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팔 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신간 '팔레스타인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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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저널리스트가 조명한 '팔레스타인 대봉기'
국가 건설의 희망을 좌절당한 팔레스타인 시민들은 시위와 불매운동, 공공시설 파괴, 폭력 행위를 벌인다.
이들 주변으로 유대인 정착촌이 거침없이 확장된다.
이슬람 강경파는 이스라엘과의 평화 회담을 방해하고, 온건파와 부역자를 처형한다.
이스라엘 점령군은 가옥을 철거하고 분리 장벽을 세우는 등 공격적인 진압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는다.
당장 어제 가자지구에서 발생한 뉴스라고 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장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거의 90년 전 '팔레스타인 대봉기'(1936~1939)때 발생한 일들이다.
미국 출생 저널리스트이자 칼럼니스트인 오렌 케슬러가 쓴 '팔레스타인 1936'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의 기원을 파고든 책이다.
저자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유대 국가 건설에 반대하고 독립을 요구하며 진행한 '대봉기'에서 분쟁의 씨앗을 찾는다.
책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적 고향을 건설한다"는 영국-유대 간 밸푸어 선언(1917) 이후 현지 유대인 수는 천천히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다 1930년대 들어 급증하기 시작했다.
1937년에는 4년 만에 2배 증가한 40만명으로 늘어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 인구의 약 30%를 차지했다.
늘어난 인구를 바탕으로 유대인은 공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정착촌을 곳곳에 건설하는 한편, 은행·산업·건설 부문 등 각종 현지 산업을 장악해 나갔다.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던 영국 당국의 묵인 속에 세력을 확장한 유대인에 대한 지역민의 불만은 고조됐다.
게다가 무장 투쟁론자 알 카삼의 피살까지 발생하자 시민들은 격앙했다.
1936년 팔레스타인 민중이 들고일어난 이른바 '대봉기'가 발생한 계기였다.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할 것 없이 모두 독립을 위해 투쟁에 나섰다.
군사적 투쟁은 물론, 유대인 제품 불매 운동도 벌였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영 제국의 공격적인 진압, 시온주의자들의 반격 속에 팔레스타인은 막대한 피해를 봤다.
전투력은 크게 훼손됐고, 경제는 복구 불능 상태에 빠져들었다.
4만명 이상이 난민이 돼 피난길에 올랐다.
유력 정치 지도자들도 추방됐다.
8천명의 아랍인 사망자 중 1천500명이 같은 아랍인에 의해 살해될 만큼 내분 또한 심화했다.
대봉기는 유대인들에게 현실을 일깨워주기도 했다.
대봉기를 목도한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영국과 아랍이 유대 국가 건설을 용인해주리란 환상을 버렸다.
주권국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력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자각한 것이다.
대봉기 기간 수천 명의 유대인 경비대는 당대 최강을 자랑했던 영국군의 조련과 무기를 지급받으며 조금씩 강군으로 성장해 나갔다.
또한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의 봉기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했다.
3년간 단 한 곳의 정착촌도 포기하지 않았을뿐더러 전략적 요충지에 60개의 정착촌을 추가로 건설했다.
대봉기로 본격화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여전히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저자는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과거는 결코 죽지 않았다.
사실 대봉기는 과거의 일도 아니다"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 대봉기는 여전히 진행 중인 사건"이라고 말한다.
위즈덤하우스. 정영은 옮김. 528쪽. /연합뉴스
이들 주변으로 유대인 정착촌이 거침없이 확장된다.
이슬람 강경파는 이스라엘과의 평화 회담을 방해하고, 온건파와 부역자를 처형한다.
이스라엘 점령군은 가옥을 철거하고 분리 장벽을 세우는 등 공격적인 진압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는다.
당장 어제 가자지구에서 발생한 뉴스라고 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장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거의 90년 전 '팔레스타인 대봉기'(1936~1939)때 발생한 일들이다.
미국 출생 저널리스트이자 칼럼니스트인 오렌 케슬러가 쓴 '팔레스타인 1936'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의 기원을 파고든 책이다.
저자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유대 국가 건설에 반대하고 독립을 요구하며 진행한 '대봉기'에서 분쟁의 씨앗을 찾는다.
책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적 고향을 건설한다"는 영국-유대 간 밸푸어 선언(1917) 이후 현지 유대인 수는 천천히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다 1930년대 들어 급증하기 시작했다.
1937년에는 4년 만에 2배 증가한 40만명으로 늘어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 인구의 약 30%를 차지했다.
늘어난 인구를 바탕으로 유대인은 공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정착촌을 곳곳에 건설하는 한편, 은행·산업·건설 부문 등 각종 현지 산업을 장악해 나갔다.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던 영국 당국의 묵인 속에 세력을 확장한 유대인에 대한 지역민의 불만은 고조됐다.
게다가 무장 투쟁론자 알 카삼의 피살까지 발생하자 시민들은 격앙했다.
1936년 팔레스타인 민중이 들고일어난 이른바 '대봉기'가 발생한 계기였다.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할 것 없이 모두 독립을 위해 투쟁에 나섰다.
군사적 투쟁은 물론, 유대인 제품 불매 운동도 벌였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영 제국의 공격적인 진압, 시온주의자들의 반격 속에 팔레스타인은 막대한 피해를 봤다.
전투력은 크게 훼손됐고, 경제는 복구 불능 상태에 빠져들었다.
4만명 이상이 난민이 돼 피난길에 올랐다.
유력 정치 지도자들도 추방됐다.
8천명의 아랍인 사망자 중 1천500명이 같은 아랍인에 의해 살해될 만큼 내분 또한 심화했다.
대봉기는 유대인들에게 현실을 일깨워주기도 했다.
대봉기를 목도한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영국과 아랍이 유대 국가 건설을 용인해주리란 환상을 버렸다.
주권국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력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자각한 것이다.
대봉기 기간 수천 명의 유대인 경비대는 당대 최강을 자랑했던 영국군의 조련과 무기를 지급받으며 조금씩 강군으로 성장해 나갔다.
또한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의 봉기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했다.
3년간 단 한 곳의 정착촌도 포기하지 않았을뿐더러 전략적 요충지에 60개의 정착촌을 추가로 건설했다.
대봉기로 본격화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여전히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저자는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과거는 결코 죽지 않았다.
사실 대봉기는 과거의 일도 아니다"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 대봉기는 여전히 진행 중인 사건"이라고 말한다.
위즈덤하우스. 정영은 옮김. 528쪽.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