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 아들은 자신을 그려준다는 아빠에게 도망치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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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한이수의 길 위의 미술관
② 박수근이 살던 창신동 집
박수근 가족의 기적같은 해후
② 박수근이 살던 창신동 집
박수근 가족의 기적같은 해후
식당으로 변한 박수근의 집에서 우측으로 보면 서울 동대문 문구 완구 도매 종합시장 골목이다. 이곳은 우리나라 완구의 집산지이다. 모든 장난감과 팬시용품, 학용품들이 모여 있다. 둘러보기만 해도 재미있다. 어릴 적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장난감들이 주인을 기다린다.
나도 이곳에 참 많이도 들렸다. 집에서 문방구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주로 영등포 시장과 동대문 완구 백화점에서 물건을 해 나르셨다. 마땅한 운반 도구가 없어 머리에 이고서 용품들을 대방동 가게까지 날랐다. 군 제대 후 복학하기 전, 나도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이 골목을 자주 들락거렸다.
요즘도 가끔 이 골목을 찾는다. 박수근의 흔적을 살피느라고 많이 오지만, 수년 전 사진에 관심이 많을 때는 앨범을 사러 오기도 하고, 딸에게 준다고 인형과 장난감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이곳을 진심으로 많이 찾는 이유는 어지러운 세상사에서 조금이라도 생각의 여유를 느끼고 싶어서이다. 마음의 무거운 것들이 해제되는 동네, 유년의 기억을 소환하는 곳이다. 사놓고 보면 큰 쓸모가 없어도, 재미로 사게 되는 곳이니 한 번씩 둘러보시기를 권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서울의 주요 거점에 지방으로 내려가는 버스 터미널이 있었다. 동대문 밖 교통의 요지, 1968년 전차 운행이 폐지되자, 전차의 동대문 종점 옆 차고지였던 이곳에 군산, 경주, 울산 내려가는 동대문 고속버스터미널이 있었다. 지금의 ‘JW 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 호텔’이 있는 곳이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갈 때는 모두가 설렌다. 고향에 가면 서울에서 왔다고 맞아주는 사람들에게 볼펜 한 자루라도 주어야 했다. 국민볼펜 모나미 153. 그래서 동대문터미널 부근에 볼펜 장사가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주변의 민가들 틈으로 연탄 가게, 쌀가게들이 있었는데 그 사이로 볼펜과 공책 등 문구시장이 형성되더니 완구류, 펜시 도매상들이 생기게 되어 '동대문 문구 완구 도매 종합시장'이 형성되었다. 박수근은 규칙적인 사람이었다. 오전 10시부터 4시까지 자기 집 마루를 화실 삼아 그림을 그렸다. 4시 이후에는 시내 반도화랑에 들러 자신의 그림이 판매되었는지 확인하고, 일이 없을 때는 창신동 집 주변을 산책하며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렸다.
그가 그린 창신동 그림을 보자. 집 옆, 분명히 '완구 도매 시장'으로 가는 길인데 하천이 흐른다. 박수근의 집 '낭만낙지'에서 보면 우측 길이다. 완구 시장 골목을 따라 흐르던 물길이 복개된 것이다. 이 물은 어디에서 내려오는 것일까? 흥인지문 옆 산길 따라 내려와 이곳을 지나 청계천으로 흘러갔다. 인근 상인들에게 물어보니 복개된 천의 이름이 '복지천'이라고 한다.
그림을 자세히 보니 집 왼쪽으로 십자가가 보인다. 박수근이 다녔던 동신교회이다. 집 왼쪽에 천이 있었다면 오른쪽 골목을 지나면 동신교회가 나온다.
1956년에 설립된 교회의 역사로 미루어볼 때 박수근이 이곳에 둥지를 튼 1953년 후, 몇 년 지나 생긴 교회이다. 모태신앙인 박수근은 아내와 함께 집에서 가까운 동신교회를 다녔다. 이곳에 살 때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진이 낭만낙지 가게 앞에 붙어있다. 박수근이 런닝 차림으로 마루에 앉아 있다. 두 손을 깍지 끼고 무릎을 세운 모습. 좌식으로 생활할 때는 다들 이렇게 앉았다. 이 마루는 박수근의 작업실이자 가족들의 놀이터였다. 지금은 수십억을 호가하는 그림들이 그야말로 '무방비'로 마루에 놓여 있다.
안방에는 부부와 자녀 합, 여섯 명이 모여 살았고, 마루 건넌방에는 처남 식구, 동생 식구 등이 10년 동안 거쳐 갔다. 마당 가운데 수돗가에서 박수근은 커다란 등을 구부리고 앉아 붓을 빨았다. 그 옆에서 아이들은 깔깔대며 물장난을 쳤다. 그렇게 그들은 이곳에서 10년을 오순도순 살아갔다. 박수근의 고향은 강원도 양구, 그는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 온 것일까?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과거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수근은 1940년 김복순과 결혼하고 평양에서 살림을 차렸다. 광복 후에는 처가가 있는 금성에서 중학교 미술 선생을 했다. 이곳에서 박수근 부부는 해방 후 혼란기에 민주당 대의원 활동했다. 공산당원들에게 좋게 보이지 않았다.
6·25 전쟁이 일어났다. 처음에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국군이 미군의 도움으로 북진했다. 이때 국군 환영 포스터를 제작한 이력으로 1·4후퇴기, 국군이 밀리고 북한군이 밀려오자, 박수근은 청산 대상 1순위의 수배자가 되었다. 38선 인근인 금성과 박수근의 고향인 양구는 치열한 격전지였다. 그는 할 수 없이 북한군의 수배를 피해 가족을 남기고 단신으로 내려왔다. 함께 민주당 대의원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총살당하는 것을 보고 김복순 여사도 아이들과 시동생 가족을 데리고 월남했다. 월남 후 박수근은 군산에서 부두 노동자로 일을 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발붙일 곳 없는 그는, 창신동에서 터 잡은 작은 처남 김영근의 집으로 향했다. 아마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그를 처남의 집으로 행하게 했을 것이다. 북에 남겨둔 아내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밤마다 베개를 적셨다. 아내 김복순은 남편의 생사를 모른 채, 사선을 뚫고 서울에서 김 서방 찾듯 물어물어 동생 김영근의 집으로 찾아온다.
서로의 관심과 사랑으로 창신동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일말의 기대도 없는 뜻밖의 해후에 부부는 서로 한동안 바라보고 눈물만 흘렸다. 생사를 알 수 없던 가족을 만나 보금자리를 꾸린 곳, 그러기에 창신동은 박수근과 그의 가족에게는 고향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림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창신동과 이곳 사람의 모습은 그래서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애틋하게 만든다.
이곳에서 박수근은 온 힘을 다해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전쟁 통에 누가 그림을 사겠는가? 옥수수와 보리쌀을 배급받아 겨우 끼니를 연명했지만, 가정에는 평화가 흘렀다. 생활이 핀 것은 화방 주인 이승우의 도움으로 미 8군 PX(현재 신세계 백화점)의 초상화부에 들어갔을 때부터이다. 이곳에서 돈을 벌어 1953년 35만 환을 모아 집을 마련했다. 청계천 변에 끝없이 이어졌던 판잣집에 비하면 대궐 같은 기와집이었다.
그들의 알콩달콩한 삶은 장녀 박인숙의 글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그는 그림을 그리다가 무료해지면 하모니카를 꺼내 들었다. 그의 레퍼토리는 '뻐꾸기 왈츠'와 '다뉴브강의 잔물결'. 박인숙은 아버지의 '뻐꾸기 왈츠' 곡조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독일민요 '다뉴브강의 잔물결'은 동해에 몸을 던진 윤심덕의 ‘사의 찬미’의 곡조로 차용된 곡이다. 음악의 정보도 미미하던 시절, 소학교 졸업이 전부인 박수근은 '다뉴브강의 잔물결'이 아니라 늘 라디오 전파를 탔던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불렀을 것이다. 애잔한 하모니카 소리가 창신동 가난한 이웃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박수근이 진정 사랑했던 것은 그림과 가족이다. 사선을 넘어 구사일생으로 가족을 만나 이곳 창신동에서 보금자리를 일궜으니, 그에게 필요한 것은 가족이 먹을 조금의 양식과 그림을 그릴 환경이면 족했을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가족의 그림을 많이도 남겼다. 자녀는 그의 단골 모델이었다. 고수머리를 한 장난꾸러기 어린이는 장남 박성남이다. 전쟁통에 자녀를 잃은 연유로 해서 혹시 똑같은 일이 생길까 봐 그림으로라도 아들의 모습을 남기고자 했다. 아들은 아버지 그림이 사람의 모습과 같지 않다고 도망 다녔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데려다 앉혀 놓고 몇 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장녀 박인숙은 수십 년후 학교에서 미술 교사를 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작품 <아기 업은 소녀>가 자신을 그린 그림이라고 제자들에게 말하면 제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독서하는 소녀, 아기를 업고 절구질하는 그림들이 다 장녀 박인숙을 그린 그림이다.
그가 얼마나 자녀들을 사랑했는지,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책 한 권이 귀하던 시절, 부잣집 아이들은 전쟁통에도 그림책을 보며 살았다. 끼니도 잊지 못하는데 무슨 그림책이 있었겠는가. 직접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 엮으니 훌륭한 그림책이 되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귀한 그림책이 어디에 있을까? 경매장 호가만 따지면 수십억 원의 그림책이다.
창신동 집에는 파란 눈의 손님들도 자주 왔다. 박수근은 지금의 명동 반도 호텔 1층 화랑에서 그림을 전시하고 판매도 했다. 반도화랑은 이대원 선생님이 운영하였는데, 화랑에서 손님들이 전시된 그림을 보다가 작가의 다른 그림을 더 보고 싶다면 직접 손님들과 함께 창신동 집까지 왔다. 손님이 마을 어귀까지 오면 아이들은 마루 옆 부엌에 숨죽이고 있었다. 가난하고 헐벗은 조국의 못난 모습을 거침없이 그렸던 화가를 오히려 외국인 구매자들은 좋아했다. 그림 속 주제는 우리에게는 아픈 역사였지만 파란 눈의 갤러리들은 이 그림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중에 주 고객이던 마거릿 밀러 여사는 '한국의 서정을 그만큼 성실히 표현한 작가는 없습니다.'(박인숙 <내 아버지 박수근> 삼인, 163p)라고 말하며 박수근의 그림을 많이 구매했다. 창신동 집은 박수근에게는 화실이었고, 가족들에게는 보금자리였으며, 외국인에게는 좋은 작품을 많이 건질 수 있는 갤러리였다.
그런데 문제가 불거졌다. 1962년 도시계획에 의해 집 앞에 도로가 나면서 집의 절반을 나라에 내놓아야 했다. 지금처럼 충분한 보상도 기대할 수 없던 시절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땅 주인은 따로 있었다. 땅 임자가 있는 상태에서 박수근은 집만 소유한 것이다. 땅 주인은 매각을 원했지만 박수근은 입장이 난처했다. 당장 갈 곳도 없었다. 소송까지 갔지만 박수근의 패배로 끝났다.
결국 땅 주인이 집 철거를 요구하는 바람에 1963년에 전농동으로 이사할 수 밖에 없었다.
한이수 칼럼니스트
나도 이곳에 참 많이도 들렸다. 집에서 문방구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주로 영등포 시장과 동대문 완구 백화점에서 물건을 해 나르셨다. 마땅한 운반 도구가 없어 머리에 이고서 용품들을 대방동 가게까지 날랐다. 군 제대 후 복학하기 전, 나도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이 골목을 자주 들락거렸다.
요즘도 가끔 이 골목을 찾는다. 박수근의 흔적을 살피느라고 많이 오지만, 수년 전 사진에 관심이 많을 때는 앨범을 사러 오기도 하고, 딸에게 준다고 인형과 장난감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이곳을 진심으로 많이 찾는 이유는 어지러운 세상사에서 조금이라도 생각의 여유를 느끼고 싶어서이다. 마음의 무거운 것들이 해제되는 동네, 유년의 기억을 소환하는 곳이다. 사놓고 보면 큰 쓸모가 없어도, 재미로 사게 되는 곳이니 한 번씩 둘러보시기를 권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서울의 주요 거점에 지방으로 내려가는 버스 터미널이 있었다. 동대문 밖 교통의 요지, 1968년 전차 운행이 폐지되자, 전차의 동대문 종점 옆 차고지였던 이곳에 군산, 경주, 울산 내려가는 동대문 고속버스터미널이 있었다. 지금의 ‘JW 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 호텔’이 있는 곳이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갈 때는 모두가 설렌다. 고향에 가면 서울에서 왔다고 맞아주는 사람들에게 볼펜 한 자루라도 주어야 했다. 국민볼펜 모나미 153. 그래서 동대문터미널 부근에 볼펜 장사가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주변의 민가들 틈으로 연탄 가게, 쌀가게들이 있었는데 그 사이로 볼펜과 공책 등 문구시장이 형성되더니 완구류, 펜시 도매상들이 생기게 되어 '동대문 문구 완구 도매 종합시장'이 형성되었다. 박수근은 규칙적인 사람이었다. 오전 10시부터 4시까지 자기 집 마루를 화실 삼아 그림을 그렸다. 4시 이후에는 시내 반도화랑에 들러 자신의 그림이 판매되었는지 확인하고, 일이 없을 때는 창신동 집 주변을 산책하며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렸다.
그가 그린 창신동 그림을 보자. 집 옆, 분명히 '완구 도매 시장'으로 가는 길인데 하천이 흐른다. 박수근의 집 '낭만낙지'에서 보면 우측 길이다. 완구 시장 골목을 따라 흐르던 물길이 복개된 것이다. 이 물은 어디에서 내려오는 것일까? 흥인지문 옆 산길 따라 내려와 이곳을 지나 청계천으로 흘러갔다. 인근 상인들에게 물어보니 복개된 천의 이름이 '복지천'이라고 한다.
그림을 자세히 보니 집 왼쪽으로 십자가가 보인다. 박수근이 다녔던 동신교회이다. 집 왼쪽에 천이 있었다면 오른쪽 골목을 지나면 동신교회가 나온다.
1956년에 설립된 교회의 역사로 미루어볼 때 박수근이 이곳에 둥지를 튼 1953년 후, 몇 년 지나 생긴 교회이다. 모태신앙인 박수근은 아내와 함께 집에서 가까운 동신교회를 다녔다. 이곳에 살 때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진이 낭만낙지 가게 앞에 붙어있다. 박수근이 런닝 차림으로 마루에 앉아 있다. 두 손을 깍지 끼고 무릎을 세운 모습. 좌식으로 생활할 때는 다들 이렇게 앉았다. 이 마루는 박수근의 작업실이자 가족들의 놀이터였다. 지금은 수십억을 호가하는 그림들이 그야말로 '무방비'로 마루에 놓여 있다.
안방에는 부부와 자녀 합, 여섯 명이 모여 살았고, 마루 건넌방에는 처남 식구, 동생 식구 등이 10년 동안 거쳐 갔다. 마당 가운데 수돗가에서 박수근은 커다란 등을 구부리고 앉아 붓을 빨았다. 그 옆에서 아이들은 깔깔대며 물장난을 쳤다. 그렇게 그들은 이곳에서 10년을 오순도순 살아갔다. 박수근의 고향은 강원도 양구, 그는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 온 것일까?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과거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수근은 1940년 김복순과 결혼하고 평양에서 살림을 차렸다. 광복 후에는 처가가 있는 금성에서 중학교 미술 선생을 했다. 이곳에서 박수근 부부는 해방 후 혼란기에 민주당 대의원 활동했다. 공산당원들에게 좋게 보이지 않았다.
6·25 전쟁이 일어났다. 처음에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국군이 미군의 도움으로 북진했다. 이때 국군 환영 포스터를 제작한 이력으로 1·4후퇴기, 국군이 밀리고 북한군이 밀려오자, 박수근은 청산 대상 1순위의 수배자가 되었다. 38선 인근인 금성과 박수근의 고향인 양구는 치열한 격전지였다. 그는 할 수 없이 북한군의 수배를 피해 가족을 남기고 단신으로 내려왔다. 함께 민주당 대의원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총살당하는 것을 보고 김복순 여사도 아이들과 시동생 가족을 데리고 월남했다. 월남 후 박수근은 군산에서 부두 노동자로 일을 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발붙일 곳 없는 그는, 창신동에서 터 잡은 작은 처남 김영근의 집으로 향했다. 아마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그를 처남의 집으로 행하게 했을 것이다. 북에 남겨둔 아내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밤마다 베개를 적셨다. 아내 김복순은 남편의 생사를 모른 채, 사선을 뚫고 서울에서 김 서방 찾듯 물어물어 동생 김영근의 집으로 찾아온다.
서로의 관심과 사랑으로 창신동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일말의 기대도 없는 뜻밖의 해후에 부부는 서로 한동안 바라보고 눈물만 흘렸다. 생사를 알 수 없던 가족을 만나 보금자리를 꾸린 곳, 그러기에 창신동은 박수근과 그의 가족에게는 고향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림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창신동과 이곳 사람의 모습은 그래서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애틋하게 만든다.
이곳에서 박수근은 온 힘을 다해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전쟁 통에 누가 그림을 사겠는가? 옥수수와 보리쌀을 배급받아 겨우 끼니를 연명했지만, 가정에는 평화가 흘렀다. 생활이 핀 것은 화방 주인 이승우의 도움으로 미 8군 PX(현재 신세계 백화점)의 초상화부에 들어갔을 때부터이다. 이곳에서 돈을 벌어 1953년 35만 환을 모아 집을 마련했다. 청계천 변에 끝없이 이어졌던 판잣집에 비하면 대궐 같은 기와집이었다.
그들의 알콩달콩한 삶은 장녀 박인숙의 글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그는 그림을 그리다가 무료해지면 하모니카를 꺼내 들었다. 그의 레퍼토리는 '뻐꾸기 왈츠'와 '다뉴브강의 잔물결'. 박인숙은 아버지의 '뻐꾸기 왈츠' 곡조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독일민요 '다뉴브강의 잔물결'은 동해에 몸을 던진 윤심덕의 ‘사의 찬미’의 곡조로 차용된 곡이다. 음악의 정보도 미미하던 시절, 소학교 졸업이 전부인 박수근은 '다뉴브강의 잔물결'이 아니라 늘 라디오 전파를 탔던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불렀을 것이다. 애잔한 하모니카 소리가 창신동 가난한 이웃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박수근이 진정 사랑했던 것은 그림과 가족이다. 사선을 넘어 구사일생으로 가족을 만나 이곳 창신동에서 보금자리를 일궜으니, 그에게 필요한 것은 가족이 먹을 조금의 양식과 그림을 그릴 환경이면 족했을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가족의 그림을 많이도 남겼다. 자녀는 그의 단골 모델이었다. 고수머리를 한 장난꾸러기 어린이는 장남 박성남이다. 전쟁통에 자녀를 잃은 연유로 해서 혹시 똑같은 일이 생길까 봐 그림으로라도 아들의 모습을 남기고자 했다. 아들은 아버지 그림이 사람의 모습과 같지 않다고 도망 다녔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데려다 앉혀 놓고 몇 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장녀 박인숙은 수십 년후 학교에서 미술 교사를 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작품 <아기 업은 소녀>가 자신을 그린 그림이라고 제자들에게 말하면 제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독서하는 소녀, 아기를 업고 절구질하는 그림들이 다 장녀 박인숙을 그린 그림이다.
그가 얼마나 자녀들을 사랑했는지,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책 한 권이 귀하던 시절, 부잣집 아이들은 전쟁통에도 그림책을 보며 살았다. 끼니도 잊지 못하는데 무슨 그림책이 있었겠는가. 직접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 엮으니 훌륭한 그림책이 되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귀한 그림책이 어디에 있을까? 경매장 호가만 따지면 수십억 원의 그림책이다.
창신동 집에는 파란 눈의 손님들도 자주 왔다. 박수근은 지금의 명동 반도 호텔 1층 화랑에서 그림을 전시하고 판매도 했다. 반도화랑은 이대원 선생님이 운영하였는데, 화랑에서 손님들이 전시된 그림을 보다가 작가의 다른 그림을 더 보고 싶다면 직접 손님들과 함께 창신동 집까지 왔다. 손님이 마을 어귀까지 오면 아이들은 마루 옆 부엌에 숨죽이고 있었다. 가난하고 헐벗은 조국의 못난 모습을 거침없이 그렸던 화가를 오히려 외국인 구매자들은 좋아했다. 그림 속 주제는 우리에게는 아픈 역사였지만 파란 눈의 갤러리들은 이 그림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중에 주 고객이던 마거릿 밀러 여사는 '한국의 서정을 그만큼 성실히 표현한 작가는 없습니다.'(박인숙 <내 아버지 박수근> 삼인, 163p)라고 말하며 박수근의 그림을 많이 구매했다. 창신동 집은 박수근에게는 화실이었고, 가족들에게는 보금자리였으며, 외국인에게는 좋은 작품을 많이 건질 수 있는 갤러리였다.
그런데 문제가 불거졌다. 1962년 도시계획에 의해 집 앞에 도로가 나면서 집의 절반을 나라에 내놓아야 했다. 지금처럼 충분한 보상도 기대할 수 없던 시절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땅 주인은 따로 있었다. 땅 임자가 있는 상태에서 박수근은 집만 소유한 것이다. 땅 주인은 매각을 원했지만 박수근은 입장이 난처했다. 당장 갈 곳도 없었다. 소송까지 갔지만 박수근의 패배로 끝났다.
결국 땅 주인이 집 철거를 요구하는 바람에 1963년에 전농동으로 이사할 수 밖에 없었다.
한이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