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4월 19일 오전 8시 20분

중국은 한국 석유화학산업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국내 석유화학 제품의 최대 수요처였던 중국이 최대 생산국으로 바뀌면서다. 한국은 이미 구조적인 공급 과잉 국면에 진입했다.

공장을 돌릴수록 적자다. 이미 예견된 일이다. 4년 전에도 중국발 위기에 직면했다. 그때도 국내 석유화학의 양대 축인 LG화학과 롯데케미칼은 통합 카드를 만지작거렸지만 결국 각자도생의 길을 걸었다. 상황은 더 나빠졌다. 파격적인 구조조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답이 없다는 게 전문가들 얘기다. 더 이상 망설이다가는 자칫 석유화학산업 전체가 공멸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확산하고 있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의 NCC 부문을 통합해야 한다는 빅딜론이 업계에서 나오고 있다. LG화학 여수공장(왼쪽)과 롯데케미칼 대산공장의 모습.   한경DB
LG화학과 롯데케미칼의 NCC 부문을 통합해야 한다는 빅딜론이 업계에서 나오고 있다. LG화학 여수공장(왼쪽)과 롯데케미칼 대산공장의 모습. 한경DB

적자 줄이는 다양한 협력안


23일 투자은행(IB)업계와 화학업계에 따르면 롯데케미칼이 적자 상태인 범용 나프타분해설비(NCC) 부문을 통합하는 방안을 LG화학에 제안함에 따라 초기 단계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두 회사가 지역별로 각각 보유한 NCC를 통합해 여수는 LG화학이, 대산은 롯데케미칼이 맡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비효율이 상당 부분 제거될 것으로 이들 회사는 보고 있다.

두 회사는 NCC를 한 곳에 매각하거나 설비를 운용하는 합작사(JV·조인트벤처)를 설립하는 등 석유화학 전체 사업부문을 통합하는 방안도 구상 중이다. 경쟁적인 과잉 투자를 없애고, 정유사에서 나프타 등 원료를 도입할 때도 규모의 경제 효과를 누리겠다는 포석이다. 두 회사가 협력하면 각 사 해외법인의 활용도도 높아질 수 있다. 업계에선 롯데케미칼이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있는 에탄크래커(ECC) 설비에서 생산한 에틸렌을 LG화학이 먼저 공급받아 미국 시장 내 고부가가치 제품 점유율을 늘리는 식의 협력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현재 LG화학과 롯데케미칼은 슬림화 작업을 하고 있다. LG화학은 2조원을 투입해 증설한 여수 NCC 2공장을 가동 2년여 만에 시장에 내놨다. 롯데케미칼은 해외 진출의 상징이던 LC타이탄의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LG화학은 적자를 낸 사업본부의 임직원에겐 성과급을 지급하지 않는 내용의 성과급 개편안도 추진했다. 적자 늪에 빠진 석유화학 사업본부를 직격하는 개편이다. 롯데케미칼도 직원들의 전환 배치를 추진하는 등 고강도 쇄신 작업을 하고 있다.

각사 구조조정 정부가 밀어줘야

중국의 에틸렌 생산 능력은 이미 세계 1위로 올라섰다. 한국의 석유화학제품 중국 수출량은 2019년 1801만t에서 지난해 1470만t으로 18.4% 급감했다. 수출국을 다변화했음에도 한국의 석유화학제품 전체 수출량은 2019년 3797만t에서 지난해 3677만t으로 줄었다.

치솟는 유가도 문제다. 석유화학산업 업황을 보여주는 지표인 에틸렌 스프레드(에틸렌 가격-나프타 가격)는 현재 185달러 수준이다. 일반적으로 에틸렌 스프레드가 300달러 이상일 때 NCC가 흑자를 낸다. 지금은 NCC를 가동할수록 적자가 늘고 있다는 얘기다. 이란과 이스라엘의 분쟁 여파로 유가가 더 오르면 스프레드가 떨어져 수익성은 더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구조조정 빅딜이 현실화하기까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국내 1·2위 NCC 업체 간 통합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가 독과점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이 있다. JV를 세워 당분간 부담을 함께 지더라도 양사가 사업부문을 분할해 합작사에 자산을 양도하는 과정에서 양도차익에 대한 막대한 세금을 내야 할 수도 있다. 1990년대 일본 정부가 특별법을 제정해 가장 먼저 손본 부분도 ‘한계산업은 독과점 심사를 미뤄주겠다’는 파격적인 조치와 일부 면세 혜택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전문가들은 각 기업 주도로 자율적 구조조정을 하되 정부 차원의 지원이 적기에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부와 LG화학, 롯데케미칼, SK지오센트릭, 금호석유화학 등 기업들은 이달 초 ‘석화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 협의체’도 만들기로 했다. 이 협의체를 발판으로 국내 석유화학산업 구조조정 논의가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은 “현재 통합과 관련해 진행 중인 사안은 없다”고 했다. IB업계 관계자는 “시장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만큼 빅딜 논의는 언제든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차준호/박종관/하지은 기자 cha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