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담장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 [고두현의 인생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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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담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는 17세기 중엽에 등장한 영국 속담이다. 아무리 가까운 이웃 사이라도 서로를 위해 적절한 담장이 있는 게 좋다는 얘기다. 우리 삶과 인간관계에서 ‘아름다운 간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는 명언이기도 하다.
이 말은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의 시에도 나온다. 퓰리처상을 4회나 받은 그는 뉴잉글랜드 지역 농장에서 오랫동안 전원생활을 했다. 봄이 되면 언덕 너머 이웃에 연락해 담장을 복구하곤 했다. 겨울에 언 땅이 서서히 녹으면서 무너진 돌을 다시 쌓는 작업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담장 쪽을 걸으면서 자기편으로 떨어진 돌을 주워 올리며 경계를 확인했다.
이 단순한 일상에서 영감을 얻어 쓴 시가 ‘담장을 고치며(Mending Wall)’다. 1914년 출간된 시집 <보스턴의 북쪽>에 실린 이 시는 ‘가지 않은 길’과 함께 가장 많이 사랑받고 있다. 쉬운 언어로 쓰였지만, 그 속에는 다양한 의미가 함축돼 있다. 1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대, ‘베를린 장벽’ 등 역사적 사건에 자주 등장해 더 큰 명성을 얻었다.
여기에서 ‘담장을 좋아하지 않는 뭔가’는 겨울과 봄의 자연 현상이다. 사냥꾼들이 만든 인위적인 틈과 달리 해마다 반복된다. 어느 날 시인은 우리 사이에 왜 담장이 필요한지 의구심을 갖는다. ‘사실 이곳은 담장이 필요한 곳이 아니네,/ 그쪽은 소나무밭이고 내 쪽은 사과밭이니./ 내 사과나무가 넘어가서/ 솔방울을 따먹을 리 없다고, 난 그에게 말하네.’
그러자 이웃 농부는 오래된 속담을 인용하며 ‘좋은 담장이 좋은 이웃을 만들지요’라고 답한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가 ‘그건/ 소를 키울 때나 필요한 것, 여긴 소가 없잖아요’라며 ‘담장을 좋아하지 않는 뭔가’를 재차 상기시킨다. 누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자연 현상 때문이니 서로 해를 끼칠 일 없는 이웃에서 일부러 담을 쌓을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웃은 돌담을 계속 쌓는다. 그가 ‘양손에 돌을 굳세게 잡고 오는’ 모습이 ‘석기시대 야만인이 무기를 든’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나’의 의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좋은 담장이 좋은 이웃을 만들지요’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시의 결말만 보면 서로 경계를 확실히 해서 분쟁을 없애는 게 좋다는 얘기일 수 있지만, 과정을 보면 담장을 없애는 게 어떻겠느냐는 ‘나’의 생각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 담장을 쌓기 전에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막을지’ 생각해 보자는 합리성까지 겸비했다. 그러나 프로스트의 시는 단순하지 않다. 때론 아주 역설적이다. 말로는 담을 없애자면서 ‘나’의 행동은 그 반대다. 담장 복구를 제안한 것도 ‘나’다. 담장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사실 담장은 구분과 격리, 단절을 의미한다.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라는 점에서 보면 출구 없는 ‘벽’이다. 한편으론 서로의 관계를 부드럽게 유지하도록 돕는 완충재다. 상호 협력과 교섭, 소통의 통로라는 점에서는 또 하나의 ‘문’이다. 이 양면성은 이웃 농부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 사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프로스트가 말한 담장의 의미는 냉전 시대에 서로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행간에 담긴 뜻을 저마다 유리한 쪽으로 해석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생겼을 때는 ‘벽을 허물자’는 서방 측과 ‘벽을 지키자’는 소련 측의 상반된 시각이 맞물려 돌아가기도 했다.
이 시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전쟁 직전의 비상사태를 완화했다. 당시 프로스트는 케네디 대통령의 특사로 소련을 방문해 흐루쇼프 공산당 서기장을 만났다. 88세의 고령에 여독으로 앓아누운 상태에서 그는 흐루쇼프에게 이 시를 들려주며 “두 나라가 스포츠와 과학·예술·민주주의에서 고귀한 경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흐루쇼프는 “평화로운 경제 경쟁을 하자”고 화답했고 얼마 후 양국 관계가 회복됐다. 이듬해 프로스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흐루쇼프는 케네디와 함께 그를 기리는 조사(弔辭)를 썼다.
일본의 성(城)도 중국처럼 높고 견고하다. 오사카성이나 구마모토성 등 일본의 주요 성곽은 거대한 석축으로 요새화돼 있다. 외곽에는 해자(垓字)를 파 이중삼중으로 외부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이와 달리 한국의 담과 석축은 대부분 낮다. 인공적인 석축보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높낮이를 조율한 결과다. 이런 차이는 세 나라의 인지적 특성과 상통한다. 중국과 일본이 철벽 담장을 두른 폐쇄적 문화인 것과 달리 우리는 스스로 높이를 낮춘 개방적 문화를 갖고 있다.
국가 안보와 외교 현장에도 이 같은 담장의 원리가 적용된다. 강자는 담장을 함부로 무너뜨리고 신뢰도 쉽게 깬다. 이들은 늘 담장 밖을 넘본다. 침략의 목적이 담 너머에 있는 뭔가를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약자는 늘 담장 안에 갇혀 지낸다. 무엇을 얻기보다 지키는 일에 안간힘을 쏟는다.
우리와 이웃 사이에도 ‘좋은 담장’이 필요하다. 그러나 담장의 높낮이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와 신(新)중화주의를 꿈꾸는 ‘중국몽(夢)’에 맞서서는 우리 담장을 높여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 일본의 군국주의 회귀 움직임도 경계해야 한다. 그런 한편으로 교역과 협력의 담은 과감하게 낮춰야 한다.
담을 아예 없앨 수는 없다. 담이 너무 높으면 소통이 막히니 서로 높낮이를 맞추는 게 긴요하다. 그런 담장 곁에 있는 경작지에서 서로 존중하며 성장하는 ‘파종의 시간’이 시작된다. 좋은 담이 좋은 이웃을 만드는 것과 같은 원리로 불필요한 담의 높이를 낮출 때 더 좋은 이웃이 생길 수 있다.
고두현 시인 kdh@hankyung.com
이 말은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의 시에도 나온다. 퓰리처상을 4회나 받은 그는 뉴잉글랜드 지역 농장에서 오랫동안 전원생활을 했다. 봄이 되면 언덕 너머 이웃에 연락해 담장을 복구하곤 했다. 겨울에 언 땅이 서서히 녹으면서 무너진 돌을 다시 쌓는 작업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담장 쪽을 걸으면서 자기편으로 떨어진 돌을 주워 올리며 경계를 확인했다.
이 단순한 일상에서 영감을 얻어 쓴 시가 ‘담장을 고치며(Mending Wall)’다. 1914년 출간된 시집 <보스턴의 북쪽>에 실린 이 시는 ‘가지 않은 길’과 함께 가장 많이 사랑받고 있다. 쉬운 언어로 쓰였지만, 그 속에는 다양한 의미가 함축돼 있다. 1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대, ‘베를린 장벽’ 등 역사적 사건에 자주 등장해 더 큰 명성을 얻었다.
‘베를린 장벽’ 생길 때도 화제
45행으로 이뤄진 시의 첫 구절은 이렇다. ‘담장을 좋아하지 않는 뭔가가 여기 있어,/ 담 아래 언 땅을 부풀게 하고,/ 햇살에 녹으면 위쪽 돌들을 무너뜨려,/ 두 사람도 너끈히 지나갈 틈을 만드는./ 사냥꾼들이 낸 틈과는 다르지.’여기에서 ‘담장을 좋아하지 않는 뭔가’는 겨울과 봄의 자연 현상이다. 사냥꾼들이 만든 인위적인 틈과 달리 해마다 반복된다. 어느 날 시인은 우리 사이에 왜 담장이 필요한지 의구심을 갖는다. ‘사실 이곳은 담장이 필요한 곳이 아니네,/ 그쪽은 소나무밭이고 내 쪽은 사과밭이니./ 내 사과나무가 넘어가서/ 솔방울을 따먹을 리 없다고, 난 그에게 말하네.’
그러자 이웃 농부는 오래된 속담을 인용하며 ‘좋은 담장이 좋은 이웃을 만들지요’라고 답한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가 ‘그건/ 소를 키울 때나 필요한 것, 여긴 소가 없잖아요’라며 ‘담장을 좋아하지 않는 뭔가’를 재차 상기시킨다. 누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자연 현상 때문이니 서로 해를 끼칠 일 없는 이웃에서 일부러 담을 쌓을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웃은 돌담을 계속 쌓는다. 그가 ‘양손에 돌을 굳세게 잡고 오는’ 모습이 ‘석기시대 야만인이 무기를 든’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나’의 의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좋은 담장이 좋은 이웃을 만들지요’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시의 결말만 보면 서로 경계를 확실히 해서 분쟁을 없애는 게 좋다는 얘기일 수 있지만, 과정을 보면 담장을 없애는 게 어떻겠느냐는 ‘나’의 생각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 담장을 쌓기 전에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막을지’ 생각해 보자는 합리성까지 겸비했다. 그러나 프로스트의 시는 단순하지 않다. 때론 아주 역설적이다. 말로는 담을 없애자면서 ‘나’의 행동은 그 반대다. 담장 복구를 제안한 것도 ‘나’다. 담장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사실 담장은 구분과 격리, 단절을 의미한다.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라는 점에서 보면 출구 없는 ‘벽’이다. 한편으론 서로의 관계를 부드럽게 유지하도록 돕는 완충재다. 상호 협력과 교섭, 소통의 통로라는 점에서는 또 하나의 ‘문’이다. 이 양면성은 이웃 농부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 사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프로스트가 말한 담장의 의미는 냉전 시대에 서로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행간에 담긴 뜻을 저마다 유리한 쪽으로 해석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생겼을 때는 ‘벽을 허물자’는 서방 측과 ‘벽을 지키자’는 소련 측의 상반된 시각이 맞물려 돌아가기도 했다.
이 시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전쟁 직전의 비상사태를 완화했다. 당시 프로스트는 케네디 대통령의 특사로 소련을 방문해 흐루쇼프 공산당 서기장을 만났다. 88세의 고령에 여독으로 앓아누운 상태에서 그는 흐루쇼프에게 이 시를 들려주며 “두 나라가 스포츠와 과학·예술·민주주의에서 고귀한 경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흐루쇼프는 “평화로운 경제 경쟁을 하자”고 화답했고 얼마 후 양국 관계가 회복됐다. 이듬해 프로스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흐루쇼프는 케네디와 함께 그를 기리는 조사(弔辭)를 썼다.
교역·협력의 담은 과감히 낮춰야
우리 이웃 나라들은 어떤가. 중국의 담장은 유난히 높다. 전통 가옥은 철옹성 같은 담장 외에 대문 안에서도 내부를 볼 수 없게 조벽(照壁)을 세운다. 자금성의 붉은 담은 평균 높이 11m에 이르고, 만리장성 길이는 6000㎞나 된다.일본의 성(城)도 중국처럼 높고 견고하다. 오사카성이나 구마모토성 등 일본의 주요 성곽은 거대한 석축으로 요새화돼 있다. 외곽에는 해자(垓字)를 파 이중삼중으로 외부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이와 달리 한국의 담과 석축은 대부분 낮다. 인공적인 석축보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높낮이를 조율한 결과다. 이런 차이는 세 나라의 인지적 특성과 상통한다. 중국과 일본이 철벽 담장을 두른 폐쇄적 문화인 것과 달리 우리는 스스로 높이를 낮춘 개방적 문화를 갖고 있다.
국가 안보와 외교 현장에도 이 같은 담장의 원리가 적용된다. 강자는 담장을 함부로 무너뜨리고 신뢰도 쉽게 깬다. 이들은 늘 담장 밖을 넘본다. 침략의 목적이 담 너머에 있는 뭔가를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약자는 늘 담장 안에 갇혀 지낸다. 무엇을 얻기보다 지키는 일에 안간힘을 쏟는다.
우리와 이웃 사이에도 ‘좋은 담장’이 필요하다. 그러나 담장의 높낮이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와 신(新)중화주의를 꿈꾸는 ‘중국몽(夢)’에 맞서서는 우리 담장을 높여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 일본의 군국주의 회귀 움직임도 경계해야 한다. 그런 한편으로 교역과 협력의 담은 과감하게 낮춰야 한다.
담을 아예 없앨 수는 없다. 담이 너무 높으면 소통이 막히니 서로 높낮이를 맞추는 게 긴요하다. 그런 담장 곁에 있는 경작지에서 서로 존중하며 성장하는 ‘파종의 시간’이 시작된다. 좋은 담이 좋은 이웃을 만드는 것과 같은 원리로 불필요한 담의 높이를 낮출 때 더 좋은 이웃이 생길 수 있다.
고두현 시인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