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는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의 어린 시절 경험담을 담은 자전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청소년들의 자살이 사회문제로 부각한 시기인 19세기 말 독일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변사체로 발견된 19세기 독일 청년과 한국의 '입시 지옥'
독일 조그만 시골 마을의 한스 기벤라트는 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다. 한스는 눈에 띄는 영특함으로 마을의 주목을 한꺼번에 받는 존재이다. 당시는 라틴어 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최고로 생각하던 때라, 마을의 기대는 한스에게 쏠린다. 한스와 같이 부유하지 않으면서 재능이 있는 아이들에게는 주(州) 시험에 합격해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거나, 대학 강단에 서는 것이 성공의 길이었다.

한스는 시험에서 2등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둬 당당히 신학교에 합격한다. 치열한 경쟁 속의 신학교 생활에서 앞서 나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던 한스는, 자신과는 성향이 전혀 다른 한 소년을 만난다. 헤르만 하일너. 그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신학교의 강제적인 분위기의 학업보다는 낭만적인 시인이 되고자 하는 소년이다. 급기야 한스는 그를 선망하고, 스스로 삶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한스와 하일너의 우정은 깊어 간다.

하지만 결국 하일너는 학교와의 갈등과 억압에 대해 저항하다 퇴교당한다. 그간 학교 공부를 등한시했던 한스는 하일너가 퇴교당한 후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모든 것에 자신감을 잃는다. 그리고 급기야 건강까지 나빠진다. 신학교의 냉대도 그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하는 데 한몫을 한다. 한때 마을의 자랑이었던 한스는 학교생활에 실패하고 돌아와 고향에서 아무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방황한다.

자살까지 염두에 두었던 그는 어느 날 과즙을 짜는 마을 축제에서 친척 집을 방문한 엠마라는 소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엠마는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한스를 데리고 논 것뿐이었다. 이후 한스는 기계 공장 수습공으로 일하지만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 어느 날 동료와 술을 진탕 마신 한스는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고 다음 날 아침, 강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 Unterm Rad (Beneath the Wheel) > / 출처: 독일 유튜브 영상
< Unterm Rad (Beneath the Wheel) > / 출처: 독일 유튜브 영상
어두운 밤, 불을 끄고 한스의 기억을 추억해 본다. 어린 시절 읽은 책이고 내용이 슬픈 느낌이 묻어나는데 여전히 세상을 짓누르는 이야기다. 교육 전반이 대학 진학에 초점을 맞춘 '입시 지옥'에 빠져들어 드라마 <오징어 게임>처럼 무한 경쟁에 내몰렸다는 지적은 이제 신물 난다. 펜을 들어 죽은 한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본다.

이곳에 없는 한스에게

네가 있는 그곳은 행복하니?

혹시 그곳에서도 호머의 <일리아드>를 배운다면 이번에는 공부라 생각하지 말고 즐거워하며 시를 음미했으면 좋겠다.

좀 더 씩씩하게 나가지 그랬어. 좀 더 너의 의견을 펼치면 좋았을 것을. 너를 짓누르던 수레바퀴를 내가 들어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미안함에 눈물이 멈추질 않아.

하지만 한스야, 우리 제도권의 모든 상황을 부정하지는 말자. 어차피 모두를 만족시키는 이상적인 제도는 없으니 말이야. 획일화된 제도권 내에 서 억눌린다 해도, 결국 네 영혼을 지배할 수 있는 건 너 자신뿐이야. 초월해야 할 대상은 사회 구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인 거지. 이름있는 학교 출신으로 높은 지위를 얻는 것을 가문의 영광이라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을 살다가 남기고 가는 내용물이야. 그게 바로 진정한 명문(名門)의 의미 아니겠니?

우리 이제, 죽은 시인의 시체를 다시 꺼내어 과거를 노래하는 것보단, 오늘의 발전과 내일의 꿈을 이야기하자. 바르지 않은 전통은 고쳐 나가고, 지켜야 할 전통은 존중하면서 말이야. 허상의 ‘죽은 시인의 사회’를 허물고 참된 가치의 ‘살아 있는 시인의 사회’를 가꾸어 나가고 싶어.

한스야, 나와 함께해 주겠니.


편지를 쓴 후 씁쓸한 기분이 들어 대치동 밤거리로 운전한다. 학원에 다니는 아이를 태우러 몇 번을 왔던 곳인가? 한스가 안쓰럽고 그리워진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또 다른 수많은 한스들도. 한국에서 몇십 년에 걸쳐 계속 이어진 사교육과의 전쟁은 도무지 쉽게 끝이 날 것 같지 않다.

“됐어, (됐어)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 (족해) 족해, (족해) 내 사투로 내가 늘어놓을래. 매일 아침 일곱 시 삼십 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고 덥석 모두를 먹어 삼킨 이 시꺼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1994년도에 나온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는 한국의 교육 문제들을 그대로 드러낸 노래였다. 하지만 그와 같은 외침은 들리지 않았다는 듯이, 학생들 머리 위에 머물고 있는 먹구름은 여전하다. 그 사이 전국 구백만 아이들만 학령인구 감소로 쪼그라들었을 뿐이다. 한국 경제는 1960년대 이래 30년 이상, 평균 성장률 8%대에 이르는 고도 성장을 이어갔다.

그 고속 성장을 지속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바로 교육이었다. 높은 교육열이 선진기술을 빠른 속도로 흡수하게 만들었고, 물적 자본의 투자도 유도하였다. 초등 교육도 제대로 이수하지 못하는 빈곤국에서는 교육이 경제성장의 중요한 토대라고 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교육을 통해 인적 자본을 쌓아 나가는 것은 분명히 개발경제학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교육과 경제성장의 관계가 비례적이기만 한지는 좀 더 분명한 견해가 필요한 시점이다.

인적자본론을 주장한 노벨 경제학자 슐츠(T.W. Shultz)는 개발도상국 문제 고찰을 통해 이에 접근했다. 그는 교육은 국가재정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투자활동’이라고 보았다. 교육을 통해 국민의 능력과 학력을 신장시켜 개인은 계층 상승, 국가는 생산성 증대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경제적으로 가치 있는 지식, 기능, 능력 등을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다면 개인의 역량은 늘어난다. 그러면, 국가 전체적인 성장에 득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시각이 있다. 특히 지식 전수 위주 고등교육과의 관계에서이다. 만약 교육이 근로자의 생산성에 아무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고, 단지 사용자들이 근로자를 고용하는 과정에서 좀 더 능력 있어 보이는 사람을 뽑는 데 이용될 뿐이라면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를 보고 많은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학교가 비판적 사고와 창의성을 지닌 학생을 길러내기보다는 규율과 시간 엄수, 매너리즘을 가르치는 장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뿐일까. 공교육이 사회적, 경제적 변화나 혁신을 위한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없다면, 교육 수준에 따른 경제성장 관계는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세계은행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하버드 대학 경제학과 랜트 프릿쳇(Lant Pritchett) 교수는 <교육은 전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1960년에서 1987년에 걸쳐 여러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교육과 경제성장 간의 관계를 분석한 내용이다. 랜트 프릿쳇 교수는 이 논문을 통해, 교육 수준이 높아진다고 경제성장이 빨라진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스위스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산업화한 나라 중 하나이다. 하나, 대학 진학률은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다른 부자 나라 대학 진학률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가장 큰 차이는 구성원 개인의 교육 수준이 얼마나 높은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각 개인을 잘 아울러서 높은 생산성을 지닌 집단으로 조직화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교육은 중요하지만, 고등교육과 같은 높은 교육 수준이 항상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한 나라가 번영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개인의 교육 수준에 전적으로 달려 있지는 않다. 생산성 높은 산업 활동에 개인들을 조직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사회 전체의 능력이 더욱 중요하다.

최근 한국에서 현행 교육제도와 경제성장 간의 문제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나오는 이유다. 현재의 교육제도로 이제는 과거와 같은 경제성장의 원동력 역할을 기대할 수 없다. 미래의 성장 동력을 위해 창조적 인적 자본 육성에 집중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정보화 개방화 시대가 요구하는 교육은 모두가 똑같아지는 교육이 아니라, 다양성을 인정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오히려 높은 교육열이 경쟁 비용을 높이고 노동시장과 자원 배분을 왜곡시켜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문제도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 Unterm Rad (Beneath the Wheel) > / 출처: 독일 유튜브 영상
< Unterm Rad (Beneath the Wheel) > / 출처: 독일 유튜브 영상
정부의 의대 증원 발표에 학원가가 술렁인다. 재수생, 직장인 할 것 없이 너도나도 아귀다툼이다. 우리는 여전히 수많은 한스의 모습을 마주하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지방소멸(수도권 집중), 초저출산, 초고령화는 수많은 한스를 만들어 낸 우리의 자화상이라 하겠다.

조원경 UNIST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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