겐 시내나 동네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행사에 기웃대는 것도 좋아하고요. 요리, 그리고 고양이랑 놀기도 좋아해요.”
- 요즘 새로 빠져든 음악이 있다면 소개해줄 수 있어요?
“워낙에 다양하게 듣지만, 그 중에서도 흘러간 음악들 중 좋은 걸 계속 디깅하는 편이에요. 예를 들면, 최근엔 트립합(trip hop) 장르요. 트리키의 ‘Maxinquaye’(1995년)의 리믹스 앨범을 최근에 발견했는데 완전 미쳤어요. 음악을 하루 일과의 동반자, 자극제처럼 즐기기도 하죠. 눈을 뜨면 앰비언트 뮤직을 들어요. 브라이언 이노 같은. 최근엔 일본 아티스트 히로시 요시무라(1940~2003)의 ‘Wet Land’(1993년) 앨범에 빠졌죠. 느리게 하루를 시작한 뒤, 자전거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할 때는 좀 더 에너지를 주는 음악, 예를 들면 카디 비, 드레이크, 시저(SZA) 같은 힙합, R&B를 즐겨요. 좀 다른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땐 이곳 코펜하겐 출신 인디 음악가들의 훌륭한 음악들을 듣고요. 가끔은 아무것도 틀어놓지 않고 침묵 그 자체를 깊이 즐기기도 한답니다.”
- 향후 계획이 궁금해요. 혹시 케이팝 작업도 더 할 예정인가요?
“아직은 비밀이지만 또 다른 케이팝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어요. 여름 페스티벌 몇 곳에도 오르고 제 순회공연도 이어갈 예정이고요. 잘하면 가을쯤에 신곡을 발표할 생각도 있어요. 그리고 정말, 꼭, 반드시 한국에 가는 날이 빠른 시일 내에 왔으면 좋겠네요! 한국에 가게 되면 좋은 식당 소개해주세요!” / 임희윤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