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아도인터내셔널’ 다단계 사기 피해자들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정문 앞에서 시위하고 있다.  /강은구 기자
지난달 30일 ‘아도인터내셔널’ 다단계 사기 피해자들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정문 앞에서 시위하고 있다. /강은구 기자
“세계 최초 블록체인 페이란 말에 ….”

광주에 사는 정모씨(79)는 지난해 8월 블록체인에 투자하는 D사에 노후 자금 2000만원을 맡겼다가 모두 날렸다. D사는 간편결제 시스템과 코인에 투자하면 매일 투자금의 1.5~2.0%를 지급한다고 꼬드겼다. 투자 이후 두 달간은 배당금이 꼬박꼬박 들어왔다. 하지만 돌연 지급이 중단됐고 D사는 결국 폐업했다.

○‘디지털 문맹’ 노년층 사기에 취약

[단독] "코인 투자하면 배당 줄게"…사기 한번에 '노후파산'
3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 구로경찰서에 정씨를 비롯해 D페이·D코인 피해자 48명이 고소장을 접수했다. 이들의 피해액은 20억원가량이며, 전국 경찰서에서 접수 중인 고소장을 합치면 전체 피해액은 600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 고소인 48명 중 절반 이상이 70·80대인 점이 특징이다.

일당은 전국을 돌면서 기술 설명회를 열어 ‘첨단 기술인 블록체인에 투자하라’고 유혹했다. 지인을 데려오면 배당금을 더 주겠다고 유도했다. 2억원을 투자했다는 60대 김모씨는 “노후 생활비를 벌어주겠다는 말에 그만 넘어갔다”며 “피해자가 모이고 나니 스마트폰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80대가 많았고, 그제서야 노인만 노렸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고 말했다. D사는 최근 ‘N사’로 이름만 바꾼 채 노년층을 상대로 투자금을 모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노년층이 이른바 ‘신기술 투자 사기’에 유독 취약한 것은 정보에 어둡고 사기 여부를 판별할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에 따르면 55세 이상 장년·고령층의 디지털 정보화 수준은 일반 국민 평균치의 64.3%에 불과하다. 70세 이상의 정보화 수준은 평균치 100점 대비 35.7점으로 더욱 낮다.

재산 유무, 과거 직업에 상관없이 최신식 사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노인도 늘고 있다. 10여 년 전 한 대형 은행에서 ‘C레벨’ 임원으로 퇴직한 70대 A씨는 ‘주식 리딩방’에 약 5000만원을 투자했다가 한 달 넘게 돈을 찾지 못하고 있다.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존 리 전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등 유명인에게 조언을 받는다는 온라인 홍보에 속은 것이다. 사기꾼 일당이 그에게 제시한 유명인과 찍은 사진, 홈트레이딩시스템(HTS) 등은 모두 조작된 것이었다. A씨는 한국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현직 때와 비교도 안 되게 금융 환경이 달라져 도무지 사기라는 점을 알아채지 못했다”며 “가족과 지인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초고령화 시대 “노후 안전판도 중요”

급속한 고령화와 함께 노인을 대상으로 한 사기도 급증하고 있다. 2018년 전체 사기 피해자 중 9.8%를 차지한 61세 이상 비중은 2022년 14.0%로 높아졌다. 연간 사기를 당하는 60대 이상만 4만6214명에 달한다. 100세 시대를 맞아 금융 투자에 뛰어든 고령자가 많아지면서 상당수가 복잡하고 다양해진 투자 사기에 노출된 것이다. 기대수명은 늘어났지만 노후 준비가 부족한 상황은 노년층이 투자 사기 유혹에 더욱 취약하게 만들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연금을 수령하는 65세 이상 가운데 64.4%인 500만1000명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월평균 50만원 미만을 받는 것으로 조사됐다.

정부 차원에서 노인 사기 예방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에서는 노년층 사기 피해를 정부가 나서 면밀하게 집계하지만 국내에서는 ‘연령별 피해자’ 중 하나로 분류할 뿐이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매년 주별 노인 사기 피해액과 주요 사기를 분석해 보고서를 내고, 유형별로 경고하거나 금융회사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2022년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60세 이상 사기 피해자는 8만8262명으로 평균 피해액이 인당 3만5101달러에 달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한국도 미국처럼 사기와 관련해 세부적인 통계 분석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별개로 노인 대상 금융 교육을 적극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전용호 인천대 교수는 “노인 금융 교육을 선택이 아니라 생존권 차원에서 의무화해야 한다”며 “경로당·주민센터 등 전국에 깔린 인프라스트럭처를 활용하고, 기업도 ESG 경영 측면에서 지원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철오/박시온 기자 che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