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색으로 가득한 화병 ⓒ이수민
봄의 색으로 가득한 화병 ⓒ이수민
어김없이 봄입니다. 잠시 눈을 들어 자연이 풀어놓은 선물을 즐겨볼까요. 비죽 튀어나온 노란 잔머리 같은 개나리, 콧속을 가득 메우는 매화 향기, 바람에 포르르 흩날리는 연분홍 벚꽃잎까지. 봄에만 느낄 수 있는 설렘과 생명력을 담은 클래식 음악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에이나우디 - 프리마베라

예술사를 통틀어 배부르고 등 따셨던 예술가가 몇이나 될까요. 이탈리아 출신의 현대음악 작곡가 루도비코 에이나우디는 금 수저를 넘은 다이아몬드 수저 예술가입니다. 조부인 루이지 에이나우디는 1948년부터 1955년까지 이탈리아 대통령을 지냈고, 아버지는 유명 출판업자, 본인은 2021년 아카데미상을 받은 ‘더 파더’, ‘노매드랜드’를 포함하여 80편이 넘는 티비 시리즈, 영화음악을 작곡하는 등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은 작곡가입니다.

명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 메인 테마의 집요한 반복, 잔잔하게 흘러가다가 돌연 극적으로 펼쳐지는 전개 등이 그의 음악의 특징입니다. ‘프리마베라’에서도 이 공식이 매력적으로 사용되고 변주됩니다.

곧 칠순을 앞두고 있는 노작곡가는 사진 찍기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완벽한 앵글을 잡아야 하고, 빛을 완벽하게 다뤄야 하는 사진이라는 장르가 작곡에 대한 영감을 가져다준다고 말합니다. 몇 년 후에는 그의 음악과 함께 사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에이나우디 <프리마베라>]

그리그 - 서정 소품집 3권 작품번호 43-6번 '봄에게'

작곡가 그리그는 일생 전반에 걸쳐 피아노를 위한 단편들을 '서정 소품집'이라는 제목 아래 66개 작곡한 후 총 10권으로 나누어 출판했습니다. 자신의 입으로 "이 소품집에 나의 일생의 단면들을 담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일상 중 기억에 남는 순간, 노르웨이 민속 음악, 야상곡 등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담았습니다.

이 서정 소품집으로 인해 그리그는 '피아노 위의 시인'이라는 수식어를 갖고 있는 쇼팽과 견줄 만큼 피아노 독주곡 장르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쇼팽의 감성이 맑은 파란색이라면 그리그의 감성은 진달래색에 가깝습니다. 적당한 온도의 따뜻함을 품고 있죠.

‘봄에게’의 앞부분에서는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처럼 점점이 흩뿌려진 음들이 인상적으로 들립니다. 봄비와 바람을 맞으며 점점 짙어지는 초록을 표현하는 듯 곡의 중반에는 두터운 음 덩어리가 등장하고 이후 편안한 한숨과 함께 곡이 마무리됩니다. 4분여의 짧은 곡이지만 완벽한 기승전결을 가진 이 곡을 봄의 풍경과 함께 즐겨보세요.

[그리그 <서정 소품집 3권 작품번호 43-6> '봄에게' ]

피아졸라 -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아르헨티나 출신 피아졸라. ‘탱고의 황제’라고 불리는 피아졸라의 사계는 그보다 두 세기를 앞서 살았던 비발디의 사계와 종종 비교됩니다. 두 작곡가의 사계를 비교해볼까요.

이미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비발디의 사계는 계절마다 3개 악장씩, 총 12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피아졸라의 곡 역시 4개의 계절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사계절 연작을 염두에 두고 작곡하지는 않았습니다.

피아졸라의 여러 작품에 흩어져 있던 각 계절을 후에 기돈 크레머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발견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라는 제목을 붙여 하나의 모음곡으로 재탄생시켰습니다. 크레머는 편곡자와의 긴밀한 협업을 통해 비발디의 사계에 나오는 주요 멜로디를 피아졸라의 사계 중간중간 삽입했는데 이것이 이 곡만의 매력 포인트입니다.

이처럼 독특한 탄생 과정을 거친 피아졸라의 사계를 듣다 보면 시작과 끝, 생성과 소멸, 기쁨과 슬픔, 풍요와 공허함 등 다양한 감정을 떠올리게 됩니다. 비발디의 사계부터 들은 후 피아졸라의 사계를 들어보세요. 우아한 비발디의 멜로디가 탱고라는 파격적인 옷을 걸치고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비발디 <사계>]

[피아졸라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

베토벤 -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

‘고전주의 시대’ 하면 떠오르는 작곡가가 세 명 있습니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은 동시대를 살며 긴밀하게 소통하고, 서로에게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모차르트 시대에는 현악기가, 베토벤 시대에는 건반악기가 크게 개량되었는데 각자 해당 악기를 위한 곡들을 여러 개 작곡한 것도 재밌습니다.

고전주의 시대 이전의 ‘바이올린 소나타’ 장르 속 피아노 파트는 소극적인 반주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바이올린 멜로디가 돋보이게끔 단순한 화음을 치거나 음 몇 개만을 반복할 뿐이었죠. 하지만 모차르트, 베토벤을 거치며 피아노 파트의 중요도는 바이올린 파트와 동등한 위치까지 끌어올려집니다. 두 악기는 때로는 팽팽하게 맞서고, 때로는 협력하며 곡을 이끌어갑니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5번에는 '봄'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습니다. 후대 사람들이 붙인 것이기에 베토벤의 작곡 의도와는 상관없는 제목이죠. 하지만 새싹처럼 쭉쭉 뻗어나가는 1악장, 따뜻한 봄바람 같은 2악장을 지나 장난꾸러기 토끼들이 연상되는 3악장까지 곡을 듣다 보면 ‘봄’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들이 우리의 머릿속을 지배합니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 ]


유난히 짧았던 작년 봄과는 달리 올해 봄은 제때 찾아와 우리 곁에서 나란히 발맞춰 걷고 있습니다. 그제는 목련의 탐스러움을 눈으로 즐겼고, 어제는 모란의 빳빳한 꽃잎을 만져보았고, 오늘은 아카시아 향기를 맡았습니다. 매일 달라지는 봄의 얼굴을 마주하며 시간의 흐름을 직감적으로 느낍니다. 여러분의 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요.

바이올리니스트 이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