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영국관 전시 전경 /베네치아=김보라 기자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영국관 전시 전경 /베네치아=김보라 기자
88개국이 참전한 '미술 올림픽' 베네치아 비엔날레 국가관 전시. 올해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은 호주관에 돌아갔지만, 개막 이전부터 영국의 수상을 점치는 관계자가 대다수였다. 공식 후원 파트너의 규모부터 압도적이었기 때문. 영국관의 '우승 가능성'을 직감한 버버리, LG전자, 블룸버그, 프리즈, 크리스티, 포드 재단 등 굴지의 기업들이 앞다퉈 손을 내밀었다.

영국관 대표 작가로 등판한 세계적인 작가이자 영화감독 존 아캄프라(66)의 존재감만으로 벌어진 일이다. 1982년 이민자 예술가 단체 '블랙 오디오 필름 콜렉티브(BLFC)'를 설립하며 흑인 영상 예술을 개척한 인물이다. 세계 미술 무대에서 그의 권위는 단순한 작가 이상이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와 뉴욕대, 프린스턴대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영국관 대표 작가 존 아캄프라 /LG전자 제공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영국관 대표 작가 존 아캄프라 /LG전자 제공
여기까지만 보고 아캄프라가 늘 승승장구한 '로열로더'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가나에서 태어난 그는 포스트식민주의 시대의 풍파를 맞았다. 1966년부터 다섯 차례 연달아 벌어진 쿠데타 과정에서 작가의 아버지가 사망했고, 어머니의 안전마저 위협받았다. 목숨만 간신히 건져 영국으로 건너간 게 그의 나이 7살 때 일이다.

전시는 총 8개의 공간에 걸친 미디어아트로 피란민과 이민자의 삶을 조명한다. '밤새 빗소리를 들으며(Listening All Night to the Rain)'란 전시 제목은 북송(北宋)의 시인 소동파(1037~1101)의 시구에서 따왔다. 죽기 직전까지 유배 다닌 소동파의 말년처럼, 아캄프라는 빗물과 빗소리에서 착안한 영상으로 현대 사회의 '떠돌이'들을 돌아본다.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영국관 전시 전경 /LG전자 제공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영국관 전시 전경 /LG전자 제공
영상 속 화면은 전 세계 미디어에서 보도한 자료나 국제 아카이브 컬렉션, 도서관 등에서 찾은 이미지에 기반한다. 소년병 옆에서 잠든 남성, 1980년대 방글레다시의 대홍수 등 역사와 환경에 관련된 영상을 공간마다 배치했다. 목숨 걸고 멕시코와 미국 사이 국경을 넘는 이들이 남긴 러버덕, 고무보트에 의지해 지중해를 건너는 난민의 뒷모습을 담은 작품은 특히 관객의 발길을 오래 붙잡았다.

좋은 작품이 재료라면, 이를 맛있게 요리해내는 건 전시 기획자와 후원사의 몫이다. 영국관은 이러한 구성면에서 특히 호평받았다. 물을 중심 소재로 삼은 영상이 대부분인 만큼 빗방울과 안개의 세밀한 질감 표현이 관건이었다. LG전자가 후원한 40여대의 발광다이오드(OLED) 스크린은 작가의 메시지를 여과 없이 전달하기 충분했다.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영국관 전시 전경 /베네치아 비엔날레 제공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영국관 전시 전경 /베네치아 비엔날레 제공
사회 문제들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전시 전반에 녹아 있다.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전 대통령, 흑인 인권운동가 말콤X 등의 음성을 편집한 사운드가 전시관 곳곳에 흘러나온다. 전쟁과 기아, 난민, 기후 위기로 인한 해수면 상승 등 뉴스에서 마주한 복합적인 이슈들이 작가의 손길을 거쳐 '예술'로 다시 태어난다.

작가가 보기에 식민지 시대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은 듯하다. 지하 1층 전시 공간은 유럽의 대가들이 그린 명작이 빗물에 잠긴 듯한 영상으로 가득 채웠다. 유럽 열강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동안 침잠한 식민지인들과 그들 후손의 눈물을 그린 것일까. 영국관 전시를 기획한 타리니 말릭은 "아캄프라의 작품 속 물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기억의 저장소다"라고 했다.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영국관 전시 전경 /LG전자 제공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영국관 전시 전경 /LG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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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