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네스 마틴과 정상화, 단색조 추상화 두 거장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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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네스 마틴·정상화 개인전
개관전 보다 높은 완성도 보인 '후속 전시'
1편보다 나은 속편, 3편은 '안갯속'
시험대 오른 '강릉 랜드마크' 솔올미술관
다음 전시 기대감에도…강릉시 "세부 계획 없어"
개관전 보다 높은 완성도 보인 '후속 전시'
1편보다 나은 속편, 3편은 '안갯속'
시험대 오른 '강릉 랜드마크' 솔올미술관
다음 전시 기대감에도…강릉시 "세부 계획 없어"
1편보다 나은 속편, 3편부턴 '글쎄'.
지난 2월 14일 개관한 강릉 솔올미술관의 상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시작은 화려했다. 세계적인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89)가 세운 마이어파트너스가 미술관 건물을 설계했고, 개관전으로 공간예술의 거장 루치오 폰타나(1899~1968)의 개인전을 열었다. '강릉의 랜드마크'를 꿈꾸며 출범한 이곳은 단번에 미술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강원도 강릉 솔올미술관 외관 전경 /솔올미술관 제공](https://img.hankyung.com/photo/202405/01.36654924.1.jpg)
▶▶▶(관련 기사) '강릉 랜드마크'라던 솔올미술관, 김 빠진 루치오 폰타나 개관전
지난 5월 4일 열린 솔올미술관의 두 번째 전시 '아그네스 마틴: 완벽한 순간들'은 그간의 우려를 누그러뜨리기 충분했다. 전시 내용과 구성면에서 전편에 비해 높은 완성도를 보여줬다. 미국 추상표현주의 거장 아그네스 마틴(1912~2004)의 대표작 54점을 총망라한 대규모로 조성된 데다, 그의 모노크롬 회화 연작은 순백의 미술관 건물과도 한 몸처럼 어우러졌다. 함께 열린 정상화 작가(91)의 개인전도 마틴의 존재감에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로 균형 있게 구성됐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오는 8월 막을 내리는 이번 전시 이후 미술관을 운영해야 할 강릉시가 공식적으로 밝힌 운영 계획이 아직 없다. 솔올미술관이 '강릉의 랜드마크'로서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 불투명한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미술계의 관심이 쏠린 이곳의 상황을 아그네스 마틴과 정상화, 강릉시 세 가지 키워드로 살펴봤다.
7년간 사라진 '고독의 화가' 아그네스 마틴
마틴은 미국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가운데 한명이다. 쿠사마 야요이, 조안 미첼, 루이스 부르주아 등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여성 작가' 중 하나로도 꼽힌다. 그동안 아트페어에서 띄엄띄엄 마틴을 만난 사람이라면 이번이 그의 국내 첫 개인전이란 점만으로도 가볼 만한 전시다.![강릉 솔올미술관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 전시 전경 /솔올미술관 제공](https://img.hankyung.com/photo/202405/01.36603543.1.jpg)
"나는 미니멀리즘이 아닌 추상표현주의 화가다." 생전 마틴이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현대 회화에서 미니멀리즘은 감정이나 기교를 전부 덜어내는 사조를 뜻한다. 반면 추상표현주의는 작가의 감정을 강조한다.
마틴이 자신을 이처럼 규정한 배경을 이해하려면 그의 일생을 관통한 외로운 감정을 살펴보는 편이 좋다. 마틴은 철저히 혼자였다. 1912년 캐나다 시골 농장에서 태어나 엄하고 금욕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부모의 냉대 속에 수영선수, 교사 등 여러 샛길을 걸었다. 그러던 중 뉴멕시코의 광활한 사막에 경외심을 느끼곤 미술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아그네스 마틴, '나무', 1964, 캔버스에 아크릴, 연필, 1905 x 1905 cm, 리움미술관 © Estate of Agnes Martin Artists Rights Society (ARS) /솔올미술관 제공](https://img.hankyung.com/photo/202405/01.36603554.1.jpg)
블루칩 작가로 명성을 쌓던 마틴은 50대에 돌연 자취를 감췄다. 주변의 무관심과 외로움으로 점철됐던 어린 시절 후유증이 몰아쳤기 때문이다. 편집성 조현병을 진단받고 매일 환청에 시달렸다. 유일한 멘토였던 화가 에드 라인하르트마저 세상을 떠났다. 1967년부터 1974년까지 7년간 아무도 없는 사막과 숲으로 들어가 잠적했다. 대부분 시간 붓을 놓고 명상하며 보냈다.
![강릉 솔올미술관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 전시 전경 /솔올미술관 제공](https://img.hankyung.com/photo/202405/01.36603537.1.jpg)
전시의 백미는 3층 구석에 숨어있는 8점의 '순수한 사랑' 시리즈다. 마틴이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몰입했던 작업이다. 1993년 건강상의 이유로 양로원에서 지낸 그는 매일 작업실을 찾았다. 몸이 쇠약해지며 작품 크기가 줄어든 대신 분위기는 한껏 화사해졌다. 노랑과 하늘, 연분홍 등 파스텔 톤의 은은한 색으로 캔버스를 채우기 시작했다.
![강릉 솔올미술관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 전시 전경 /솔올미술관 제공](https://img.hankyung.com/photo/202405/01.36603538.1.jpg)
인고의 세월 끝 완성된 정상화의 '백색추상'
마틴의 전시와 함께 열린 정상화 작가의 개인전 '인 다이얼로그: 정상화'도 주목할 만하다. 인 다이얼로그는 솔올미술관이 세계미술과 한국미술을 연결하기 위해 기획한 전시 프로젝트다. 마틴이 순수한 정신성을 절제된 양식으로 표현할 무렵, 한국에선 전위적인 실험미술과 함께 '수행'을 강조한 단색조 추상회화가 태동했다.![솔올미술관 '인 다이얼로그: 정상화' 전시 전경 /솔올미술관 제공](https://img.hankyung.com/photo/202405/01.36603735.1.jpg)
정상화 작가가 자신의 창작행위를 두고 '일'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가로세로 격자무늬만 남은 회화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기란 쉽지 않다. 작가 본인이 의도한 결과다. 그의 작품은 특정한 '이야기'를 내세우지 않는다. 드러내고 메우는 반복적인 작업, 즉 '일'로서의 과정 자체에 집중한다.
![정상화 '무제 017-10-25', 2017, 캔버스에 아크릴, 고령토, 2273 x 1818 cm © 정상화 /갤러리현대 제공](https://img.hankyung.com/photo/202405/01.36603838.1.jpg)
작가의 배경을 알고 보면 백색추상을 한층 깊이 음미할 수 있다. 격자로 나뉜 캔버스는 결국 하나의 공간으로 연결된다. 세월을 간직한 고령토가 떨어져 나간 곳은 새로운 물질이 채운다. 한국과 프랑스, 일본 등 서로 다른 공간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남들과는 다른' 작품세계를 개척하려던 작가의 정신이 반영된 결과다.
![솔올미술관 '인 다이얼로그: 정상화' 전시 전경 /솔올미술관 제공](https://img.hankyung.com/photo/202405/01.36603738.1.jpg)
미래 청사진 없는 강릉시, '3편'부턴 안갯속
1편보다 발전한 속편을 내놨지만, 솔올미술관의 그다음 행보는 안갯속이다. '기부채납'이라는 미술관의 독특한 출발이 한몫했다. 지금까지 미술관을 설계하고 전시를 마련한 주체는 건설 시행사 교동파크홀딩스였다. 강릉시 소유 부지에 아파트를 짓는 대가로 그 옆에 미술관을 조성해 시에 기부채납하기로 한 것이다. 미술관 위탁 운영을 맡은 한국근현대미술재단의 역할은 이번 전시로 끝난다.![강원도 강릉 솔올미술관 외관 전경 /솔올미술관 제공](https://img.hankyung.com/photo/202405/01.36654904.1.jpg)
하지만 아그네스 마틴처럼 유명 작가의 전시를 기획하려면 통상 1~2년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김석모 솔올미술관장은 "마틴의 전시를 열기 위해 지난 3년간 공들여 준비했다"며 "리움미술관, 오사카 국립국제미술관, 뉴욕 휘트니미술관 등 마틴의 작품을 소장한 국내외 기관들과 오랜 시간 협의한 결과"라고 말했다. 강릉시로부터 향후 미술관 운영계획에 대해 공유받은 내용이 있냐는 질문에는 "전혀 없다"고 일축했다.
이번 전시를 두고 '당분간 솔올미술관에서 볼만한 마지막 전시'란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솔올미술관이 강릉의 랜드마크로 거듭날 수 있을까. 화려하게 데뷔한 미술관은 8월 25일까지 열리는 아그네스 마틴과 정상화의 개인전을 끝으로 기약 없는 휴식기에 돌입한다.
강릉=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