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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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서울시향을 거쳐 간 지휘자는 내가 본 사람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유카-페카 사라스테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내가 핀란드 태생의 이 지휘자를 실연으로 처음 본 것은(물론 음반으로는 진작 접했었다) 2013년 10월 24일 서울시향과의 공연이었다. 그때 받은 충격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가운데서도 특히 까다롭기로 소문난 ‘제4번’을, 그는 더블베이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 파트를 세심하면서도 극명하게 분리해 연주했었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의 음향 환경은 그런 해석이 잘 전달될 만한 조건이 아님에도 그랬다.

이후에도 그는 라벨 ‘다프니스와 클로에’(2019년 5월), 브루크너 교향곡 제3번(2022년 9월) 등 공연에서 꾸준히 서울시향을 지휘했고, 이 모두가 준수한 수준 이상이었기에 지난 25일 서울시향 정기공연에 거는 기대는 특히 컸다. 게다가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라면 핀란드 지휘자로서는 눈감고도 지휘할 수 있는 곡이 아니던가. 덴마크 작곡가인 닐센 역시 사라스테 정도 되는 지휘자가 못할 리 없다 싶었다. 나라가 다르더라도 북유럽 음악가들은 다른 북유럽 작곡가들의 음악 역시 제대로 해석해야 마땅하다는 ‘암묵의 룰’ 같은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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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부푼 가슴을 안고 들은 공연이었지만, 첫 순서인 닐센 <가면무도회> 서곡은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서곡 첫머리에 대해 ‘아무리 빨리 연주하더라도 지나치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지만, 이 말은 이 오페라의 정신적 후계자라 할 <가면무도회> 서곡 첫머리에도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서울시향의 연주가 상쾌한 질주와 거리가 있었다는 건 그 자체로는 이해할 만하다. 연주해본 적이 없었던 곡인 만큼 마구 내달리기가 부담스러웠을 터이다. 관현악곡 치고는 유난히 현악기군에 고도의 기교를 요구하는 곡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모든 세부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야 제대로 효과가 나는 곡에서, 이처럼 군데군데 삐걱거린 연주는 그걸 감안하더라도 잘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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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독주를 맡은 아우구스틴 하델리히는 독일계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 바이올리니스트로, 2022년 4월 초에 서울시향과 같은 무대에 섰던 적이 있다. 그때 연주한 곡은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었는데, 당시 내가 받은 인상은 야샤 하이페츠의 후계자라는 것이었다. 20세기 중반을 주름잡았던 바이올린의 전설 하이페츠 못지않게 빼어난 기교를 지녔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기교에 대한 확신과 강한 자의식을 지닌 연주자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번 공연에서도 그런 면모가 없지는 않았지만, 하델리히는 전보다 곡 자체에 충실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앙코르로 연주한 조니 캐시의 ‘오렌지 블라섬 스페셜’에서는 눈이 돌아갈 만큼 휘황찬란한 기교를 보여주었고, 두 번째 앙코르인 카를로스 가르델의 탱고 ‘포르 우나 카베사’(‘머리 하나 차이로’라는 뜻으로, 영화 <여인의 향기>에 사용되어 더욱 유명해졌다)에서는 다채롭고 농밀한 표현력을 보여주었다. 사라스테 역시 오케스트라를 물 흐르듯 이끌어갔지만, 1악장에서는 바이올린과 서로 잘 안 맞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런 문제는 뒤로 갈수록 나아졌지만, 핀란드 지휘자에게서 기대할 만한 수준의 연주는 아니었다. 그 지휘자가 사라스테라면 더욱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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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불만을 안고 들었던 1부였지만, 사라스테는 2부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뛰어난 연주를 이끌어냈다. 아니, 서울시향의 역대 공연을 되짚어 봐도 손꼽을 만큼 휘황찬란한 명연이었다. 사라스테는 자칫 산만하게 들릴 수 있는 닐센의 악상을 대단히 명쾌하게 정리했고, <가면무도회> 서곡에서와는 달리 바이올린을 비롯한 전체 현악기군 중심으로 섬세하게 통제하는 가운데 셈여림을 절묘하게 조절했으며, 모든 파트의 음색을 미려하게 다듬었다. 1악장 후반부 마지막 단락과 2악장 마지막 대목은 특히 웅장했다.

황진규 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