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최후를 예상한 바닷가재의 집게발 공격 … 윌리엄 스트럿의 ‘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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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용재의 맛있는 미술관
아이고. 보는 내가 다 아프다. 손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다. 그만큼 개, 아니 강아지의 표정이 적나라하다. 고개를 한껏 젖히고 입을 있는 힘껏 벌리고 있다. 음성 지원이 될 정도다. 살짝 뭉개진 듯한 배경이나 또 다른 주연인 바닷가재에 비하면 개가 좀 더 세부적으로 그려진 것 같아 효과가 극대화된다. 털의 결마저 그가 느끼는 고통에 따라 요동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작품과 음식에 대해 이야기할까 고민하다가 우연히 엑스 (옛 트위터)에서 이 그림을 보았다. 처음에는 일종의 밈이나 AI 생성 이미지는 아닐까 의심했다. 화풍도 매체도 사실 그런 느낌은 아니지만 정황이 그렇게 보였다. 바닷가재가 개의 앞발을 물고 있는 그림 속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던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인지 확신이 잘 가지 않았다. 그래서 실존 작품인가 잠시 의심했다. 작가가 이미 고인인지라 물어볼 수는 없다. 영국의 화가 윌리엄 스트럿 (1825~1915)으로 이미 백년도 더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영국인이지만 초기 식민지 시대 호주의 주요한 사건들을 캔버스에 남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851년 2월 6일 검은 목요일 (기록적인 산불의 명칭)> (1864), <빅토리아의 범법자들, 호주 1852> (1887) 등이 대표작이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와 보자. 바닷가재에게 물려 있는 강아지가 안타까워 감정이 이입되려고 하는 가운데 제목을 알고 나면 피식, 실소가 삐져나온다. 그래서 제목이 뭐냐고? 바로 <환대 (A Warm Response)>이다. 아니, 사실은 강아지와 바닷가재가 서로 악수라도 나누고 있는 상황인 걸까? 안녕하세요, 강아지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바닷가재입니다. 하지만 스트럿의 대표 작품 가운데 <팟럭 (Pot Luck)>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나면 이해가 좀 더 잘 된다. 원래 여러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음식을 가져와 나눠 먹는 잔치를 뜻한다. 하지만 스트럿의 작품은 개 네 마리가 인간이 버린 양동이의 음식을 먹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개들에게 얼마나 흥겨운 잔치였을까? 아무래도 그가 영국식 블랙 유머를 즐겼던 것은 아닌가 추측하게 된다.
이게 다 그림 속 바닷가재가 실하게 잘 자라서 벌어진 비극이다. 요즘도 최고 기온이 섭씨 이십 도를 넘겨 전주곡을 울리는 가운데, 이제 곧 다가올 제철 여름까지 자란 놈 같다. 국내에는 캐나다산 바닷가재가 들어오는데 살이 꽉 찬 5, 6월에 금어기를 풀었다가 7월에 다시 어장 문을 닫는다. 그런 가운데 갑각류다 보니 바닷가재는 게마냥 수율, 즉 껍데기에서 발라낸 살의 비율이 엄청나게 낮아 20퍼센트 수준이다. 이는 웬만큼 큰 놈들이 아니면 바닷가재랍시고 먹다가 입맛만 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말이다. 실제로 나는 마트에서 450그램 수준의 바닷가재가 팔리는 광경도 본 적이 있다. 수율이 20퍼센트이니 살은 고작 90그램 수준, 누구의 코에도 가져다 붙이기 어려운 양이다. 그렇기에 바닷가재를 먹겠다고 결심했으면 강아지 발도 물어 버릴 기개를 가질 만큼 큰 놈을 찾아야 한다. 1.8~2.7킬로그램짜리 ‘A급’을 권한다.
그림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강아지를 하필 백구로 고른 작가의 안목에도 감탄하게 된다. 공격하는 바닷가재의 검은색과 흑백 대비가 잘 되다 보니 상황이 한층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림을 잘 보면 강아지와 바닷가재의 옆에 있는 또 다른 바닷가재는 빨갛다. 추측할 수 있듯 이미 익어서 그렇다. 가재가 생전에 흡수한 아스타잔틴 (astaxantin)이라는 카로티노이드계 색소가 열에 의해 방출되면 빨개진다.
빨개서 이미 죽었음이 밝혀진 바닷가재 한 놈은 배를 까뒤집고 자빠져 있는 가운데, 또 다른 살아 있는 검은 놈은 맹렬하게 강아지의 앞발을 물고 있다. 곧 자신도 빨개질 운명을 알고 마지막으로 몸부림을 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강아지보다 몸집이 훨씬 크지만 최후를 예상한 바닷가재의 집게발 공격은 아주 거칠 수 있다. 따라서 먹는다면 판매처에 아예 조리까지 부탁하는 편이 낫다. 집에서는 일이 매우 번거로워질 수 있다. /이용재 음식평론가
어떤 작품과 음식에 대해 이야기할까 고민하다가 우연히 엑스 (옛 트위터)에서 이 그림을 보았다. 처음에는 일종의 밈이나 AI 생성 이미지는 아닐까 의심했다. 화풍도 매체도 사실 그런 느낌은 아니지만 정황이 그렇게 보였다. 바닷가재가 개의 앞발을 물고 있는 그림 속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던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인지 확신이 잘 가지 않았다. 그래서 실존 작품인가 잠시 의심했다. 작가가 이미 고인인지라 물어볼 수는 없다. 영국의 화가 윌리엄 스트럿 (1825~1915)으로 이미 백년도 더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영국인이지만 초기 식민지 시대 호주의 주요한 사건들을 캔버스에 남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851년 2월 6일 검은 목요일 (기록적인 산불의 명칭)> (1864), <빅토리아의 범법자들, 호주 1852> (1887) 등이 대표작이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와 보자. 바닷가재에게 물려 있는 강아지가 안타까워 감정이 이입되려고 하는 가운데 제목을 알고 나면 피식, 실소가 삐져나온다. 그래서 제목이 뭐냐고? 바로 <환대 (A Warm Response)>이다. 아니, 사실은 강아지와 바닷가재가 서로 악수라도 나누고 있는 상황인 걸까? 안녕하세요, 강아지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바닷가재입니다. 하지만 스트럿의 대표 작품 가운데 <팟럭 (Pot Luck)>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나면 이해가 좀 더 잘 된다. 원래 여러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음식을 가져와 나눠 먹는 잔치를 뜻한다. 하지만 스트럿의 작품은 개 네 마리가 인간이 버린 양동이의 음식을 먹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개들에게 얼마나 흥겨운 잔치였을까? 아무래도 그가 영국식 블랙 유머를 즐겼던 것은 아닌가 추측하게 된다.
이게 다 그림 속 바닷가재가 실하게 잘 자라서 벌어진 비극이다. 요즘도 최고 기온이 섭씨 이십 도를 넘겨 전주곡을 울리는 가운데, 이제 곧 다가올 제철 여름까지 자란 놈 같다. 국내에는 캐나다산 바닷가재가 들어오는데 살이 꽉 찬 5, 6월에 금어기를 풀었다가 7월에 다시 어장 문을 닫는다. 그런 가운데 갑각류다 보니 바닷가재는 게마냥 수율, 즉 껍데기에서 발라낸 살의 비율이 엄청나게 낮아 20퍼센트 수준이다. 이는 웬만큼 큰 놈들이 아니면 바닷가재랍시고 먹다가 입맛만 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말이다. 실제로 나는 마트에서 450그램 수준의 바닷가재가 팔리는 광경도 본 적이 있다. 수율이 20퍼센트이니 살은 고작 90그램 수준, 누구의 코에도 가져다 붙이기 어려운 양이다. 그렇기에 바닷가재를 먹겠다고 결심했으면 강아지 발도 물어 버릴 기개를 가질 만큼 큰 놈을 찾아야 한다. 1.8~2.7킬로그램짜리 ‘A급’을 권한다.
그림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강아지를 하필 백구로 고른 작가의 안목에도 감탄하게 된다. 공격하는 바닷가재의 검은색과 흑백 대비가 잘 되다 보니 상황이 한층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림을 잘 보면 강아지와 바닷가재의 옆에 있는 또 다른 바닷가재는 빨갛다. 추측할 수 있듯 이미 익어서 그렇다. 가재가 생전에 흡수한 아스타잔틴 (astaxantin)이라는 카로티노이드계 색소가 열에 의해 방출되면 빨개진다.
빨개서 이미 죽었음이 밝혀진 바닷가재 한 놈은 배를 까뒤집고 자빠져 있는 가운데, 또 다른 살아 있는 검은 놈은 맹렬하게 강아지의 앞발을 물고 있다. 곧 자신도 빨개질 운명을 알고 마지막으로 몸부림을 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강아지보다 몸집이 훨씬 크지만 최후를 예상한 바닷가재의 집게발 공격은 아주 거칠 수 있다. 따라서 먹는다면 판매처에 아예 조리까지 부탁하는 편이 낫다. 집에서는 일이 매우 번거로워질 수 있다. /이용재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