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 사로잡아 떼돈 벌어"…가난했던 30대男 '대반전'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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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정말 운도 좋아. 실력이 좋긴 해도 이렇게까지 잘 될 줄은 몰랐는데….”
사람들은 부러운 눈으로 그 ‘행운아’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별 볼 일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살던 그 남자가, 우연히 세계 최고 여배우의 눈에 든 후 한순간에 떼돈을 벌게 됐거든요. 그 후로도 남자의 행운은 이어졌습니다. 여배우 덕분에 유명해진 남자에게 광고 제의가 쏟아졌고, 이는 더욱 큰돈과 명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전 유럽에서 스타가 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으니 그야말로 ‘인생 역전’이었습니다.
남자도 늘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난 정말 운을 타고난 사람이야.” 그의 이름은 알폰스 무하(1860~1939). 하지만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그 행운 뒤에는 숨겨진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파헤쳐 봅니다.
무작정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에서 무하는 대책 없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하의 그림을 본 마을 사람들이 “꽤 괜찮다”며 앞다퉈 그림을 사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무하는 우연히 도착한 동네에서 처음으로 ‘직업 화가’가 됐습니다. 무하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찾아온 마법 같은 행운은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렇게 마을 화가로 살던 어느 날, 마을 근처 ‘땅 부자’ 귀족(쿠엔 벨라시 백작)이 무하에게 저택 장식을 의뢰해 왔습니다. 무하는 열심히 그림을 그렸고, 귀족은 크게 만족했습니다. 운 좋게도 귀족은 예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데다 아주 관대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귀족은 무하를 후원하기로 결정하고 넉넉한 월급에 더해 살 집까지 줬습니다.
행운은 이어졌습니다. 귀족의 집에 놀러 온 독일 뮌헨 아카데미의 교수가 우연히 무하의 작품을 보고 “유학을 보내면 훨씬 더 작품이 좋아질 것 같다”고 조언해 준 겁니다. 자신이 신뢰하는 교수의 조언을 귀담아 들은 귀족은 무하를 뮌헨 아카데미에 유학시켜 줬고, 한술 더 떠 프랑스 파리의 명문 아카데미(줄리앙 아카데미) 학비까지 대 줬습니다. 그렇게 무하는 20대를 돈 걱정 없이 공부하며 보냈습니다.
“휴… 다행이다. 지금 큰일 났어요. 저 르네상스 극장 매니전데요. 지금 우리가 하는 연극 주연인 대배우, 사라 베르나르 씨 아시죠? 갑자기 베르나르 씨가 ‘연극 포스터가 맘에 안 든다’고 난리요. 워낙 ‘슈퍼스타’가 하는 말이니 어쩔 수 없이 새 포스터를 급하게 그려야 하는데, 지금 연 데가 여기밖에 없어서… 포스터 그릴 수 있죠? 빨리 그려 줄 수 있어요?”
다른 그림은 많이 그려봤어도 포스터는 한 번도 안 그려봤던 무하. 하지만 무하는 직감했습니다. 일생일대의 기회가 왔다고. “당연히 되죠.” 전화를 끊자마자 무하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밤을 꼴딱 새운 결과물은, 기존 파리 길거리에 붙어 있는 포스터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좋게 보면 참신했지만, 나쁘게 보면 포스터의 기본이 안 된 엉터리. 시안을 받아본 르네상스 극장 매니저의 표정이 구겨졌습니다. ‘망했구나. 연휴에 시간만 버렸네. 하던 일이나 마저 해야겠다.’ 지치고 실망한 무하는 인쇄소로 돌아와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울린 인쇄소 전화벨이 무하를 깨웠습니다. “저기, 극장인데요! 지금 바로 극장으로 오셔야겠어요!” 영문도 모르고 헐레벌떡 극장으로 달려간 무하. 직원의 손에 이끌려 분장실에 들어가자, 한 여성이 무하의 포스터 시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든 그 여성은 바로 베르나르였습니다. 베르나르는 환하게 웃으며 무하를 껴안았습니다. “마음에 쏙 들어요. 이걸로 할게요. 그리고, 우리 당장 계약해. 앞으로 같이 일해요.”
1895년 1월 1일부터 파리 길거리에 붙기 시작한 포스터는 그야말로 ‘대박’이 났습니다. “이건 가져야 해!” 파리 시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체면을 내던지고 면도칼로 벽에 붙은 포스터를 떼어내 집으로 가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도난 사건이 너무 많이 벌어진 나머지 극장 측은 포스터를 끊임없이 다시 찍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신드롬급 인기였습니다. 포스터 자체도 걸작이었지만, 이런 인기에는 다른 요인들이 더 크게 작용했습니다. 일단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사라 베르나르가 주인공이었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게다가 포스터가 풍기는 새로운 분위기는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라고 불리던 당시 분위기와 정확히 맞아떨어졌습니다.
당시 프랑스 파리의 공기는 미래에 대한 낙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전화와 철도, 엘리베이터, 여객선, 자가용, 비행기가 등장한 시대, 덕분에 인간이 꿈꾸던 많은 것들이 이뤄지고 문화가 꽃을 피웠던 시대였으니까요. 이런 성과의 상당 부분은 식민지 주민들을 착취한 덕에 이룩한 것이었지만, 세계의 문화 수도였던 파리 사람들은 이런 고통을 알지도, 설령 안다 해도 신경을 쓰지도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너무나도 아름다운 무하의 포스터는 ‘새로운 멋진 시대’의 이상에 딱 들어맞았습니다. 이 때 등장한, 무하의 그림처럼 꽃이나 식물이 많이 나오는 곡선 위주의 예쁜 미술 양식을 ‘아르 누보(Art Nouveau, 새로운 예술)’라 합니다. 포스터의 ‘대박’, 이를 계기로 베르나르와 맺은 6년에 걸친 장기 계약 덕분에 무하에게는 일감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포스터, 액세서리, 무대 디자인, 광고…. 기회를 잡은 무하는 자신의 기량을 꽃피웠습니다. 알폰스 무하라는 이름은 하나의 명품 디자인 브랜드가 됐고, 그의 이름은 전 유럽에 퍼졌습니다. 무하는 큰 부자가 됐습니다. 같은 시대 인상주의 화가들이 가난에 시달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30대의 나이로 부자가 된 무하는 누가 봐도 행운아였습니다.
사람들은 무하의 얘기를 듣고 그를 부러워했습니다. “시대를 참 잘 타고났단 말이야.” 무하도 자신이 운이 좋아서 성공했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운명이 나를 인도했다.” 그런데 훗날 연구자들에 따르면, 사실 무하의 이런 인생 이야기는 절반의 진실이었습니다.
뮌헨과 파리 유학 시절에도 그는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자주 이렇게 혼잣말했다고 합니다. “그림만 그리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 파리 아카데미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125명의 학생 중 수석으로 졸업한 것도 이런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아버지는 일 중독자였다. 항상 ‘예술가가 뭔가를 이루려면 하루에 16시간씩 일해야 한다. 내 가장 귀중한 친구이자 동반자는 시간이다. 쓸데없는 일로 내 친구를 죽일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게으름을 그냥 봐 넘기지 못했고, 재능은 있지만 의지력이 없는 사람들이 인생을 허비하는 걸 못 견뎌 했다.”
이런 노력과 성품, 실력에 비하면 무하의 운은 사실 좋은 편이라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그가 첫 직장에서 잘린 건 회사가 큰 거래처를 잃은 탓에 갑자기 사세가 기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파리에서 아카데미를 수석 졸업한 뒤에도 무하는 여러 불운에 시달렸습니다. 그림값을 제때 받지 못해 콩으로 끼니를 때우는가 하면, 난방용 석탄을 살 돈이 없어서 병에 걸려 죽을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반면 그가 스스로 ‘행운’이라고 표현했던 일들은 대부분이 자신의 노력으로 쟁취한 것들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운 좋게 연휴에 인쇄소로 출근한 덕분에 베르나르의 눈에 들 수 있었다’는 무하의 얘기가 과장이었단 겁니다. 당시 신문 기사와 기록을 교차 검증해 보면 극장 측은 일찌감치 여러 화가에게 포스터 시안을 요청했고, 그 중 무하의 포스터를 골랐다고 합니다. 베르나르의 요구로 갑자기 포스터를 새로 만들게 됐다거나, 전화를 받은 사람이 무하밖에 없다거나, 베르나르가 직접 무하의 작품을 골랐다거나 하는 일 없이 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과정을 거쳐 무하의 작품을 선정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깁니다. 무하는 왜 자신의 행운을 과장하고 노력과 불운은 숨겼을까요.
무하는 미술과 거리가 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철학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가 포스터와 광고, 책 삽화 등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예술에 천착했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무하가 쓴 전시 서문에는 이런 생각이 잘 드러 있습니다. “예술은 굶주리고 목마른 영혼의 유일한 양분이다. 온 인류에게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것만이 온 세상을 가치있게 만드는 길이다.”
무하가 자신의 행운을 과장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던 것으로 무하 연구자들은 추정합니다. ‘여러분도 흔들리지 말고 자신의 길을 걸으세요. 저 같은 평범한 사람도 열심히 살았더니 이렇게 행운이 따라왔답니다.’ 전하고 싶었던 철학을 자신의 삶 이야기를 이용해 이렇게 다시 한번 강조했다는 거지요.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벌어들인 많은 돈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사람 좋고, 세상 물정 모르고, 미술에만 집중하는 무하를 주변 사람들이 호구로 취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집세를 못 냈다” “휴가를 가야 하는데 휴가비가 없다” “면접 복장을 살 돈이 없다”고 주변 사람들이 앓는 소리를 할 때마다 무하는 주저하지 않고 돈을 빌려줬습니다. 하지만 빌려 간 돈을 갚은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도 무하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술적인 도전을 거듭했습니다. 40대 중반에는 파리를 떠나 미국으로 가 활동하며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쳤습니다. 50대에 접어든 1910년에는 고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체코 민족의 정신적인 뿌리인 ‘슬라브 신화’를 거대한 그림에 담기 시작한 겁니다. 성공한 예술가가 됐으니 조국에 봉사해야겠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작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체코 토박이 예술가들의 “외국물 먹은 사람이 체코에 대해 뭘 아느냐”는 반발과 텃세 때문에 제대로 전시되지조차 못했습니다.
그의 최후는 씁쓸했습니다. 1939년, 무하가 75세 때 나치 독일이 체코를 침략했습니다. 게슈타포(비밀경찰)는 유대인 공동체를 공개 지지한 무하를 끌고 가 심문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쇠약했던 무하는 심문 이후 앓아누웠습니다. 넉 달 뒤, 무하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나치 독일은 무하의 작품을 전시하는 걸 금기시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가 패망한 뒤에도 무하의 작품은 여전히 창고에 잠들어 있어야 했습니다. 이후 들어선 공산주의 정권이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부르주아의 퇴폐적인 그림”이라며 그의 작품을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하의 그림들은 대중의 마음속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무작정 거부하고 배척하기엔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덕분에 무하 작품은 세월의 흐름과 그 모든 오해, 탄압에도 불구하고 잊히지 않고 훗날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을 미술의 매력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순정만화에 등장하는 꽃 배경의 ‘원조’가 무하일 만큼 후대 문화에 그가 미친 영향력은 생각보다 넓고 깊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운 한 편의 연극과 같다는 것. 지금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더라도 묵묵히 노력하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온다는 것. 운명이 당신을 돕고 있다는 것. 그래도 힘들 때는 주변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며 마음을 달래라는 것. 무하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단순한 ‘예쁨’을 넘어 삶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담은 작품, 작가 자신의 열정적인 삶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연휴 보내세요.
**이번 기사는 Alphonse Mucha: The Spirit of Art Nouveau(Victor Arwas, Jana Brabcova-Orlikova, Anna Dvorak)을 중심으로 알폰스 무하(레나테 울머 지음, 이원제 옮김, 마로니에북스-Taschen 펴냄), Alphonse Mucha(Sarah Mucha 지음), Alphonse Maria Mucha(Jiri Mucha 지음), 알폰스 무하, 유혹하는 예술가(로잘린드 오르미스턴 지음, 김경애 옮김, 한겨레엔 펴냄)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사람들은 부러운 눈으로 그 ‘행운아’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별 볼 일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살던 그 남자가, 우연히 세계 최고 여배우의 눈에 든 후 한순간에 떼돈을 벌게 됐거든요. 그 후로도 남자의 행운은 이어졌습니다. 여배우 덕분에 유명해진 남자에게 광고 제의가 쏟아졌고, 이는 더욱 큰돈과 명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전 유럽에서 스타가 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으니 그야말로 ‘인생 역전’이었습니다.
남자도 늘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난 정말 운을 타고난 사람이야.” 그의 이름은 알폰스 무하(1860~1939). 하지만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그 행운 뒤에는 숨겨진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파헤쳐 봅니다.
무명 화가의 행운
무하의 시작은 초라했습니다. 1860년 모라비아(지금의 체코)에서 태어난 무하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지만 일찌감치 재능을 인정받지는 못했습니다. 열여덟 살이던 1878년, 프라하 미술 아카데미에 지원했을 때 면접관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봐, 젊은 친구. 세상에 화가는 많아. 자네가 더 잘 할 수 있는 다른 직업을 찾게나.” 하지만 무하는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화가의 길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이력서를 돌린 끝에 간신히 연극무대의 미술을 담당하는 회사에 취업하게 됐지만, 곧 구조조정에 휘말려 해고당하고 말았습니다. 실업자가 된 무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기차역에 갔습니다. 그리고 창구에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꺼내 올려놓은 뒤 역무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돈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 어딘가요?” 그렇게 받은 표에는 ‘모라비안 마을’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무작정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에서 무하는 대책 없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하의 그림을 본 마을 사람들이 “꽤 괜찮다”며 앞다퉈 그림을 사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무하는 우연히 도착한 동네에서 처음으로 ‘직업 화가’가 됐습니다. 무하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찾아온 마법 같은 행운은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렇게 마을 화가로 살던 어느 날, 마을 근처 ‘땅 부자’ 귀족(쿠엔 벨라시 백작)이 무하에게 저택 장식을 의뢰해 왔습니다. 무하는 열심히 그림을 그렸고, 귀족은 크게 만족했습니다. 운 좋게도 귀족은 예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데다 아주 관대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귀족은 무하를 후원하기로 결정하고 넉넉한 월급에 더해 살 집까지 줬습니다.
행운은 이어졌습니다. 귀족의 집에 놀러 온 독일 뮌헨 아카데미의 교수가 우연히 무하의 작품을 보고 “유학을 보내면 훨씬 더 작품이 좋아질 것 같다”고 조언해 준 겁니다. 자신이 신뢰하는 교수의 조언을 귀담아 들은 귀족은 무하를 뮌헨 아카데미에 유학시켜 줬고, 한술 더 떠 프랑스 파리의 명문 아카데미(줄리앙 아카데미) 학비까지 대 줬습니다. 그렇게 무하는 20대를 돈 걱정 없이 공부하며 보냈습니다.
‘세계 최고 여배우’의 선택
무하가 서른네 살이던 1894년, 그의 삶에서 가장 큰 행운이 찾아옵니다. 무하가 훗날 들려준 얘기는 이랬습니다. 명문 아카데미를 나와 파리의 화가가 됐지만 여전히 수입이 변변찮았던 무하. 그래서 남들이 모두 휴가를 가는 크리스마스 연휴에도 인쇄소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인쇄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혹시 지금 영업하나요?” “아, 예. 무슨 일이시죠?”“휴… 다행이다. 지금 큰일 났어요. 저 르네상스 극장 매니전데요. 지금 우리가 하는 연극 주연인 대배우, 사라 베르나르 씨 아시죠? 갑자기 베르나르 씨가 ‘연극 포스터가 맘에 안 든다’고 난리요. 워낙 ‘슈퍼스타’가 하는 말이니 어쩔 수 없이 새 포스터를 급하게 그려야 하는데, 지금 연 데가 여기밖에 없어서… 포스터 그릴 수 있죠? 빨리 그려 줄 수 있어요?”
다른 그림은 많이 그려봤어도 포스터는 한 번도 안 그려봤던 무하. 하지만 무하는 직감했습니다. 일생일대의 기회가 왔다고. “당연히 되죠.” 전화를 끊자마자 무하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밤을 꼴딱 새운 결과물은, 기존 파리 길거리에 붙어 있는 포스터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좋게 보면 참신했지만, 나쁘게 보면 포스터의 기본이 안 된 엉터리. 시안을 받아본 르네상스 극장 매니저의 표정이 구겨졌습니다. ‘망했구나. 연휴에 시간만 버렸네. 하던 일이나 마저 해야겠다.’ 지치고 실망한 무하는 인쇄소로 돌아와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울린 인쇄소 전화벨이 무하를 깨웠습니다. “저기, 극장인데요! 지금 바로 극장으로 오셔야겠어요!” 영문도 모르고 헐레벌떡 극장으로 달려간 무하. 직원의 손에 이끌려 분장실에 들어가자, 한 여성이 무하의 포스터 시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든 그 여성은 바로 베르나르였습니다. 베르나르는 환하게 웃으며 무하를 껴안았습니다. “마음에 쏙 들어요. 이걸로 할게요. 그리고, 우리 당장 계약해. 앞으로 같이 일해요.”
1895년 1월 1일부터 파리 길거리에 붙기 시작한 포스터는 그야말로 ‘대박’이 났습니다. “이건 가져야 해!” 파리 시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체면을 내던지고 면도칼로 벽에 붙은 포스터를 떼어내 집으로 가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도난 사건이 너무 많이 벌어진 나머지 극장 측은 포스터를 끊임없이 다시 찍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신드롬급 인기였습니다. 포스터 자체도 걸작이었지만, 이런 인기에는 다른 요인들이 더 크게 작용했습니다. 일단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사라 베르나르가 주인공이었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게다가 포스터가 풍기는 새로운 분위기는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라고 불리던 당시 분위기와 정확히 맞아떨어졌습니다.
당시 프랑스 파리의 공기는 미래에 대한 낙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전화와 철도, 엘리베이터, 여객선, 자가용, 비행기가 등장한 시대, 덕분에 인간이 꿈꾸던 많은 것들이 이뤄지고 문화가 꽃을 피웠던 시대였으니까요. 이런 성과의 상당 부분은 식민지 주민들을 착취한 덕에 이룩한 것이었지만, 세계의 문화 수도였던 파리 사람들은 이런 고통을 알지도, 설령 안다 해도 신경을 쓰지도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너무나도 아름다운 무하의 포스터는 ‘새로운 멋진 시대’의 이상에 딱 들어맞았습니다. 이 때 등장한, 무하의 그림처럼 꽃이나 식물이 많이 나오는 곡선 위주의 예쁜 미술 양식을 ‘아르 누보(Art Nouveau, 새로운 예술)’라 합니다. 포스터의 ‘대박’, 이를 계기로 베르나르와 맺은 6년에 걸친 장기 계약 덕분에 무하에게는 일감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포스터, 액세서리, 무대 디자인, 광고…. 기회를 잡은 무하는 자신의 기량을 꽃피웠습니다. 알폰스 무하라는 이름은 하나의 명품 디자인 브랜드가 됐고, 그의 이름은 전 유럽에 퍼졌습니다. 무하는 큰 부자가 됐습니다. 같은 시대 인상주의 화가들이 가난에 시달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30대의 나이로 부자가 된 무하는 누가 봐도 행운아였습니다.
사람들은 무하의 얘기를 듣고 그를 부러워했습니다. “시대를 참 잘 타고났단 말이야.” 무하도 자신이 운이 좋아서 성공했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운명이 나를 인도했다.” 그런데 훗날 연구자들에 따르면, 사실 무하의 이런 인생 이야기는 절반의 진실이었습니다.
무하의 가난과 불운
“나는 행복한 행운아였다”는 무하의 말과 달리 그의 삶에는 고통스러운 실패의 순간이 많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는 그림에 미쳐 있었습니다. 제대로 걷기도 전부터 무하는 연필, 분필, 석탄, 못 등 손에 집히는 모든 것을 사용해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외출할 때마다 마을 사람들과 풍경을 쉴 새 없이 스케치했습니다. ‘더 잘 그리고 싶다.’ 무하는 이런 일념으로 강박적인 수준의 노력을 거듭했습니다. 그래서 프라하 미술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탈락한 건 그에게 쓰디쓴 실패로 다가왔습니다.뮌헨과 파리 유학 시절에도 그는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자주 이렇게 혼잣말했다고 합니다. “그림만 그리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 파리 아카데미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125명의 학생 중 수석으로 졸업한 것도 이런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아버지는 일 중독자였다. 항상 ‘예술가가 뭔가를 이루려면 하루에 16시간씩 일해야 한다. 내 가장 귀중한 친구이자 동반자는 시간이다. 쓸데없는 일로 내 친구를 죽일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게으름을 그냥 봐 넘기지 못했고, 재능은 있지만 의지력이 없는 사람들이 인생을 허비하는 걸 못 견뎌 했다.”
이런 노력과 성품, 실력에 비하면 무하의 운은 사실 좋은 편이라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그가 첫 직장에서 잘린 건 회사가 큰 거래처를 잃은 탓에 갑자기 사세가 기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파리에서 아카데미를 수석 졸업한 뒤에도 무하는 여러 불운에 시달렸습니다. 그림값을 제때 받지 못해 콩으로 끼니를 때우는가 하면, 난방용 석탄을 살 돈이 없어서 병에 걸려 죽을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반면 그가 스스로 ‘행운’이라고 표현했던 일들은 대부분이 자신의 노력으로 쟁취한 것들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운 좋게 연휴에 인쇄소로 출근한 덕분에 베르나르의 눈에 들 수 있었다’는 무하의 얘기가 과장이었단 겁니다. 당시 신문 기사와 기록을 교차 검증해 보면 극장 측은 일찌감치 여러 화가에게 포스터 시안을 요청했고, 그 중 무하의 포스터를 골랐다고 합니다. 베르나르의 요구로 갑자기 포스터를 새로 만들게 됐다거나, 전화를 받은 사람이 무하밖에 없다거나, 베르나르가 직접 무하의 작품을 골랐다거나 하는 일 없이 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과정을 거쳐 무하의 작품을 선정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깁니다. 무하는 왜 자신의 행운을 과장하고 노력과 불운은 숨겼을까요.
노력하면 이뤄진다
무하의 아들을 비롯한 가족들이 남긴 말과 후대 연구자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무하는 사람들에게 ‘누구나 성실히 노력하면 행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다.” 인생은 본질적으로 아름다운 것이고,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기에 우리가 손만 뻗으면(노력하면) 잡을 수 있으며, 운명은 스스로 돕는 이를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고 무하는 믿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까지 전달하고 용기를 주기 위해서는, 단순한 말보다 그림이 제격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 갖가지 상징이 숨겨져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게 인물 뒤에 있는 원형의 후광과 이를 장식하는 꽃들입니다. 무하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는 인류를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입니다.무하는 미술과 거리가 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철학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가 포스터와 광고, 책 삽화 등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예술에 천착했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무하가 쓴 전시 서문에는 이런 생각이 잘 드러 있습니다. “예술은 굶주리고 목마른 영혼의 유일한 양분이다. 온 인류에게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것만이 온 세상을 가치있게 만드는 길이다.”
무하가 자신의 행운을 과장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던 것으로 무하 연구자들은 추정합니다. ‘여러분도 흔들리지 말고 자신의 길을 걸으세요. 저 같은 평범한 사람도 열심히 살았더니 이렇게 행운이 따라왔답니다.’ 전하고 싶었던 철학을 자신의 삶 이야기를 이용해 이렇게 다시 한번 강조했다는 거지요.
유행은 흘러가도
그러나 안타깝게도 무하의 이런 메시지는 시대와 유행이 바뀌면서 금세 잊혔습니다. 무하의 전성기는 1890년대 중반부터 1900년대 초중반까지 채 10년도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수없이 많은 작품을 제작하면서 무하의 창조력은 고갈돼 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전 작품에서 썼던 요소들을 반복하거나 짜깁기하는 빈도가 점차 잦아졌습니다. 사람들도 그의 화풍에 질리기 시작했습니다. 무하가 그린 포스터와 광고들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작품을 두고 “돈을 벌기 위해 그저 예쁘게, 보기 좋게만 그린 상업적인 작품” “재능 낭비”라고 깎아내리는 목소리마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벌어들인 많은 돈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사람 좋고, 세상 물정 모르고, 미술에만 집중하는 무하를 주변 사람들이 호구로 취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집세를 못 냈다” “휴가를 가야 하는데 휴가비가 없다” “면접 복장을 살 돈이 없다”고 주변 사람들이 앓는 소리를 할 때마다 무하는 주저하지 않고 돈을 빌려줬습니다. 하지만 빌려 간 돈을 갚은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도 무하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술적인 도전을 거듭했습니다. 40대 중반에는 파리를 떠나 미국으로 가 활동하며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쳤습니다. 50대에 접어든 1910년에는 고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체코 민족의 정신적인 뿌리인 ‘슬라브 신화’를 거대한 그림에 담기 시작한 겁니다. 성공한 예술가가 됐으니 조국에 봉사해야겠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작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체코 토박이 예술가들의 “외국물 먹은 사람이 체코에 대해 뭘 아느냐”는 반발과 텃세 때문에 제대로 전시되지조차 못했습니다.
그의 최후는 씁쓸했습니다. 1939년, 무하가 75세 때 나치 독일이 체코를 침략했습니다. 게슈타포(비밀경찰)는 유대인 공동체를 공개 지지한 무하를 끌고 가 심문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쇠약했던 무하는 심문 이후 앓아누웠습니다. 넉 달 뒤, 무하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나치 독일은 무하의 작품을 전시하는 걸 금기시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가 패망한 뒤에도 무하의 작품은 여전히 창고에 잠들어 있어야 했습니다. 이후 들어선 공산주의 정권이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부르주아의 퇴폐적인 그림”이라며 그의 작품을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하의 그림들은 대중의 마음속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무작정 거부하고 배척하기엔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덕분에 무하 작품은 세월의 흐름과 그 모든 오해, 탄압에도 불구하고 잊히지 않고 훗날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을 미술의 매력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순정만화에 등장하는 꽃 배경의 ‘원조’가 무하일 만큼 후대 문화에 그가 미친 영향력은 생각보다 넓고 깊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운 한 편의 연극과 같다는 것. 지금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더라도 묵묵히 노력하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온다는 것. 운명이 당신을 돕고 있다는 것. 그래도 힘들 때는 주변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며 마음을 달래라는 것. 무하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단순한 ‘예쁨’을 넘어 삶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담은 작품, 작가 자신의 열정적인 삶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연휴 보내세요.
**이번 기사는 Alphonse Mucha: The Spirit of Art Nouveau(Victor Arwas, Jana Brabcova-Orlikova, Anna Dvorak)을 중심으로 알폰스 무하(레나테 울머 지음, 이원제 옮김, 마로니에북스-Taschen 펴냄), Alphonse Mucha(Sarah Mucha 지음), Alphonse Maria Mucha(Jiri Mucha 지음), 알폰스 무하, 유혹하는 예술가(로잘린드 오르미스턴 지음, 김경애 옮김, 한겨레엔 펴냄)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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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