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정치인들의 중앙은행 괴롭히기
권력자와 정치인에게 ‘돈 풀기’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눈먼 돈인 국가 재정을 투입해 경기를 부양하면 당분간은 모두가 환호하기 마련이다. 뒷감당은 통상 중앙은행이 떠맡는다. 넘치는 유동성이 초래한 인플레이션을 고금리로 조이다 보면 어느새 ‘공공의 적’이 돼 있다. 어쩌면 그게 중앙은행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세계 76개국에서 크고 작은 선거를 치르는 올해엔 국가마다 재정 포퓰리즘이 더욱 득세하는 움직임이다. 중앙은행이라고 해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때로는 포퓰리즘 정책이 시행되기 전에 선제 대응에 나서기도 한다. 얼마 전 태국 중앙은행(BOT)이 그런 사례를 보여줬다.

중앙은행 vs 포퓰리즘

BOT는 지난달 태국 정부에 긴급 서한을 발송했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현금성 지원금 지급을 재고해야 한다고 권고하는 내용이었다. 태국 집권당인 프아타이당은 지난해 5월 총선을 치르면서 ‘국민 1인당 5만밧(약 185만원) 지원’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다. 취약계층을 지원하고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명분에서였다. 야당과 경제학계에서 재정 악화를 우려하자 올해 초에는 지급 대상을 5000만 명으로 한정하고, 지원금도 5만밧에서 1만밧으로 조정하기로 했다. 이렇게 규모를 줄였는데도 소요되는 예산이 5000억밧(약 18조원)에 달했다.

BOT는 서한에서 “정부 계획은 장기적인 재정 부담, 국가 신용등급 강등, 투자자 신뢰 상실 등의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며 “태국 경제가 부진한 것은 구조적 문제 때문이어서 경기 부양책은 일시적 효과에 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BOT는 정부의 기준금리 인하 요구에도 응하지 않고 있다. 세타 타위신 태국 총리는 지난해 8월 취임한 이후 수차례 “경제 활성화를 위해 금리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BOT는 작년 11월부터 지난달까지 세 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연 2.5%로 동결했다. 잇따라 금리 인하가 좌절되고 현금성 지원금도 논란이 되자 타위신 총리는 지난달 겸직하던 재무부 장관직을 내려놓기로 했다.

국민도 반대하는 '돈 풀기'

한국의 상황도 태국과 비슷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총선을 앞두고 지난 3월 민생회복지원금을 제안했다. 모든 국민에게 1인당 25만원씩, 총 13조원을 지급하자는 주장이다.

한국은행은 역시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달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 참석차 방미 중 워싱턴DC에서 한 특파원 간담회에서 민생회복지원금과 관련해 “근시안적인 시각”이라고 비판했다. 이 총재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많은 문제는 돈을 나눠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어렵겠지만 사회적으로 구조조정을 통해 해결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한은만 반대하는 건 아니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지난 2일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민생회복지원금을 반대한다는 응답은 48%로 찬성한다는 응답(46%)보다 많았다.

한은 뒤엔 성숙한 국민들까지 ‘뒷배’로 버티고 있다. 이미 국민들은 넘치는 유동성이 초래한 고금리의 고통을 충분히 겪었다. 선거철마다 선심은 권력자와 정치인이 쓰고 뒤치다꺼리는 중앙은행이 떠안는 재정 포퓰리즘은 이제 멈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