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훈 칼럼] 늙어가는 국가, 오늘만 살겠다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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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 기업 산업 모두 노쇠한데
눈앞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세태
정치 타락과 기득권 발호 못막아
지금보다 더 잘 살고 싶으면
높은 수준의 품격 책임 갖춰야
조일훈 논설실장
눈앞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세태
정치 타락과 기득권 발호 못막아
지금보다 더 잘 살고 싶으면
높은 수준의 품격 책임 갖춰야
조일훈 논설실장
우리는 나날이 늙어가는 3만달러 국가에서 살고 있다. 인력도, 기업도, 산업도 원숙을 넘어선 노쇠의 굴레에 빠졌다. 최첨단 반도체조차 대규모 설비와 경직적 고용이라는 무거운 사슬에 묶여 있다. 연간 10조원 적자가 나도 감원이 불가능하다. 국내 최대 조선사는 외국인 근로자들 없이 돌아갈 수 없는 구조다. 모처럼 찾아온 호황에 매출 10조원을 올리고도 영업이익은 고작 3000억원에 그친다. 지금이 피크라고 하니 앞이 캄캄하다.
지난 20여 년간 눈부신 성장과 확장을 거듭해온 대기업과 금융사들은 어느새 관료주의적 무사안일에 젖었다. 일부 대기업의 주말 임원 근무는 일종의 극약처방이다. 넉넉한 연봉과 복지 혜택을 누리면서도 성장과 혁신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고 솔선수범하지 못한 데 따른 질책이다. “첨단 디지털 시대에 농업적 근면성을 요구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혁신 부재를 임원들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하지만 다들 오늘 하루를 편하게 때우는 데 급급한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일이다.
주 52시간제로 대표되는 노동 과보호와 워라밸의 범람, 해외 경쟁 기업들의 거센 견제와 추격 속에서 산업과 기업의 경쟁력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고 있다. 소비자물가와 생산자물가의 상징처럼 돼버린 사과 값과 건설 비용이 동시에 치솟은 연유가 있다. 경제 전반에 고비용 저효율 구조가 찌든 탓이다. 권력 이동이나 정치 퇴행보다 훨씬 심각한 변화다.
우리 사회에선 멀리 내다보는 사람들, 혁신을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회사, 고객, 환자야 어떻게 되든 말든 한 줌 기득권에 집착하고 미래의 일보다 눈앞의 현세적 이익에 더 촉각을 곤두세운다. 미래 담론이 힘을 잃으면 기득권 집단의 발호를 막을 길이 없다. 집단의 힘으로, 정치의 힘으로 지대를 경쟁적으로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득세한다. 노동조합과 사회단체들이 앞장선 그 대열에 이제 의사 집단이 뒤를 이었다. 필수의료 재정 확대, 의료사고 부담 완화 등 받을 것 다 받아먹고 “단 한 명의 의사도 늘리지 못한다”고 버틴다. 국가 초엘리트 집단의 몰염치다.
특권의 최상단, 국회의원들은 의사들과 거꾸로 단 한 명의 의원 감축도 거부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만 챙기고 공동체의 이익에는 둔감한 사람들을 꼬드기고 부추긴다. 타인과의 비교에 민감하고 현재의 격차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은 시장 논리의 정치 논리 전환에 기꺼이 한 표를 행사한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려 애쓰기보다 이미 만들어진 것을 나눠 가지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사회 전체가 정치 과잉으로 빠져든다. 일반인들을 ‘시민 대표’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도출한 국회연금특위의 개혁 방안이 전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들은 지금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의 미래가 아니라 자신들의 미래 이익을 선택했다. 야당과 노동계는 “현세대의 노후보장이 중요하다”며 즉각 이 선택을 지지하고 나섰다.
다음 세대에 부담을 지우는 정책은 어떤 말로 미화하든 누군가의 돈을 가져가는 것이거나 경제적 자유를 빼앗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단순히 소득이나 자원의 인위적 이전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불신, 불공정, 비효율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을 생각하면 사회 전체로 해악이 훨씬 크다. 나라 곳간을 열어 누군가를 돕자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이웃에 대한 공감과 배려는 평등을 원하는 우리 본성에 대체로 부합한다. 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과 비용은 뒷전이다. 돈을 주자는 정치인도, 그 돈을 받는 국민도 비용은 남의 일이고 나중의 일일 뿐이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자는 주장도 비슷한 범주다. 안전한 삶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핵심은 그 안전을 내 돈으로 도모할 것이냐, 타인의 돈으로 부담하게 할 것이냐의 선택이다.
이제 사람들은 지금보다 잘 사는 데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4만달러, 5만달러 시대를 위한 지적 탐색은 자취를 감췄다. 높은 소득 수준이 요구하는 교양과 품격, 자유와 책임, 경쟁과 혁신이 싫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런 덕성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 탓일지도….
지난 20여 년간 눈부신 성장과 확장을 거듭해온 대기업과 금융사들은 어느새 관료주의적 무사안일에 젖었다. 일부 대기업의 주말 임원 근무는 일종의 극약처방이다. 넉넉한 연봉과 복지 혜택을 누리면서도 성장과 혁신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고 솔선수범하지 못한 데 따른 질책이다. “첨단 디지털 시대에 농업적 근면성을 요구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혁신 부재를 임원들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하지만 다들 오늘 하루를 편하게 때우는 데 급급한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일이다.
주 52시간제로 대표되는 노동 과보호와 워라밸의 범람, 해외 경쟁 기업들의 거센 견제와 추격 속에서 산업과 기업의 경쟁력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고 있다. 소비자물가와 생산자물가의 상징처럼 돼버린 사과 값과 건설 비용이 동시에 치솟은 연유가 있다. 경제 전반에 고비용 저효율 구조가 찌든 탓이다. 권력 이동이나 정치 퇴행보다 훨씬 심각한 변화다.
우리 사회에선 멀리 내다보는 사람들, 혁신을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회사, 고객, 환자야 어떻게 되든 말든 한 줌 기득권에 집착하고 미래의 일보다 눈앞의 현세적 이익에 더 촉각을 곤두세운다. 미래 담론이 힘을 잃으면 기득권 집단의 발호를 막을 길이 없다. 집단의 힘으로, 정치의 힘으로 지대를 경쟁적으로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득세한다. 노동조합과 사회단체들이 앞장선 그 대열에 이제 의사 집단이 뒤를 이었다. 필수의료 재정 확대, 의료사고 부담 완화 등 받을 것 다 받아먹고 “단 한 명의 의사도 늘리지 못한다”고 버틴다. 국가 초엘리트 집단의 몰염치다.
특권의 최상단, 국회의원들은 의사들과 거꾸로 단 한 명의 의원 감축도 거부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만 챙기고 공동체의 이익에는 둔감한 사람들을 꼬드기고 부추긴다. 타인과의 비교에 민감하고 현재의 격차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은 시장 논리의 정치 논리 전환에 기꺼이 한 표를 행사한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려 애쓰기보다 이미 만들어진 것을 나눠 가지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사회 전체가 정치 과잉으로 빠져든다. 일반인들을 ‘시민 대표’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도출한 국회연금특위의 개혁 방안이 전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들은 지금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의 미래가 아니라 자신들의 미래 이익을 선택했다. 야당과 노동계는 “현세대의 노후보장이 중요하다”며 즉각 이 선택을 지지하고 나섰다.
다음 세대에 부담을 지우는 정책은 어떤 말로 미화하든 누군가의 돈을 가져가는 것이거나 경제적 자유를 빼앗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단순히 소득이나 자원의 인위적 이전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불신, 불공정, 비효율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을 생각하면 사회 전체로 해악이 훨씬 크다. 나라 곳간을 열어 누군가를 돕자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이웃에 대한 공감과 배려는 평등을 원하는 우리 본성에 대체로 부합한다. 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과 비용은 뒷전이다. 돈을 주자는 정치인도, 그 돈을 받는 국민도 비용은 남의 일이고 나중의 일일 뿐이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자는 주장도 비슷한 범주다. 안전한 삶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핵심은 그 안전을 내 돈으로 도모할 것이냐, 타인의 돈으로 부담하게 할 것이냐의 선택이다.
이제 사람들은 지금보다 잘 사는 데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4만달러, 5만달러 시대를 위한 지적 탐색은 자취를 감췄다. 높은 소득 수준이 요구하는 교양과 품격, 자유와 책임, 경쟁과 혁신이 싫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런 덕성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 탓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