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은 선구자들의 축적된 통찰 위에서 중력과 역학의 법칙을 정립했다. 죽기 1년 전 83세 때 초상화.
뉴턴은 선구자들의 축적된 통찰 위에서 중력과 역학의 법칙을 정립했다. 죽기 1년 전 83세 때 초상화.
팔삭둥이 미숙아가 어떻게 인류 역사 를 바꾼 위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근대 과학의 아버지’ 아이작 뉴턴(1643~1727)은 조산아였다. 아버지가 결혼 5개월 만에 죽자 어머니가 큰 충격을 받았고 이 때문에 제대로 발육하지 못했다. 또래보다 작고 병약한 뉴턴은 3세 때 조부모에게 맡겨졌다. 외톨이로 자란 그는 가끔 물레방아와 해시계, 물시계 모형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렇다 할 천재성은 보이지 않았다.

18세에 친척들의 도움으로 케임브리지대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기하학이 뭔지도 몰랐다. 그랬던 그가 5년 뒤인 23세 때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고, 프리즘 연구로 빛의 성질을 새롭게 규명했으며, 유율법(流率法) 발명으로 최초의 미분학까지 창시했다. 유럽을 휩쓴 흑사병을 피해 잠시 고향에 가 있던 시기였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는 일화도 이때 얘기다.

'지식의 보고' 케임브리지 도서관

이처럼 한 사람이 위대한 지식혁명을 한꺼번에 일으킨 1666년을 과학계에서는 ‘기적의 해’라고 부른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뉴턴은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는 과학자 로버트 훅에게 보낸 1675년 2월 5일 편지의 한 구절이다.

뉴턴이 올라선 첫 번째 ‘거인’은 프랑스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르네 데카르트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유명한 데카르트는 당시의 아리스토텔레스식 자연관에서 벗어나 만물의 움직임이 기계 작동원리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뉴턴은 데카르트의 이 ‘발상’을 ‘법칙’의 단계로 끌어올려 ‘힘’이라는 단일 원리로 세상을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토대로 만유인력과 운동의 3법칙을 확립했다.

또 다른 거인은 케플러와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등 천문학자들이다. 케플러가 천문학에 기본적인 정량 법칙(케플러의 법칙)을 마련하고, 갈릴레이가 자유 낙하의 법칙을 정리하고,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창한 덕분에 뉴턴이 고전 역학을 정립할 수 있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 때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기 위해 이들이 펼친 노력을 바탕으로 천상의 달과 지상의 사과에 똑같이 작용하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세운 것이다.

또 다른 ‘거인의 어깨’는 케임브리지대 도서관의 방대하고 수준 높은 자료와 그의 스승들이었다. 이는 시골뜨기 청년의 의식을 최고조로 고양해 새로운 세계에 눈뜨고 세상을 더 멀리 비춰볼 수 있게 한 반사경이었다.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뉴턴의 연구 노트.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뉴턴의 연구 노트.
뉴턴이 1687년 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에서 입체적으로 증명한 중력이론은 물리학과 천체역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게 해줬다.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해왕성의 존재를 천왕성 궤도의 수학적 계산으로 발견한 것도 이 덕분이다. 오죽하면 당대 최고 시인 알렉산더 포프가 뉴턴의 무덤에 이런 칭송을 바쳤을까. “대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에 감춰져 있었다. 신께서 ‘뉴턴이 있으라!’ 하시니 모든 것이 밝아졌다.”

재미있는 것은 ‘거인의 어깨’라는 말도 뉴턴이 창안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과학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에 따르면, 이 말은 1651년 영국 종교시인 조지 허버트의 글에 나온다. 그 전에 1621년 영국 작가 로버트 버튼, 16세기 스페인 신학자 디에고 데 에스텔라, 12세기 영국 철학자 존 솔즈베리, 12세기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 드 샤르트르가 말했다. 베르나르 또한 그리스 신화 속 거인 사냥꾼 오리온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 세상에 ‘거인의 어깨’ 덕을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인류사의 대전환점 이룬 거인"

뉴턴은 그의 연구 성과에 매료된 젊은 학자들에게도 ‘어깨’를 제공한 ‘거인’이었다.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는 뉴턴의 역학 이론으로 궤도를 산정해 핼리 혜성을 발견했다. 특수상대성이론과 광전효과, 브라운 운동에 관한 논문들로 1905년을 두 번째 ‘기적의 해’로 만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뉴턴이야말로 인류 지성사의 대전환점을 이룬 거인”이라고 평가했다.

<과학을 만든 사람들>의 저자인 영국 천체물리학자 존 그리빈은 “이처럼 수많은 사람이 과거에 현재를 쌓아 올린 것이 과학”이라며 “과학은 한 걸음씩 발전해 나아가는 것이고, 시기가 무르익으면 그다음 걸음을 두 명 이상의 사람이 각기 독자적으로 내디딜 수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거인의 어깨’는 동시대 과학자들의 시야를 넓혀 주기도 한다. 기차와 증기선이 등장하면서 1860년에 국제학회가 열렸다. 전화와 이메일이 없던 시절 편지나 주고받던 각국 과학자들이 한곳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공개 토론을 벌일 수 있게 됐다. 이들은 국제학회를 통해 과학계에서 널리 공유하는 신념을 공표했다. 과학은 객관적이고 범세계적이며, 종종 사회를 분열시키거나 국가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내모는 종교와 정치를 초월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초월의 대상으로 ‘종교와 정치’를 콕 집은 대목이 흥미롭다. 그러고 보니 과학이 발전을 거듭하는 동안에도 ‘성전’이라는 이름의 폭력과 히틀러 같은 전쟁광의 악행은 계속돼왔다. 국내로 눈을 돌려봐도 거의 모든 분야가 ‘거인의 어깨’를 딛고 성장한 데 반해 정치 쪽에는 유독 ‘거인’이나 ‘어깨’가 없다. 380년 전 조산아로 미약하게 출발해 오랜 ‘축적의 시간’ 위에서 창대한 역사를 일군 뉴턴이 보기엔 더욱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