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7만리터 담아두던 1급 보안시설을 이렇게 만들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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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배세연의 스페이스 오디세이
매봉산 '문화비축기지'
매봉산 '문화비축기지'
서울 마포구의 매봉산에는 '문화비축기지'가 있다. 이곳을 항공사진으로 보면 큰 광장을 중심에 두고 매봉산 암반을 움푹 파고들어 간 대형 원통들이 그 주변에 나열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광경은 무언가 재미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밀스럽기 그지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곳은 비밀과 함께 시작된 장소가 맞다.
2017년에 '문화비축기지'로 개관한 이곳은 본래 '마포석유비축기지'였다. 1970년대의 석유파동 이후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석유저장 탱크 5기가 이곳에 설치되었고 지름 15~38M, 높이 13~15M인 이 대형 탱크들에는 6907만 리터의 석유를 저장할 수 있었다.
1급 보안시설이었으며 일반인의 출입은 금지된 채 산속에서 숲으로 가려져 있었기에 이곳은 외부에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채 오래 숨어있을 수 있었다. 그랬던 이곳이 월드컵경기장 신축을 계기로 2000년에 폐쇄되었고 이후 유휴지로 남아 있다가 2017년에 석유가 아닌, 문화를 비축하는 문화비축기지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석유를 담고 있던 탱크들이 인간을 위한 공간으로 재생된다는 소식은 당시 일반적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공간에 대한 기대와 함께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필자에게는 새롭게 탄생할 공간보다 산을 깎아 석유 보관용 탱크를 설치했다는 과거의 사실이 먼저 퍽 폭력적으로 인지되었다.
산업화를 일구어내는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자연을 훼손해왔지만 산을 도려내어 석유를 비축하고, 이렇게 가까운 장소에서 관계자 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비밀에 부친 채 오랜 시간 고립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탱크를 둘러싸던 방유제까지 보존하여 석유비축기지의 원형을 충실하게 간직하고 있는 이곳의 석유 탱크들은 다양한 재생 방식을 보여준다. 탱크의 보존을 우선에 두고 전시, 공연장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재생된 곳 (T4, T5), 본래의 탱크를 철거하고 유리를 활용하여 탱크의 형태를 복원한 곳 (T1), 탱크를 일부 철거한 자리에 매봉산의 암벽을 배경으로 야외공연장을 설치한 곳 (T2), T1과 T2를 철거할 때 발생한 철판을 재사용하여 만든 커뮤니티 공간 (T6), 그리고 탱크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여 역사성을 간직한 곳 (T3)이 이곳을 구성하는 탱크들이다.
이곳에서는 탱크가 철거된 자리일지라도 과거의 탱크가 인지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기능적인 보완을 위해 새로운 것을 더할 때는 과거의 것과 확실하게 구분되지만 주변과 잘 어우러질 수 있는 재료를 선택하여 장소에서 홀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였다. 탱크를 그대로 보존하여 공연장으로 사용하는 T4와 같은 곳에서는 철판으로 구성된 거대 공간에서의 압도적인 공간감이, 탱크의 재료를 유리로 대체하여 파빌리온을 구성한 T1에서는 매봉산의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자연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서로 멀리 위치하고 있는 각각의 탱크들을 연결하는 잘 다듬어진 길은 시민들의 산책로가 되어 이 탱크들을 오고가기 좋게 만든다. 이쯤 되면 이곳은 문화단지로 훌륭하게 재생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석유 탱크들을 자리하게 하기 위해 매봉산은 40년여 전 자신의 자리를 일부 내어주었다. 산속의 탱크들은 오랜 시간 암벽에 둘러싸여 인적도 없는 곳에서 세월을 버티었고 암벽과 탱크 사이에 나 있던 좁은 길에는 서서히 사람이 의도하지 않았던 경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산책로와 연결되기도 하는 이 길을 걷다 보면 거대한 석유 탱크들이 어떠한 시설이나 건물로 인지되기보다는 매봉산 자연의 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 생긴다. 탱크의 철판들은 녹이 슬어 빛바랜 색을 드러내고 있고, 깎여나간 암벽에는 무성한 이끼와 새로운 식물들이 돋아나고 있다.
이들이 모두 하나로 어우러져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서는 항공사진에서 보이던 원통형의 조형물은 인식되지 않는다. 다만 세월을 머금은 철판과 새 생명을 틔워내기 시작한 암벽들이 모호해진 경계 안에서 모두 하나의 자연으로 인지될 뿐이다. 문화비축기지에 조성된 다른 어떤 것보다 이러한 자연성의 회복에서 느껴지는 진한 감동은 단순히 '좋다'라는 말로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있다. 또한 문화비축기지를 걸어 다니다 보면 이곳이 석유비축기지였던 시절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증언이 새겨진 '기억안내판'을 만날 수 있다. 이를 통해 거대한 이곳이 한때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던 장소임이 명징하게 인지되고, 그 순간 이곳에 숨겨져 있던 시간이 쏟아져 내리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매봉산이 인간 세상의 산업화를 위해 자연을 내어준 지 40년여가 지난 지금, 인간이 만든 것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져 스스로 회복하려는 생명력이 그 장소에서 피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에 '문화'비축기지에는 어떠한 문화가 행해져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문화 또한 인간의 활동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므로, 자연이 품고 있는 이 장소에 앞으로 행해질 문화의 적합성에 대한 고민은 중요해질 것이다. 매봉산의 암벽을 뚫고 새롭게 자라나는 나무가 전달하는 메시지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배세연 한양대 실내건축디자인학과 조교수
2017년에 '문화비축기지'로 개관한 이곳은 본래 '마포석유비축기지'였다. 1970년대의 석유파동 이후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석유저장 탱크 5기가 이곳에 설치되었고 지름 15~38M, 높이 13~15M인 이 대형 탱크들에는 6907만 리터의 석유를 저장할 수 있었다.
1급 보안시설이었으며 일반인의 출입은 금지된 채 산속에서 숲으로 가려져 있었기에 이곳은 외부에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채 오래 숨어있을 수 있었다. 그랬던 이곳이 월드컵경기장 신축을 계기로 2000년에 폐쇄되었고 이후 유휴지로 남아 있다가 2017년에 석유가 아닌, 문화를 비축하는 문화비축기지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석유를 담고 있던 탱크들이 인간을 위한 공간으로 재생된다는 소식은 당시 일반적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공간에 대한 기대와 함께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필자에게는 새롭게 탄생할 공간보다 산을 깎아 석유 보관용 탱크를 설치했다는 과거의 사실이 먼저 퍽 폭력적으로 인지되었다.
산업화를 일구어내는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자연을 훼손해왔지만 산을 도려내어 석유를 비축하고, 이렇게 가까운 장소에서 관계자 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비밀에 부친 채 오랜 시간 고립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탱크를 둘러싸던 방유제까지 보존하여 석유비축기지의 원형을 충실하게 간직하고 있는 이곳의 석유 탱크들은 다양한 재생 방식을 보여준다. 탱크의 보존을 우선에 두고 전시, 공연장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재생된 곳 (T4, T5), 본래의 탱크를 철거하고 유리를 활용하여 탱크의 형태를 복원한 곳 (T1), 탱크를 일부 철거한 자리에 매봉산의 암벽을 배경으로 야외공연장을 설치한 곳 (T2), T1과 T2를 철거할 때 발생한 철판을 재사용하여 만든 커뮤니티 공간 (T6), 그리고 탱크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여 역사성을 간직한 곳 (T3)이 이곳을 구성하는 탱크들이다.
이곳에서는 탱크가 철거된 자리일지라도 과거의 탱크가 인지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기능적인 보완을 위해 새로운 것을 더할 때는 과거의 것과 확실하게 구분되지만 주변과 잘 어우러질 수 있는 재료를 선택하여 장소에서 홀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였다. 탱크를 그대로 보존하여 공연장으로 사용하는 T4와 같은 곳에서는 철판으로 구성된 거대 공간에서의 압도적인 공간감이, 탱크의 재료를 유리로 대체하여 파빌리온을 구성한 T1에서는 매봉산의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자연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서로 멀리 위치하고 있는 각각의 탱크들을 연결하는 잘 다듬어진 길은 시민들의 산책로가 되어 이 탱크들을 오고가기 좋게 만든다. 이쯤 되면 이곳은 문화단지로 훌륭하게 재생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석유 탱크들을 자리하게 하기 위해 매봉산은 40년여 전 자신의 자리를 일부 내어주었다. 산속의 탱크들은 오랜 시간 암벽에 둘러싸여 인적도 없는 곳에서 세월을 버티었고 암벽과 탱크 사이에 나 있던 좁은 길에는 서서히 사람이 의도하지 않았던 경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산책로와 연결되기도 하는 이 길을 걷다 보면 거대한 석유 탱크들이 어떠한 시설이나 건물로 인지되기보다는 매봉산 자연의 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 생긴다. 탱크의 철판들은 녹이 슬어 빛바랜 색을 드러내고 있고, 깎여나간 암벽에는 무성한 이끼와 새로운 식물들이 돋아나고 있다.
이들이 모두 하나로 어우러져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서는 항공사진에서 보이던 원통형의 조형물은 인식되지 않는다. 다만 세월을 머금은 철판과 새 생명을 틔워내기 시작한 암벽들이 모호해진 경계 안에서 모두 하나의 자연으로 인지될 뿐이다. 문화비축기지에 조성된 다른 어떤 것보다 이러한 자연성의 회복에서 느껴지는 진한 감동은 단순히 '좋다'라는 말로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있다. 또한 문화비축기지를 걸어 다니다 보면 이곳이 석유비축기지였던 시절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증언이 새겨진 '기억안내판'을 만날 수 있다. 이를 통해 거대한 이곳이 한때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던 장소임이 명징하게 인지되고, 그 순간 이곳에 숨겨져 있던 시간이 쏟아져 내리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매봉산이 인간 세상의 산업화를 위해 자연을 내어준 지 40년여가 지난 지금, 인간이 만든 것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져 스스로 회복하려는 생명력이 그 장소에서 피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에 '문화'비축기지에는 어떠한 문화가 행해져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문화 또한 인간의 활동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므로, 자연이 품고 있는 이 장소에 앞으로 행해질 문화의 적합성에 대한 고민은 중요해질 것이다. 매봉산의 암벽을 뚫고 새롭게 자라나는 나무가 전달하는 메시지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배세연 한양대 실내건축디자인학과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