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 일병 구하기'에 벌써 70조 썼다…"남은 탄알은 단 8발" [김일규의 재팬워치]
일본 정부가 엔·달러 환율 방어를 위해 두 차례에 걸친 엔 매수 개입에 최소 8조엔(약 70조원) 이상 쏟아부었다는 관측이 나왔다. ‘슈퍼 엔저’가 물가 상승을 부추겨 소비 침체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제롬 파월 미 중앙은행(Fed) 의장은 지난 1일(현지시간)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후 기자회견에서 금리 인하 시기 연기를 시사했지만, ‘금리 인상 전환’ 가능성은 부인했다. 시장의 우려와 달리 미국과 일본의 금리 차이가 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자 엔 매도세가 약화됐다.

여기에 대규모 엔 매수 주문이 유입됐다. 외환시장에서는 ‘일본 정부가 추가 개입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간다 마사토 일본 재무성 재무관은 개입 여부에 대해 “노코멘트”라면서도 “24시간 적절한 대응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지난달 29일 엔·달러 환율은 1990년 이후 처음으로 달러당 160엔대로 치솟은 뒤 대량의 엔 매수 주문으로 급반전했다. 시장에서는 2022년 10월 이후 일본 정부의 첫 ‘실탄 개입’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에 따르면 일본은행 통계 등을 분석한 결과 일본 정부가 개입을 통해 시장에서 빨아들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엔화는 1차에 5조엔, 2차 땐 3조엔 이상이다. 두 차례 개입 규모는 2022년 9~10월(총 3회) 9조엔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해외 투기 세력에 맞서 일본 당국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분석이다.

2024년 일본 경제는 30년간 지속된 장기 침체에서 벗어나 ‘물가와 임금의 선순환’을 노리고 있다. 아직 소득이 물가 상승분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지만, 춘계 노사협상에서 합의된 대폭의 임금 인상이 급여에 반영되면 ‘물가를 뛰어넘는 소득 증가’가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급격한 엔저 탓에 물가가 더 오르면 물가를 뛰어넘는 소득 증가는 실현되기 어렵다. 일본은 지난 2월까지 23개월 연속 실질임금 감소세가 이어지고 있다. 중동 정세 긴장에 유가 상승까지 겹치면 기업은 수입비용이 늘어 임금 인상 여력마저 줄어들게 된다. 물가와 임금의 선순환은커녕 실질소득 감소와 기업 부진이라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 일본 당국이 가장 우려하는 시나리오다.

문제는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진정되지 않는 한 정부의 엔 매수 개입은 ‘시간벌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무한정 엔을 사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정부가 시장 개입에 쓸 수 있는 ‘실탄’이 40조엔가량이라고 분석했다. 한 번에 5조엔 수준의 개입이라면 남은 탄알은 여덟 발 정도라는 분석이다.

일본은행이 금리를 올려 미국과의 금리 차이를 좁히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엔저를 멈추기 위해 금리를 올리는 것은 일본은행의 역할이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더구나 3월 마이너스 금리 해제 때와 달리 추가 금리 인상은 주택담보대출 금리와 중소기업 대출 금리에도 영향을 미치는 만큼 더 신중할 수밖에 없다.

과거 엔저는 ‘수출대국’ 일본에 큰 호재였다. 그러나 이제는 수출 증가가 내수를 부양할 수 있는 통로가 좁아졌다는 평가다. 오히려 기업들은 해외 원자재 조달비가 늘고, 해외 기업 인수합병(M&A) 때 가격도 올라 투자가 어려워진다는 반응이다. 환율 급등락은 그 자체로 불확실성을 키워 기업의 투자를 더 어렵게 만든다.

일본이 스스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경제구조 개혁밖에 답이 없다는 진단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기업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자금의 국내 환류와 더불어 해외 기업의 일본 직접투자를 촉진하는 노력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도쿄=김일규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