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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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전세사기, 보이스피싱, 코인·다단계사기 등 날로 진화하는 사기범죄 근절을 위해 솜방망이 처벌기준을 손본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29일 전체회의를 열고 사기범죄 양형기준 상향을 추진한다. 현행 양형기준이 낮아 ‘솜방망이 처벌’이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많아서다. 사기범죄 양형기준은 2011년 7월 정해진 후 13년째 한 번도 논의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10년 새 사기범죄가 급증하면서 2022년 피해금액은 29조3412억원에 달한다. 반면 사기범죄 고도화와 형사체계 미흡으로 피해자에게 돌려준 회수금액 비중은 3~4%에 머물고 있다.

양형위는 최근 급증하고 있는 보이스피싱 사기 등에 대한 양형 기준을 새로 추가할 예정이다. 지난해 11월 시행된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에 따른 처벌 기준을 반영하는 한편, 하반기에는 권고형량 자체를 높이는 방안을 확정할 계획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양형기준 상향만으로는 사기범죄 근절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서준배 경찰대학 교수는 “처벌 기준 강화와 함께 선제적인 범죄 예방, 피해 최소화를 위한 경보체계 등 전방위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며 “사기대응센터를 만들어 피해금액 회복률을 25%까지 끌어올릴 싱가포르 등 해외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수백억 사기 쳐도 법정 최고형은 15년


#1. 서울 강서·관악구 일대에서 임차인 355명에게 전세 보증금 795억원을 가로챈 ‘세 모녀 전세 사기 사건’ 주범 A씨는 작년 7월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2. 서울 강서·양천구 등지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세 사기인 ‘빌라왕 정모씨’ 사건의 배후로 알려진 부동산 컨설팅 업체 대표는 37명으로부터 80억원을 빼앗고도 최근 상고심에서 징역 8년 형을 확정받았다.

최근 몇 년 새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전세 사기 범죄자에게 내려진 형량은 고작 10~15년 수준에 머문다. 사기죄의 법정최고형이 15년에 그치는 데다 피해 금액이 수백억 원에 달해도 피해자 1명당 피해액을 기준으로 죗값을 가늠하는 법 제도 탓이다. ‘사기 공화국’의 오명을 벗기 위해 사기죄 처벌 규정을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남는 장사’ 된 사기 범죄


28일 검찰청 범죄분석통계에 따르면 2022년 검거된 사기 범죄자는 17만6623명 가운데 재범자는 41.3%(7만2997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재범자 중 45.5%(3만3205명)는 같은 유형의 범죄를 또 다시 저지른 동종 재범자들이다. 동종 재범자 비율은 2019년 39%에서 이듬해 40.1%, 2021년 42.4% 등으로 증가추세다.

같은 사기죄를 다시 저지르는 것은 처벌 규정이 그만큼 약하기 때문이다. 판사가 형량을 정하는 데 참고하는 대법원 양형기준에 따르면 일반 사기의 기본 형량 기준은 사기 금액이 1억원 미만일 때 6개월~1년 6개월, 사기 금액이 1억~5억원은 1~4년이다. 5억~50억원은 3~6년, 50억~300억원은 5~8년이다. 300억원 이상의 경우 기본 6~10년에 다수 피해자 등 가중 요소를 반영하면 최대 19.5년형 가능하지만, 실제 법정 최고형은 15년으로 제한된다.

현행법상 사기 피해 금액이 5억원 이상일 경우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경법)을 적용해 사기 금액이 5억원 이상이면 3년 이상 징역을, 50억원 이상이면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으로 가중처벌할 수 있다. 하지만 다수 피해자에게 동일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도 피해자 1명당 피해 금액을 기준으로 특경법 적용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에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전세 사기 피해자의 보증금 평균 액수가 1억4000만원인 점을 고려하면 특경법을 적용한 강도 높은 처벌은 사실상 어려운 셈이다.

한 형사 전문 변호사는 “다중사기범행의 근절을 위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며 “특경법상 사기 범죄가 지니는 사회적 파급력을 고려해 피해자가 많은 경우 양형 가중요소로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피해 금액 회수율마저 낮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2022년 사기 피해액 29조3412억 중 회수 금액은 1조322억원(3.5%)에 불과했다.

절반만 가중하는 경합범 규정도 손봐야


한 사람이 2개 이상 범죄를 저지른 경우 여러 혐의 중 최고 형량의 최대 절반만 가중하도록 한 경합법 규정도 가중 처벌이 어려운 이유로 꼽힌다. 예컨대 현행법상 최고 형량이 징역 10년인 사기죄의 경우 2개 이상의 범죄를 저질러도 5년을 합산해 법정최고형은 15년이 되는 것이다.

반면 미국의 형법은 형량을 합산하는 방식이다. 범죄 건수에 따라 수백 년의 징역형도 선고할 수 있다. 실제로 2008년 금융 위기 당시 다단계 금융사기를 벌여 650억달러(83조원)의 피해를 준 버나드 메이도프 전 미국 나스닥증권거래소 회장은 2009년 150년형을 선고받고 12년 만에 교도소에서 옥사했다.

한상훈 한국형사법학회 회장은 “현행 경합범의 단순 가중 방식으로는 피해자를 보호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가중처벌 범위의 상한선을 두고 범죄 건수에 따라 형량을 합산하도록 하는 절충 방식 도입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기 검거율 절반으로 ‘뚝’


수사 기관의 수사력 부실도 사기 범죄를 부추기고 있다. 경제범죄에 검찰이 직접 관여할 수 있는 기준을 5억원 이상 고액 사기로 제한한 검·경 수사권 조정(형사소송법·검찰청법 개정안) 이후 이런 현상이 뚜렷해졌다. 검찰의 수사 권한이 축소된 데다 증거자료의 범위도 대폭 줄어든 상황에서 판결을 해야 해서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9년까지 70%대를 유지해온 사기 범죄 검거율은 검·경 수사권 조정이 시행된 2021년 61.4%로, 다음 해 58.9%까지 떨어졌다. 한 검사 출신 정부기관장은 “사기 범죄에 대한 수사기관의 수사 역량이 부족하다는 인식이 퍼질수록 사기 범죄 발생률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형사사법시스템의 위기가 사기범죄를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형법 전문가인 모성준 대전고등법원 판사는 "형사사법시스템이 서서히 작동을 멈추어 가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사기천국이 됐다"고 지적했다. 1953년 형법이 제정된 이래 한 차례도 개정되지 않은 채, 형벌은 포함한 현행법만 1300여 개에 달해 전문가조차 전체 형사법 체계를 이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는 국회의 포퓰리즘 입법으로 '특별법'이 늘어나고 부처마다 각종 '분쟁조정' 조직을 추가한 결과다.

허란/민경진/박시온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