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 투성이' 한국 아파트, 이름만 유럽 명품? [집코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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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청망청
품질은 나빠지는데 이름만 명품인 한국의 아파트
품질은 나빠지는데 이름만 명품인 한국의 아파트
▶전형진 기자
오늘의 사연 읽어볼게요.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빛가람대방엘리움로얄카운티2차에 사는 흥부가 초롱꽃마을6단지GTX운정역금강펜테리움센트럴파크에 사는 놀부에게 편지를 보내서 충북진천음성혁신도시동일하이빌파크테라스로 이사 가는 건 어떤지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놀부는 회천신도시덕계역로제비앙더메트로폴리스가 더 낫다고 답장했네요. 얘들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요.. 여러분은 이해가 되시나요? 과거엔 농담으로 '아파트 이름이 어려워야 시어머니가 못 찾아온다'고 했는데 이젠 너무 어려워서 며느리들도 시댁을 못 찾는 시대입니다. 아파트는 갈수록 하자 투성이에 짓다가 무너지기까지 하는데 왜 이름은 유럽 귀족처럼 점점 휘황찬란해지고 있을까요.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아파트 이름을 개나리, 청실, 은마라고 짓는다고 해서 촌스럽진 않습니다. 충분히 멋있고 예쁘죠. 하지만 재개발·재건축을 하다 보면 조합원들은 옆 동네 단지와 비교하게 되죠. 예컨대 이런 상황이 벌어집니다. 일단 단지명에 기본으로 '프레스티지' 정도는 넣어야 하는데 옆에 산이 있다면 "산도 숲이잖아"의 논리로 '포레스트' 단어가 추가되는 식이죠. 그렇다고 '프레스티지포레스트'는 읽기 어려우니까 '포레스티지' 같은 합성어가 등장하는 것이죠. 이게 2024년 한국식 아파트 작명법입니다. ▶집코노미 주민센터에서 전수조사 자료 다운로드 받기
https://www.hankyung.com/jipconomy-house/
집코노미에서 집계했던 지난 5년치 청약 전수조사 자료를 토대로 한국의 아파트 이름에 어떤 단어가 가장 많이 쓰이는지 순위를 매겨봤습니다. 1위는 '○○역'입니다. 2019년 5월~2024년 3월까지 분양한 2002개 단지 중에 17%의 아파트가 단지명에 역명을 넣었어요. 시대상이 엿볼 수 있는 대목이죠. 그만큼 우리는 철도교통, 특히 지하철/전철의 접근성을 굉장히 중시합니다. 단지명에 역이 들어가 있다면 대개 정말 가까운 편이죠. 2등은 '센트럴', '센트로', '센텀', '센터' 등 '센ㅌ'에서 파생되는 단지명입니다. 261곳이나 이 같은 이름을 썼습니다. 지난 5년 동안 분양한 단지 중에 13%입니다. 동부건설에서 브랜드로 쓰는 센트레빌은 제외하고 집계했는데도 이 정도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게 1등인 줄 알았습니다.
3위는 예상하셨을 '파크'입니다. 주변에 공원이 있으면 단지명에 파크는 기본이죠. 이번에도 아이파크나 아이비파크 같은 브랜드는 제외하고 계산했습니다. '시티'와 '씨티'가 다음 순위이고, 대망의 '포레'는 137곳으로 5위에 올랐습니다. 포레는 포레스트라는 의미입니다. 단지명 '퍼스트'는 언제 쓸까요? '우리가 이 택지지구의 첫 아파트야'라는 의미로 시범단지처럼 붙이기도 하는데, 억지로 '이 동네에 들어서는 첫 번째 제비아파트'라는 의미일 때도 있어요. 다른 아파트는 많지만 어쨌든 제비 브랜드는 처음이란 거죠. '리버'는 강이 깨끗하게 보이지 않고 아주 조금만 관측이 돼도 쓰는 편입니다. '에듀'는 보통 초등학교가 붙어 있어야 쓰죠. '스카이'는 어떨까요? '우리가 이 동네에서 제일 높아'의 의미입니다. '시그니처'는 '마땅히 넣을 게 없군'과도 같습니다. '프리○○'은 '프리미엄', '프리미어'라는 뜻인데 이 시리즈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순위를 쭉 보니 어떤가요? 여기서 그냥 대충 몇 개 조합해서 붙이면 아파트 하나 뚝딱 짓겠죠. 불행 중 다행으로 나름의 체계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흥부네 집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빛가람대방엘리움로얄카운티2차라면 앞의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는 아파트가 들어서는 지역을 말합니다. 신도시 단지들이 보통 이렇게 붙이죠. 빛가람은 또 그 안에서의 세부 지역명, 그러니까 여기까지가 지리적 위치에 대한 해설입니다.
다음 대방엘리움은 대방산업개발의 브랜드죠. 패밀리네임, 성 같은 거예요. 족보를 팔지 않는 이상 이걸 뗄 순 없습니다. 그리고 나오는 로얄카운티, 이게 진짜 이름입니다. 근데 앞에 누가 먼저 썼다면? 사람은 2세, 아파트는 2차가 되는 거죠. 보신 것처럼 안 그래도 넣어야 할 게 많은데 우리 단지까지 멋지게 보이고 싶다 보니까 점점 괴상망측한 아파트 이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서울시는 이런 가이드라인을 만들었습니다. 건설사 사장님들 모아두고 선서를 했어요.
요약하면 ①한글로 좀 씁시다. 신토불이 하자는 거죠. ②법정동과 행정동을 지키자. 신월동에 짓는 아파트 이름에 '목동센트럴' 이러지 말자는 거예요. ③앞서 우리가 순위로 뽑아봤던 목록을 펫네임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쓰지 말자는 겁니다. ④그리고 흥부의 편지지가 넘치니까 10자 이내로 짧게 만들자는 게 마지막입니다.
읽다보니 정말 구구절절 공감되는 권고사항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 말고 안전하고 튼튼한 단지를 짓는 데 집중하는 게 명품 아파트겠죠. 아파트 이름 제발 쉽게 지읍시다
기획·진행 전형진 기자 withmold@hankyung.com
촬영 이재형·이문규 PD 디자인 이지영·박하영
편집 이문규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