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치몬드에 있는 셰브론 정유 시설 옆에 태양광 패널이 보인다.  로이터 연합뉴스
2023년 12월 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치몬드에 있는 셰브론 정유 시설 옆에 태양광 패널이 보인다. 로이터 연합뉴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지난 3월 6일 기후 공시 의무화 규칙(The Enhancement and Standardization of Climate-Related Disclosures for Investors) 최종안을 통과시켰다. 최초로 미국 전역에 기후 관련 공시를 의무화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지만 2022년 최초안과 비교할 때 여러 면에서 후퇴한 것으로 평가된다.

첫째, 대상 기업이 달라졌다. 최초안은 모든 기업이 대상이었으나 최종안은 비상장 기업 혹은 낮은 유동 비율과 적은 매출액 요건에 해당하는 상장 기업(Smaller Reporting Company, SRC)이 배제됐다. 시가총액의 95%에 달하는 기업이 의무 공시 대상이지만, 기업 수로 보면 약 60%는 공시 의무가 면제됐다. 둘째, 최초안과 달리 특정 온실가스가 투자자에게 중대할 경우에만 공시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셋째, 스코프3(총외부배출량) 공시가 면제됐다. 원부자재 조달, 제품 판매, 투자와 같은 간접적 공급망 배출량은 의무 공시 대상이 아니다. 예를 들어 애플은 아이폰 판매부터 폐기까지의 배출량, 투자은행 JP모간은 피투자 기업의 배출량을 측정하고 공개할 의무가 사라졌다.

스코프3 없어도 까다로운 SEC 규칙

마지막으로 적용 시점이다. 2022년 3월 초안 발표 당시 로드맵은 ‘2023년 적용, 2024년 리포팅 시작’이었다. 하지만 최종안 통과가 2년가량 늦어졌고, 기업에 준비할 시간을 준다는 이유로 최종안 통과와 보고 개시 시점 간 간격이 벌어져 2025년 회계연도 실적을 2026년 공개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유럽에서는 기후 공시안이 확정된 지 오래고, 최근에는 또 하나의 게임체인저가 될 것으로 거론되는 기업지속가능성실사지침(CSDDD), 즉 ‘공급망실사법’을 통과시켰다. 한편 여러 국가가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의 표준을 수용해 자국 기후 공시 로드맵을 발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SEC가 초안에서 후퇴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배경은 공화당과 그 배후인 강력한 미국 화석연료업계, 이른바 대형 석유 기업의 반발이다. 최종안 표결이 3 대 2였는데, 공화당계 위원들은 기후 공시 도입 자체를 반대했다. 이들은 SEC가 헌법이 부여한 지위를 남용한다는 입장이며, 공화당계 여러 주는 법안 통과 직후 소송을 벼르고 있다. 제도의 적법성을 두고 법적 논란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돼 최종안대로 실행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사실 미국의 독자 행보는 그리 낯설지 않다. 클라이밋 액션 100+(CA 100+)가 대표 사례다. 세계 최대 온실가스배출 기업들이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게 돕는 투자자 주도의 이니셔티브다. 2017년 시작해 700개 이상 글로벌 투자회사가 가입했고, 170개 이상 기업에 관여하고 있다. 그런데 유독 미국 국적 거대 자산운용사들만 올초부터 속속 탈퇴를 선언하고 있다.

글로벌 1위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미국 본사는 탈퇴하고 글로벌 지사로 참여도를 낮췄다. 핌코, 스테이트스트리트에 이어 3월에는 인베스코까지 탈퇴했다. CA 100+가 추진하기로 한 2단계 계획에 대한 부담 때문으로 추정된다. 1단계는 기업의 기후 관련 공시와 탄소중립 목표 설정 요구가 골자이고, 2단계는 목표 실행에 초점을 맞춰 거버넌스까지 관여 활동을 확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계 자산운용사의 탈퇴 행렬은 CA 100+ 동조가 소송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는 내부 검토를 받아들인 결과로 읽힌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들려오는 반(反)ESG(환경·사회·지배구조) 뉴스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안 될 것으로 판단된다. 미국 내에서 기후 공시 자체가 배척되는 분위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스코프3가 빠졌지만 SEC 기후 공시가 만만한 것은 아니다. 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공개 협의체(TCFD) 프레임워크의 4대 핵심 범주인 ‘기후 위기 대응 의사결정 구조’ ‘전략’ ‘위험관리’ ‘지표(metric)와 목표’에서 지표만 완화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SEC 기후 공시에 ‘1% 룰’이 있다는 점이다. 1% 룰 아래에서는 기후변화로 인한 재무적 영향이 재무제표상 주요 항목(total line item) 수치의 1% 이상이면 반드시 재무적으로 반영하고 주석 사항으로 설명해야 한다.

싱가포르, 비상장사도 의무화

투자자 관점에서 보면 중대성에 입각한 까다로운 규칙이다. SEC는 스코프3를 배제했지만, 미국 주정부 중 최대 경제 규모인 캘리포니아는 2024년부터 스코프3를 포함한 기후 공시 의무화를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미국 자산운용사들은 투자자를 위한다는 원칙을 강조하지만 사실상 모호한 데다 항상 실리에 민감한 의사결정을 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싱가포르의 회계 및 기업 규제당국(ACRA)과 싱가포르 증권거래소 규제기관(SGX RegCo)은 2월 28일 기후 공시 의무화 일정을 확정해 발표했다. 상장 기업은 2025년에 2024 회계연도 실적을 공시할 때부터 규정에 따라 기후 관련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스코프3 배출량 공개도 의무화했는데, 공시 시작 연도는 1년 늦은 2026년이다. 아울러 공시 후 2년이 지나면 스코프1과 스코프2 배출량에 대한 제3자 인증도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기후 공시 의무화 대상은 상장 기업에 국한되지 않고 2027년부터 일정 규모 이상(매출액 10억달러, 자산 5억달러) 비상장 기업으로 확대된다. 단, 비상장 기업은 2029년 전까지 스코프3 배출량 공개 의무가 면제된다. 전체적으로 ISSB S2(기후 관련 의무 공시 표준안)는 물론 인증을 의무화한 EU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 기준까지 받아들이며 싱가포르 상황에 맞게 자체 기준안과 로드맵까지 수립한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번 기후 공시 의무화 결정 전부터 싱가포르의 지속가능성 정보공개 의무화의 진도가 꽤 나갔다는 것이다. 2021년 싱가포르 증권거래소(SGX)는 모든 상장기업이 2022년부터 준수 또는 설명 기준(comply or explain basis)에 따라 TCFD에 맞춰 기후 공시를 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TCFD가 기후 공시의 근간을 이룬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산업별로 2023년까지 금융업·농림축산물·임업·에너지, 2024년까지 소재·건축물·운송업으로 의무화 대상을 확장해왔다. 2023년부터 ISSB, 유럽연합(EU), 미국에서 기후 공시 최종안이 속속 확정 발표되기 꽤 오래전부터 싱가포르는 기후 공시 의무화 로드맵을 진행해온 것이다. 일본과 또 다른 아시아 금융 허브인 홍콩도 유사한 과정을 밟고 있다.

기후 공시는 기후 금융의 기초 인프라

한국회계기준원 지속가능성 공시기준위원회(KSSB)는 지난 4월 30일 국내 지속가능성 공시기준 공개초안을 발표했다. 제2호에는 기후 관련 기회 및 위험에 관한 공시 요구 사항을 담았다. KSSB 공개초안은 ISSB가 2023년 6월 발표한 공시 기준의 내용을 비교적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KSSB는 '글로벌 정합성 추구'라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 발표에서 도입 일정과 의무화 대상, 즉 로드맵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공시의 형식이나 인증도 빠졌다. 스코프3 배출량 공시는 의무화 여부를 추후 관계 부처 협의를 통해 정하기로 했다. 예민한 내용에 대한 의사결정을 최종안 확정 시점으로 미룬 것이다.

기후 공시 의무화는 기업의 리스크를 노출한다. 기업이 반길 리 없다. 하지만 글로벌 투자자들은 기업의 기후변화 대응책을 묻고 있고, 대응 계획이 미흡한 곳에는 변화를 요구한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해당 주식을 멀리한다. 바로 코리아 디스카운트다.

스코프 3보다 더 무서운 '1% 룰'…美·싱가포르 기후 공시 점검
제조 현장도 마찬가지다. SEC는 빠져도 스코프3와 재생에너지 100% 전환 이니셔티브(RE100)의 영향으로 글로벌 공급망에서 온실가스 감축이 미진한 회사는 자리를 지키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3월 19일 정부는 2030년까지 기후 금융에 재정 420조원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기후 공시는 기후 금융 활성화를 위해 단단하게 세워야 할 기초 인프라다. 기후 공시 도입을 놓고 한국의 의사결정이 지연될수록 기업과 투자자의 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으며 국가 차원의 기후 대응 역시 지연될 것이다.

신지윤 그린피스 기후에너지 전문위원·전 KTB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