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영수회담
“어린 자식들만 데리고 절간 같은 데서 혼자 사는데 무슨 욕심이 있겠나. 민주화를 해놓고 물러나겠다. 사나이 명예를 걸고 비밀로 해달라.” 1975년 5월 21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영수회담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유신 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자 “내 신세가 (창밖의) 저 새와 같다”며 한 말이다. 그러나 지켜지지 않았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속았다. 인정마저 악용해 사람을 농락했다”고 맹비난하면서 극한 대결로 치달았다.

영수(領袖)는 옷깃과 소매를 뜻한다. 가장 때가 잘 묻고 잘 닳는 부위로, 남의 눈에 잘 띈다는 의미에서 우두머리를 가리킨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 간 만남을 뜻하는 영수회담 용어는 권위주의적인 냄새가 짙다. 성공 사례로는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간 회담에서 나온 의약분업 합의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성공보다 실패 사례가 더 많다. 2005년 9월 노무현 대통령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회담하고 대연정을 제안했다가 거센 역풍을 맞았다.

김대중-이회창 회담도 의약분업을 제외하고 일곱 번 서로 뒤통수를 맞았다는 뜻에서 ‘칠회칠배(七會七背)’란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협조 요청에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가 소고기 협상 관련 사과를 요구하면서 성과 없이 끝났다. 실패 사례가 많은 것은 회담을 합의의 장으로 활용하기보다 지지층과 소속 정당에 “할 말 했다”는 식의 정파용 생색내기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오늘 만난다. 윤 대통령은 약속대로 충분히 경청하고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해 야당에 진솔한 협조와 이해를 구해야 한다. 이 대표는 전리품 챙기듯 ‘1인당 25만원 지원’, 각종 특검법 수용을 압박하는 데 집중해선 안 된다. 의제 제한 없는 대화를 예고해 놓고 법안을 일방 처리하는 식은 곤란하다. 두 사람이 눈앞의 정파적 이해보다 저출생·저성장, 노동·연금 개혁 등 다급한 국가 미래 아젠다를 놓고 진지하게 머리를 맞댄다면 국민의 박수를 받을 것이다.

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