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을 그냥 내려놓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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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정소연의 탐나는 책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대런 아세모글루, 최완규, 시공사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대런 아세모글루, 최완규, 시공사
국가는 개인이 참여해 실감할 수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조직이다. 우리는 이른바 개발도상국이라 간주하는 국가들을 바라보며 민족성을 운운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도 한때 ‘코리안 타임’이란 얘기를 들었을 정도로 약속 시간을 준수하지 않았고 길거리는 깨끗하지 않았다.
오늘의 한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아직 가시권에 들어오지 않은 생소한 국가들을 제대로 알아가 보자는 책들을 기획하면서 내가 품었던 생각은 ‘도시화의 진척도’였다. 숟가락 숫자도 안다는 향촌에서 익명성의 도시로 건너오면서, 생판 남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려면 일관성 있는 규칙이 필요하다. 도시화는 가난한 나라에 중산층을 양산하는 지렛대다. 그러나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중진국 함정에 빠지는 국가들이 다수다. 언제나 걸려 넘어지는 장애물이 있었으니 엘리트들의 권력 독점과 부패다.
그런데 그런 논리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강조하는 정치 제도에도 해당할까? 정치는 물리적 실체보다는 대중 심리를 다루는 마술처럼 보이는데도? 정치는 제법 수치로 돌아갈 것 같은 경제보다는, 거품과 심리를 먹고 사는 주식 시장과 더 닮아 있다.
세상에 기득권을 순순히 내려놓는 어수룩한 생명체가 있을까? 하다못해 동창회 회장도 매년 다시 투표로 뽑는다. 선위 이양을 강제해 놓은 것이다. 물론 이승에도 <명상록>을 쓴 철인 황제 아우렐리우스 같은 인물도 있다. 스토아 철학을 실행하며 항상 겸양을 실천하려 했고 매일의 성찰을 기록한 것이 명상록이다. 개인이 자신을 다스리는 도덕과 철학을 겸비한 것은 매우 칭송할 만하다. 그러나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은 폭정의 아이콘 코모두스다. 로마의 황제도 아들은 제 맘대로 하지 못했다.
이 그림에서 누가 아들 코모두스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리더의 선의에만 맡기기에는 어떤 사람이 그 자리에 앉느냐에 따라 리스크가 너무 크다. 게다가 인간의 비합리성은 ‘자기기만’을 밥 먹듯이 한다. “저는 다른 사람을 돕기를 좋아합니다”라고 반장 선거에 나와 목소리를 높이는 딸과 아들을 제 엄마들은 인정하겠는가.
또 우리들 나약한 소시민들은 그들 웃전의 멋진 자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후광효과에 취약하다. 정치인을 포함해 현대 각 분야의 인플루언서는 개인적인 매력자본이 대단한 인물들이다. 그들 대다수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게 아니라 당대에 매력으로 그 자리에 오르지 않았는가? 매력은 진정성의 증폭기다. 그들이 “나는 도덕적인 사람이며 대의를 항상 생각한다”고 주장한다면 추종자들 중에 몇이나 차가운 비판을 들이대겠는가?
개인의 도덕성과 수양은 여전히 중요하며 희소해지는 현실은 너무 안타깝다. 개인적인 성공과 행복에서 필요조건임은 분명하다. 믿어라, 타인에게서 선함을 보는 사람은 선의로 보답받을 것이다. 욕망이 클수록 허전함도 커진다. 그러나 공적인 영역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정된 자원을 누군가는 차지하고 배분하게 된다. 어느 사회와 조직에서든 우리들 각자에 공존하는 이기심을 받아들이고 ‘보이지 않는 손’을 믿는 편이 안전장치로 믿음직스럽다. 바람직한 정치 제도는 거래 장부처럼 권력을 투명하게 내비치고, 그 제도는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가 닿아야 한다. 세계 질서에서 ‘캡틴 아메리카’이기를 포기했다는 미국이 여전히 ‘참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장면들이 있다. 시가총액 1, 2위 기업에 철퇴를 예고하고 실제로 실행할 때다. 이번 애플 독점 피소 이전에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20세기 초 록펠러 같은 석유 재벌들도 독점 철퇴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거물일수록 그 욕망을 사회가 통제하지 않으면 작은 거인들의 창의성은 시작부터 말라 죽는다.
“여러분, 저 믿죠?”에 내놓을 말은 “기록으로 검증합시다”가 되어도 좋겠다. 우리 정서에 조금 차갑게 느껴지지만 그것이 우리의 터전일 수밖에 없는 국가 전체가 장기적으로 성공하는 길이라니 말이다. /정소연 세종서적 편집주간
오늘의 한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아직 가시권에 들어오지 않은 생소한 국가들을 제대로 알아가 보자는 책들을 기획하면서 내가 품었던 생각은 ‘도시화의 진척도’였다. 숟가락 숫자도 안다는 향촌에서 익명성의 도시로 건너오면서, 생판 남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려면 일관성 있는 규칙이 필요하다. 도시화는 가난한 나라에 중산층을 양산하는 지렛대다. 그러나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중진국 함정에 빠지는 국가들이 다수다. 언제나 걸려 넘어지는 장애물이 있었으니 엘리트들의 권력 독점과 부패다.
국가는 도대체 왜 실패하는가
자칫 인종이나 민족, 특정 종교의 우월성으로 빠질 우려가 있는 문화 비교를 넘어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성공하는 국가의 제도에 주목한다. 건전한 비판과 창의·혁신을 품을 수 있는 포용적 제도가 성공을 이루는 데 핵심이다. 너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사실 생존을 위해 기업들은 일찌감치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포용적이며 평평한 조직을 추구해왔다. 다양성을 품지 못하는 조직은 혁신적인 상품을 시장에 내놓지 못하므로 도태된다.그런데 그런 논리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강조하는 정치 제도에도 해당할까? 정치는 물리적 실체보다는 대중 심리를 다루는 마술처럼 보이는데도? 정치는 제법 수치로 돌아갈 것 같은 경제보다는, 거품과 심리를 먹고 사는 주식 시장과 더 닮아 있다.
세상에 기득권을 순순히 내려놓는 어수룩한 생명체가 있을까? 하다못해 동창회 회장도 매년 다시 투표로 뽑는다. 선위 이양을 강제해 놓은 것이다. 물론 이승에도 <명상록>을 쓴 철인 황제 아우렐리우스 같은 인물도 있다. 스토아 철학을 실행하며 항상 겸양을 실천하려 했고 매일의 성찰을 기록한 것이 명상록이다. 개인이 자신을 다스리는 도덕과 철학을 겸비한 것은 매우 칭송할 만하다. 그러나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은 폭정의 아이콘 코모두스다. 로마의 황제도 아들은 제 맘대로 하지 못했다.
이 그림에서 누가 아들 코모두스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리더의 선의에만 맡기기에는 어떤 사람이 그 자리에 앉느냐에 따라 리스크가 너무 크다. 게다가 인간의 비합리성은 ‘자기기만’을 밥 먹듯이 한다. “저는 다른 사람을 돕기를 좋아합니다”라고 반장 선거에 나와 목소리를 높이는 딸과 아들을 제 엄마들은 인정하겠는가.
또 우리들 나약한 소시민들은 그들 웃전의 멋진 자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후광효과에 취약하다. 정치인을 포함해 현대 각 분야의 인플루언서는 개인적인 매력자본이 대단한 인물들이다. 그들 대다수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게 아니라 당대에 매력으로 그 자리에 오르지 않았는가? 매력은 진정성의 증폭기다. 그들이 “나는 도덕적인 사람이며 대의를 항상 생각한다”고 주장한다면 추종자들 중에 몇이나 차가운 비판을 들이대겠는가?
개인의 도덕성과 수양은 여전히 중요하며 희소해지는 현실은 너무 안타깝다. 개인적인 성공과 행복에서 필요조건임은 분명하다. 믿어라, 타인에게서 선함을 보는 사람은 선의로 보답받을 것이다. 욕망이 클수록 허전함도 커진다. 그러나 공적인 영역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정된 자원을 누군가는 차지하고 배분하게 된다. 어느 사회와 조직에서든 우리들 각자에 공존하는 이기심을 받아들이고 ‘보이지 않는 손’을 믿는 편이 안전장치로 믿음직스럽다. 바람직한 정치 제도는 거래 장부처럼 권력을 투명하게 내비치고, 그 제도는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가 닿아야 한다. 세계 질서에서 ‘캡틴 아메리카’이기를 포기했다는 미국이 여전히 ‘참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장면들이 있다. 시가총액 1, 2위 기업에 철퇴를 예고하고 실제로 실행할 때다. 이번 애플 독점 피소 이전에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20세기 초 록펠러 같은 석유 재벌들도 독점 철퇴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거물일수록 그 욕망을 사회가 통제하지 않으면 작은 거인들의 창의성은 시작부터 말라 죽는다.
“여러분, 저 믿죠?”에 내놓을 말은 “기록으로 검증합시다”가 되어도 좋겠다. 우리 정서에 조금 차갑게 느껴지지만 그것이 우리의 터전일 수밖에 없는 국가 전체가 장기적으로 성공하는 길이라니 말이다. /정소연 세종서적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