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관계에 듀스가?…테니스 빙자해 끝없이 섹시한 영화 '챌린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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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챌린저스'
'아이 엠 러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또 한번 금기 깬 신작
신도 막지 못하는 예민하고 미묘한 사랑
긴장감 넘치는 장면과 최고 수준의 OST 만나
'아이 엠 러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또 한번 금기 깬 신작
신도 막지 못하는 예민하고 미묘한 사랑
긴장감 넘치는 장면과 최고 수준의 OST 만나
루카 구아다니노의 신작 ‘챌린저스’는 영화가 갖는 속성 중 하나인 비현실성의 현실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이건 그냥 스토리일 뿐이야, 현실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 법이야,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곧 그 반대임을 깨닫게 된다. 아닌 척, 사실은 지금 세상에서 숱하게 벌어지는 가장 현실적이며 가장 리얼한 얘기라는 걸 알게 된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그 현실과 비현실의 간극을 얄미우리만큼 잘 파고 들어가는 인물이다. 그는 아들의 친구와 사랑에 빠지는 중년 여자의 얘기를 그리거나(‘아이 엠 러브’) 예전의 연인을 죽이는 방식으로 관계를 정리하는가 하면(‘비거 스플래쉬’) 잘 생긴 청년에게 빠진 어린 남자의 사랑을 아이의 시선으로 그리기도 한다.(‘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이는 다 실제로 많이 벌어지는 일들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렇다고 인정하거나 그걸 표현하기를 금기시하고 있을 뿐이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비현실적이되 현실적인 상상력의 극단은 ‘본즈 앤 올’이었다. ‘뼈까지 다 발라 먹는다’는 뜻을 가진 제목의 이 영화는 식인 습성을 지닌, 사람을 먹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는 두 남녀의 러브 스토리를 그린다. 끔찍한 얘기지만 사실은 사랑이라는 것이 그런 지옥의 욕망을 억누를 때에만이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은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 연인 사이의 남녀들 중에는 폭력적이며 자기 파괴적인 인물들이 적지 않다. ‘본즈 앤 올’이 공포스러운 것은 작품이 갖는 그런 현실성때문이다. 루카 구아다니노는 순간순간 경계를 넘어서며 비현실에서 현실로, 현실에서 비현실의 세계로 양 구간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구아다니노가 새 영화 ‘챌린저스’를 통해 ‘하고’ 싶었던 것은 ‘쓰리썸’ 섹스의 욕망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실제로 쓰리썸을 꿈꾸며 살아간다. 적어도 한 사람만이 아니라 한 사람 이상을 사랑하며 살고 싶어 한다. 복수의 소유욕을 지니고 산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거나 표현하거나 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현재의 우리들이 지닌 도덕률의 한계치이다. 욕망하되 욕망하지 않는 척 하라고 사회는 요구한다. 통상의 금기라고 사회는 가르친다. 루카 구아다니노는 자신이 게이임을 밝혔듯이 그런 금기, 더 정확하게는 ‘그런 금기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의 금기’에 대해 커밍아웃 하고 싶어 한다. ‘챌린저스’는 진실로 끝간 데 없이 섹시한 영화이다. 많은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안에 담겨진 몇 가지 모멘텀을 따라 하는 습성이 있다. 영화 속에서 짜장면 먹는 장면이 나오면 그걸 먹으러 가는 식이다. 아마도 많은 남자들, 특히 여성들이 더 이 영화를 본 후 꿈틀 대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야수처럼, 짐승처럼, 상대를 갖고 싶다는 생각에 혼미해졌을 수 있다.
영화 속에서 타시 덩컨(젠데이아 콜맨)은 남편 아트 도널드슨(마이크 파이스트)의 절친이자 남편보다 먼저 사귀었던 남자 패트릭 즈바이그(조쉬 오코너)의 뺨을 갈기기도 하고 얼굴에 침을 뱉기까지 한다. 거리에는 지나가는 태풍의 회오리가 점점 거세지고 타사는 그만큼, 때리고 침을 뱉은 만큼, 태풍만큼, 패트릭을 격렬하게 원하기 시작한다. 기묘한 것은 상대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은 사실은 모두들 금새 알아 챈다는 것이다. 작은 눈빛, 아주 사소한 몸짓만으로도 낌새를 느낀다. 사랑은 미묘한 것이고 상대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매우 섬세한 것이다. 아트는 패트릭과의 결승 경기에서 그가 라켓을 쥐는 방식만으로도 셋의 관계가 파국으로 갈지 더 나은 관계로 갈지 기로에 섰음을 깨닫는다.
그건 마치 둘의 경기가 듀스에 듀스를 거듭하고 있는 것과 같다. 서브 하나로 지금까지의 모든 경기를 수포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자 둘은, 아니 셋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타사의 포효 아닌 포효는 남편을 응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옛 남자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이제 둘 다 가질 수 있고 두 남자 모두와 사랑할 수 있게 됐음을 기뻐하는 것인가. 결말 이후의 셋의 관계에 대해 벌어지는 해석은 진실로, 자신이 어떠한 사랑관이나 소유욕구를 지녔으며 어떠한 섹스를 꿈꾸고 살아 가고 있는 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챌린저스’는 기본적으로는 테니스 영화이다. 주인공 셋은 테니스 선수이다. 타시는 아주 잘 나가는 스타 플레이어였다. 그녀가 전미 청소년 경기에서 우승을 하고 그 뒷풀이 파티에서 셋은 만났다. 아트와 패트릭은 어릴 때부터 기숙사 방을 같이 썼을 정도로 죽마고우이다. 패트릭은 아트에게 자위하는 법을 가르쳐 줬을 정도다.
패트릭은 약간 상남자 스타일을 지향하고 아트는 연약하고 섬세한 남자 스타일이다. 타시는 둘 다에게 흥미와 욕망을 느낀다. 셋 다 18살 때 얘기이다. 셋의 사랑은 그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타시는 패트릭과 아트에게 자신의 번호를 따고 싶으면 시합에서 이기라고 한다. 이기는 사람이 자신을 가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챌린저스 게임 결승에 붙은 패트릭과 아트는, 이긴 자가 타시를 가질 수 있음을 암시받는다. 어쨌든 처음들 만나 13년이 지나 현재로 오기까지 아트는 유명한 선수가 되고 타사는 그의 코치가 된다. 타시는 심각한 무릎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 좌절의 순간을 패트릭은 같이 하지 못했고 아트는 곁을 지켰다. 그래서 타시는 아트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지만 남편의 슬럼프에 슬슬 짜증을 내고 있는 상태다. 타시가 싫어 하는 것은 아트의 의존성이다.
사랑은 예민한 것이다. 타시는 남편 아트의 속마음을 안다. 여전히 그가 패트릭에 대한 열등감을 갖고 산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게 다 자신이 처음에 아트가 아닌 패트릭을 선택한 것 때문이며 자신이 다치기 직전 패트릭과 대판 싸우지 않았다면-그런 우연이 없었다면-아트와의 삶은 없었다는 것을 아트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것을 타시는 안다. 타시가 그걸 알고 있다는 것을 아트 또한 알고 있으며 아트가 또 그걸 알고 있다는 것을 타시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아트가 알고 있으며 다시 그걸 타시가 알고 있다는 식이다.
그런데 이 모든 복잡한 감정의 순환을 저 멀리 있는 패트릭 또한 알고 있다는 것이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사랑은 예민한 것이며 그 뾰족함 때문에 섹시하고 강렬한 것이다. 이런 사랑은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 이건 신도 막지 못한다.
테니스 선수들의 이야기인 만큼 모두들 죽죽 뻗은 몸매를 자랑한다. 특히 젠데이아 콜멘의 검은 빛 피부의 늘씬한 외모는 섹스 어필이란 단어를 새삼 꺼내들게 만든다. 흑진주에는 영롱하다는 표현이 맞다. 젠데이아가 그렇다. 아트 역의 마이크 파이스트나 패트릭 역의 조쉬 오코너도 자연 근육질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들은 경기를 하면서 땀에 젖고, 땀을 뚝뚝 흘리며, 땀을 비오듯 흘리는데 그걸 보고 있으면 둘이서 혹은 셋이서 뜨거운 섹스를 벌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루카 구아다니노가 영화의 테니스 장면을 그렇게 느끼도록 찍었다,고 하면 동의하기 어렵겠지만 사람들이 그런 느낌을 갖기를 그가 원했다는 것은 맞는 얘기이다. 구아다니노 만큼 사람들의 성적 욕망을 잘 아는 사람이 없고 그 만큼 그걸 가장 양식적으로 표현할 줄 아는 인물은 없다.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두 남녀가 호텔 스위트 룸의 하얀 시트 침대에 누어 있는 것조차 로마네스크 양식 같은 장식미가 느껴진다. 이번 그의 영화 ‘챌린저스’는 자신이 얼마나 강렬한 욕망을 지니고 있는 가, 우리 모두 얼마나 강한 욕구에 시달리며 살고 있으며 사실은, 그리고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 사랑하고 취(取)하지 말고 취하고 사랑해도 된다, 고 그는 말하고 있는 셈이다. ‘챌린저스’ 제목은 챌린저스 게임을 의미한다. 윔블던이나 전미 오픈 같은 메이저 리그 경기가 아니라 거기에 나갈 수 있는 출전 자격을 위한 경기이다. 슬럼프를 겪는 아트 같은 유명 선수, 갓 프로에 입문한 선수들, 루키들이 거치는 경기이다.
테니스 경기의 룰을 잘 몰라도 볼 수 있지만 알고 보면 보다 재미있다. 테니스는 총 세 세트이고 한 세트당 여섯 게임을 하는데 그 중에서 다섯 게임을 먼저 이기면 어드밴티지가 되지만 5대5 상황에서 계속 듀스가 이어질 수 있다. 한 게임은 세 번의 서브권이 주어진다. 15대 0(피프틴 러브라 읽는다), 30대 0, 그리고 40대 0에서 한번 더 이기면 그 게임은 가져 오는 것이다. 이것도 40대 40에서 계속 듀스가 이어질 수 있다. 이 기본 룰을 알고 보면 영화가 매우 재미있게 읽힌다. 타사와 패트릭, 아트는 서로 듀스에 듀스를 거듭하는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테니스는 유례없이 격렬하고 뜨거운 경기이다. 사랑과 섹스가 그렇다. 인간은 뼛 속 깊이 자유롭게 살아야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 대신 뼛 속 깊이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 가면 된다. 영화가 대신 해준다. ‘챌린저스’가 우리 속에 갇혀 있는 우리의 영혼의 욕망을 깨우는 영화이다.
이 영화의 음악은 최근 몇 년 사이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버전으로서 최고급이다. 심장을 꽝꽝 울리게 한다. 트렌트 레즈너, 아티커스 로즈가 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루카 구아다니노의 비현실적이되 현실적인 상상력의 극단은 ‘본즈 앤 올’이었다. ‘뼈까지 다 발라 먹는다’는 뜻을 가진 제목의 이 영화는 식인 습성을 지닌, 사람을 먹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는 두 남녀의 러브 스토리를 그린다. 끔찍한 얘기지만 사실은 사랑이라는 것이 그런 지옥의 욕망을 억누를 때에만이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은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 연인 사이의 남녀들 중에는 폭력적이며 자기 파괴적인 인물들이 적지 않다. ‘본즈 앤 올’이 공포스러운 것은 작품이 갖는 그런 현실성때문이다. 루카 구아다니노는 순간순간 경계를 넘어서며 비현실에서 현실로, 현실에서 비현실의 세계로 양 구간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구아다니노가 새 영화 ‘챌린저스’를 통해 ‘하고’ 싶었던 것은 ‘쓰리썸’ 섹스의 욕망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실제로 쓰리썸을 꿈꾸며 살아간다. 적어도 한 사람만이 아니라 한 사람 이상을 사랑하며 살고 싶어 한다. 복수의 소유욕을 지니고 산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거나 표현하거나 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현재의 우리들이 지닌 도덕률의 한계치이다. 욕망하되 욕망하지 않는 척 하라고 사회는 요구한다. 통상의 금기라고 사회는 가르친다. 루카 구아다니노는 자신이 게이임을 밝혔듯이 그런 금기, 더 정확하게는 ‘그런 금기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의 금기’에 대해 커밍아웃 하고 싶어 한다. ‘챌린저스’는 진실로 끝간 데 없이 섹시한 영화이다. 많은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안에 담겨진 몇 가지 모멘텀을 따라 하는 습성이 있다. 영화 속에서 짜장면 먹는 장면이 나오면 그걸 먹으러 가는 식이다. 아마도 많은 남자들, 특히 여성들이 더 이 영화를 본 후 꿈틀 대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야수처럼, 짐승처럼, 상대를 갖고 싶다는 생각에 혼미해졌을 수 있다.
영화 속에서 타시 덩컨(젠데이아 콜맨)은 남편 아트 도널드슨(마이크 파이스트)의 절친이자 남편보다 먼저 사귀었던 남자 패트릭 즈바이그(조쉬 오코너)의 뺨을 갈기기도 하고 얼굴에 침을 뱉기까지 한다. 거리에는 지나가는 태풍의 회오리가 점점 거세지고 타사는 그만큼, 때리고 침을 뱉은 만큼, 태풍만큼, 패트릭을 격렬하게 원하기 시작한다. 기묘한 것은 상대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은 사실은 모두들 금새 알아 챈다는 것이다. 작은 눈빛, 아주 사소한 몸짓만으로도 낌새를 느낀다. 사랑은 미묘한 것이고 상대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매우 섬세한 것이다. 아트는 패트릭과의 결승 경기에서 그가 라켓을 쥐는 방식만으로도 셋의 관계가 파국으로 갈지 더 나은 관계로 갈지 기로에 섰음을 깨닫는다.
그건 마치 둘의 경기가 듀스에 듀스를 거듭하고 있는 것과 같다. 서브 하나로 지금까지의 모든 경기를 수포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자 둘은, 아니 셋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타사의 포효 아닌 포효는 남편을 응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옛 남자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이제 둘 다 가질 수 있고 두 남자 모두와 사랑할 수 있게 됐음을 기뻐하는 것인가. 결말 이후의 셋의 관계에 대해 벌어지는 해석은 진실로, 자신이 어떠한 사랑관이나 소유욕구를 지녔으며 어떠한 섹스를 꿈꾸고 살아 가고 있는 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챌린저스’는 기본적으로는 테니스 영화이다. 주인공 셋은 테니스 선수이다. 타시는 아주 잘 나가는 스타 플레이어였다. 그녀가 전미 청소년 경기에서 우승을 하고 그 뒷풀이 파티에서 셋은 만났다. 아트와 패트릭은 어릴 때부터 기숙사 방을 같이 썼을 정도로 죽마고우이다. 패트릭은 아트에게 자위하는 법을 가르쳐 줬을 정도다.
패트릭은 약간 상남자 스타일을 지향하고 아트는 연약하고 섬세한 남자 스타일이다. 타시는 둘 다에게 흥미와 욕망을 느낀다. 셋 다 18살 때 얘기이다. 셋의 사랑은 그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타시는 패트릭과 아트에게 자신의 번호를 따고 싶으면 시합에서 이기라고 한다. 이기는 사람이 자신을 가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챌린저스 게임 결승에 붙은 패트릭과 아트는, 이긴 자가 타시를 가질 수 있음을 암시받는다. 어쨌든 처음들 만나 13년이 지나 현재로 오기까지 아트는 유명한 선수가 되고 타사는 그의 코치가 된다. 타시는 심각한 무릎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 좌절의 순간을 패트릭은 같이 하지 못했고 아트는 곁을 지켰다. 그래서 타시는 아트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지만 남편의 슬럼프에 슬슬 짜증을 내고 있는 상태다. 타시가 싫어 하는 것은 아트의 의존성이다.
사랑은 예민한 것이다. 타시는 남편 아트의 속마음을 안다. 여전히 그가 패트릭에 대한 열등감을 갖고 산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게 다 자신이 처음에 아트가 아닌 패트릭을 선택한 것 때문이며 자신이 다치기 직전 패트릭과 대판 싸우지 않았다면-그런 우연이 없었다면-아트와의 삶은 없었다는 것을 아트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것을 타시는 안다. 타시가 그걸 알고 있다는 것을 아트 또한 알고 있으며 아트가 또 그걸 알고 있다는 것을 타시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아트가 알고 있으며 다시 그걸 타시가 알고 있다는 식이다.
그런데 이 모든 복잡한 감정의 순환을 저 멀리 있는 패트릭 또한 알고 있다는 것이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사랑은 예민한 것이며 그 뾰족함 때문에 섹시하고 강렬한 것이다. 이런 사랑은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 이건 신도 막지 못한다.
테니스 선수들의 이야기인 만큼 모두들 죽죽 뻗은 몸매를 자랑한다. 특히 젠데이아 콜멘의 검은 빛 피부의 늘씬한 외모는 섹스 어필이란 단어를 새삼 꺼내들게 만든다. 흑진주에는 영롱하다는 표현이 맞다. 젠데이아가 그렇다. 아트 역의 마이크 파이스트나 패트릭 역의 조쉬 오코너도 자연 근육질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들은 경기를 하면서 땀에 젖고, 땀을 뚝뚝 흘리며, 땀을 비오듯 흘리는데 그걸 보고 있으면 둘이서 혹은 셋이서 뜨거운 섹스를 벌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루카 구아다니노가 영화의 테니스 장면을 그렇게 느끼도록 찍었다,고 하면 동의하기 어렵겠지만 사람들이 그런 느낌을 갖기를 그가 원했다는 것은 맞는 얘기이다. 구아다니노 만큼 사람들의 성적 욕망을 잘 아는 사람이 없고 그 만큼 그걸 가장 양식적으로 표현할 줄 아는 인물은 없다.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두 남녀가 호텔 스위트 룸의 하얀 시트 침대에 누어 있는 것조차 로마네스크 양식 같은 장식미가 느껴진다. 이번 그의 영화 ‘챌린저스’는 자신이 얼마나 강렬한 욕망을 지니고 있는 가, 우리 모두 얼마나 강한 욕구에 시달리며 살고 있으며 사실은, 그리고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 사랑하고 취(取)하지 말고 취하고 사랑해도 된다, 고 그는 말하고 있는 셈이다. ‘챌린저스’ 제목은 챌린저스 게임을 의미한다. 윔블던이나 전미 오픈 같은 메이저 리그 경기가 아니라 거기에 나갈 수 있는 출전 자격을 위한 경기이다. 슬럼프를 겪는 아트 같은 유명 선수, 갓 프로에 입문한 선수들, 루키들이 거치는 경기이다.
테니스 경기의 룰을 잘 몰라도 볼 수 있지만 알고 보면 보다 재미있다. 테니스는 총 세 세트이고 한 세트당 여섯 게임을 하는데 그 중에서 다섯 게임을 먼저 이기면 어드밴티지가 되지만 5대5 상황에서 계속 듀스가 이어질 수 있다. 한 게임은 세 번의 서브권이 주어진다. 15대 0(피프틴 러브라 읽는다), 30대 0, 그리고 40대 0에서 한번 더 이기면 그 게임은 가져 오는 것이다. 이것도 40대 40에서 계속 듀스가 이어질 수 있다. 이 기본 룰을 알고 보면 영화가 매우 재미있게 읽힌다. 타사와 패트릭, 아트는 서로 듀스에 듀스를 거듭하는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테니스는 유례없이 격렬하고 뜨거운 경기이다. 사랑과 섹스가 그렇다. 인간은 뼛 속 깊이 자유롭게 살아야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 대신 뼛 속 깊이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 가면 된다. 영화가 대신 해준다. ‘챌린저스’가 우리 속에 갇혀 있는 우리의 영혼의 욕망을 깨우는 영화이다.
이 영화의 음악은 최근 몇 년 사이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버전으로서 최고급이다. 심장을 꽝꽝 울리게 한다. 트렌트 레즈너, 아티커스 로즈가 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