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박수근이 살던 창신동 집
동묘는 임진왜란 후에 조선에 파견되었던 명나라의 원군들을 통해 들어왔다. 공자를 모시는 사당을 ‘문묘(文廟)’라 하고 삼국지의 관우를 모시는 사당을 ‘무묘(武廟)’라 하는데, 동서남북에 관우를 모시는 ‘관왕묘’가 있었다. 그중 동쪽에 있는 '동관왕묘'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런데 이 역 3번 출구로 나오면 이름만큼이나 낯선 풍경이 연출된다. 주말뿐 아니라 평일에도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하다. 예전에는 어르신들만이 즐기는 장터였지만 지금은 젊은 사람들, 외국인들도 북적인다. 동대문 밖에만 나가도 서울은 이렇게 이채롭다. 소설가 이효석의 단편 <도시와 유령>에도 이곳 동묘가 등장한다.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라고 한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이 언제 이곳에 와 이런 소설을 쓴 것일까?
그는 머리 좋은 수재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1925년에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재학 중에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일정한 일터도 없는 뜨내기인 <나>는 매일 밤 일정한 거처도 없이 동묘 처마 밑에서 노숙한다. 어느 날 동료인 김서방과 술 한잔을 하고 동묘 안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도깨비불과 산발한 노파로 인해 혼비백산하고 나온다. 다음날 간밤의 실체가 궁금하다. 과연 도깨비인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동묘 안으로 몽둥이를 들고 들어가서 간밤의 물체를 확인한다. 밤에 본 것은 헐벗은 거지 행색의 모자(母子)임을 발견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참 기구하다. 노파는 달포 전에 어떤 돈 많은 사람의 자동차에 치여 다리 병신이 되었다. 구걸도 못하고 겨우겨우 연명만 한다. 주인공인 나는 돈을 모두 몰아주고 그곳을 빠져나온다.'
도시라고 하지만 뭔가 괴기스러운 이질적인 모습으로 동묘를 그렸다. 그때의 동묘와 지금은 어떻게 다를까? 이효석이 소설을 쓴 1920년대에서 백 년 가까이 흐른 지금, 놀랍게도 동묘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변화가 없는 듯하다.
소설에서처럼 괴기스러움은 없어졌지만 수많은 갈 곳 없는 어르신들이 이곳, 허름한 동묘앞 시장으로 몰려온다. 이 시장을 부르는 이름이 다양하다. 구제품과 같은 허름한 옷을 판다 해서 ‘구제시장’. 벼룩이 들끓을 정도로 오래된 물건이 있고, 상인들이 벼룩처럼 튀어 다니며 중고품을 모아왔다는 뜻에서 ‘벼룩시장’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에 들려 천 원짜리 대포 한 사발을 마시고, 그다지 필요도 없는 값싼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들. 아마도 이효석이 소설을 쓸 때, 벼룩시장은 없었겠지만 비슷한 노점상들이 있지 않았을까?
이곳 동대문이 노점상들의 천국이 된 것은 6·25전쟁 때부터이다. 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당장 잠잘 곳이 필요했다. 청계천 뚝방에 뚝딱뚝딱 판자집을 지었다. 그리고 더러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복을 청계천 빨래터에 내려가 염색해서 팔기도 하고, 월북할 때 머리에 이고 온 '싱거 미싱'으로 옷을 수선하여 몸빼 바지, 잠바를 만들어 팔았다.
그런 재주조차 없는 이들은 청계천변에서 좌판을 펴고 미군 부대에서 나온 물건들, 생필품, 골동품과 잡동사니를 주워 팔았다. 이들이 벼룩처럼 동대문 근처, 황학동으로 몰려다니다가 마지막 보루처가 동대문운동장(옛 서울운동장)에 마련된 ‘풍물 시장’이었다. 그런데 이마저도 헐리자 서울시가 마련해 준 신설동의 ‘서울풍물시장’으로 따라가지 않은 상인들이 동묘로 모여들며 자리를 잡았다.
동묘 앞 혼잡한 인파를 헤치고 ‘구제시장’으로 들어가니 삼일아파트를 따라 먹거리 볼거리가 즐비하다. 토스트와 막걸리 등 천 원에 판다. 청계고가 옆, 부의 상징과 같던 삼일아파트가 낙후되자 이명박 정부는 7층 건물 중 2층만을 남겨 놓았다. 시장을 나오니 맞은 편, 싸인 보드가 보인다. 무엇을 알리는 것일까? 자세히 보니 놀랍게도 국민화가 박수근의 집을 알리는 안내판이다. 박수근이 누구인가? 단순화된 선과 구도, 화강암처럼 우둥퉁한 질감으로 서민들의 정서를 대변한 국민화가가 아닌가? 사실 여러 번 이곳을 지나쳤지만 박수근의 집을 찾지 못했다. 박수근이 살던 집을 찾아가려면 에둘러 동묘 벼룩시장을 지나갈 필요가 없다. 동묘앞 6번 출구로 나오면 더 빠르긴 하다. 동대문 아파트를 지나 50미터 정도 가면 <낭만낙지>라는 식당이 보인다. 식당 측면 한쪽 면을 보니 지붕에서 물이 내려오는 홈통에 붓펜으로 ‘박수근 화백 사시던 집’이라고 쓰여 있다. 유홍준 교수가 문화재청장 시절 동대문 이곳에 들렸다. 박수근의 집이 안타깝게 식당으로 방치된 것을 보고 붓펜으로 직접 글씨를 썼다. 박수근은 1953년 6·25전쟁이 막 끝난 시점부터 1963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창신동 집'은 아버지가 월남하신 후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근무하신 소산으로 마련된 우리의 보금자리였다. 미닫이문이 없는 마루를 중심으로 마주 보노라면 오른편에는 안방과 부엌, 왼편에는 내가 종아리를 맞을 때면 나의 역성을 들어 주시던 형권이 아주머니가 살던 건넌방이 있다. 그리고 화장실이 나란히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정남향의 ㄷ자 형의 한옥이었다.” (박수근의 장녀 박인숙, <내 아버지 박수근> 중에서)전쟁 통에 박수근은 미군 px(현재 신세계 백화점) 한국 물산점 초상화부에서 근무했다.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온 미군들은 손수건이나 스카프에 가족, 애인의 초상화를 그려 고향에 보내 줬다. 박수근은 이곳에서 그림을 그려주고 돈을 벌었다. 번 돈으로 서울의 변두리, 도성 밖 이곳에 집을 장만 했다.
당시 집 주변은 채소밭이었다. 문이 없는 대청마루에서 박수근은 많은 작품을 그렸다. 늦은 밤 전차를 타고 동대문 밖 전차 종점에서 내려 털래털래 집으로 가다가 노상 좌판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을 지나칠 수 없어서 이곳에서도 한 보따리, 저곳에서도 한 보따리씩 샀다. 그의 작품 <노상>을 보면 노점에서 좌판을 벌려놓고 물건을 파는 상인의 고단함이 엿보인다. 가운데 앉아있는 여인은 제법 큰 좌판을 놓고 좌측의 노점상과 이야기한다. 좌판에는 아직도 팔리지 않은 물건이 가득하다. 오른쪽 여인은 땅바닥 광주리에 과일인듯한 물건을 놓고 무엇이 부끄러운지 오히려 손님을 외면하고 앉아 있다. 이들에 대한 연민이 그림에 녹아 있다. 박수근의 집에서 몇 걸음만 걸으면 청계천이다. 그는 아마도 검정고무신이나 슬리퍼를 끌고 청계천 뚝방을 내려갔을 것이다. 그곳에서 빨래하는 풍경을 보고 그린 그림이 그 유명한 <빨래터>이다. 청계천의 상류 청풍계, 옥류동 계곡에서 맑은 물이 내려온다. 그러나 서울시민이 오물을 버려 하수구로 변하지만 비가 내린 후, 물이 넘칠 때를 기다려 아낙들은 빨래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내려왔다.
솥단지를 걸어 놓고 불을 피워 빨래를 삶는 날이면 잔치가 벌어졌다. 전쟁 통에 실종된 가족 얘기를 하다가 눈시울을 적시는 여인들, 준비해온 찬거리에 밥을 먹고 널려진 빨래가 마르기를 기다린다. 시류를 잘 타는 사람들은 미군 부대에서 밀반출된 군용점퍼를 가져왔다. 녹색 군복을 빨리 검정색으로 염색해야 군복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가공해서 시장에 팔아 쌀을 샀다. 이런 사람들을 그린 박수근의 그림 <빨래터>가 2007년 경매에서 45억 2천만 원에 낙찰되었다. 풀만 먹는 소가 맛있는 육질로 변하듯이 서민의 고달픈 일상을 그린 그림이 최고가의 그림이 되었다. 해방이 되자 고국에 돌아온 사람들, 전쟁 통에 공산당이 싫어서 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도 청계천으로 몰려왔다. 천변의 짜투리 땅에 나무 기둥을 박고 판자를 엮었다. 더러는 두꺼운 종이와 함석을 이용해 벽과 지붕을 만들었다. 아버지의 손재주에 따라 집의 형태와 공간도 바뀌었다. 화장실도 없는 집, 용변은 천변에서 해결했다. 비가 오면 새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판자집, 올망졸망 이어지는 끝 없는 판자집 풍경, 이런 모습이 1970년대 초, 청계천이 복개될 때까지 이어졌다. 박수근은 이것을 그림으로 남겼다. 박수근의 작품 <판자집>이다.
그에 비하면 박수근의 집은 대궐이다.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하다. 물론 도로 확장공사로 인해서 절반은 사라졌지만 그때의 담과 공간은 잘려진 채 그대로 남아있다. 그가 전성기라고 불렸던 시절의 그림들이 사실은 이곳 동대문 밖, 청계천변에 살았던 서민들의 풍경이다. 왜 그는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식당으로 변한 그가 살았던 집 앞의 싸인보드에 그 실마리가 묻어 있다.
“나는 인간의 착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며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즐겨 그린다.”
그가 그린 것은 인간 진실이었다. 어려운 시대를 감내하며 살았던 시대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그림, 그래서 그를 ‘국민화가’라고 부른다.
한이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