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세련된 것은 어떤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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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자람의 소리
최근에 전통음악 관련한 수업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한 대학의 석박사 과정을 다니고 있는 전통 예술가들이 듣는 수업으로, 필자는 전통 판소리 일부를 전수하고 그를 개개인의 시야로 충분히 들여다본 후 그로부터 새로이 파생되는 자신들의 창작물을 만들기까지의 여정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커리큘럼이 이러다 보니 자연스레 전통에 뿌리를 두고 창작 작업을 하는 필자의 창작이나 공연예술에 관한 견해가 수업 도중 언어로 흘러나오는데, 엊그제 한 친구가 질문을 건넸다.
“세련됨에 대해 여러 번 언급 하셨는데, 선생님이 생각하는 세련됨은 무엇인가요?”
“아, 제가 그렇게 세련됨에 대해 말을 자주 했나요?”
“네, 두세 번 언급 하신 것 같아요.”
아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필자는 세련됨을 중요시한다. 그리고 심지어 그를 수업 중에 주장하기도 한다.
이번 칼럼은 공연을 만드는 직종인 필자에게 세련됨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써보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비논리적인 글이 될 것이다. “나는 세련됨을 추구한다.”라는 문장이 지목하는 분야를 공연예술, 특히 판소리가 콘텐츠인 공연예술로 고정하여 이야기를 해보겠다. 필자가 판소리를 창작하기 시작한 데는 여러 가지 질문들이 있었고 그중에 세련됨과 관련한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1. 왜 내가 보고 겪는 판소리 관련 공연은 모두 비슷하게 느껴질까?
2. 내가 좋아하는 현대무용 공연이나 음악 콘서트와 같은 공연들에 쓰이는 조명이나 무대와 의상을, 판소리 관련 공연에서도 활용할 수 있을까?
3. 내가 즐기는 공연예술들과 같은 외형을, 판소리도 가질 수 있을까?
4. 내가 즐기는 공연예술들과 같은 깊이의 질문을, 창작 판소리도 가질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이 던져진 시기는 1998년에서 2000년대 초를 넘어가는 시점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 판소리와 관련한 모든 공연에 대한 필자의 감상은 ‘비슷하게 촌스럽다’였다. 촌스럽다는 게 뭘까? 언어의 의미는 ‘어울린 맛과 세련됨이 없이 어수룩한 데가 있다’는 뜻이다.
2024년 현재 촌스러움은 심지어 하나의 복고적 패션의 양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허나 위의 질문들을 던지던 2000년대 초반은 촌스러운 것을 극도로 지양하던 시대이다(적어도 필자는 그랬다). 그 당시 필자가 경험한 판소리 관련 공연들은 ‘늘 어디서 본 듯하고 그래서 상상이 가능한 형상의 미장센을 가진 공연’이었다.
더불어 ‘알던 내용의 반복이기에 내게 새로운 사고를 선사하지 못하는 공연’이기도 했다. - 이는 사실 큰 오류들이 담긴 감상이다. 알던 내용의 반복이 새로운 사고를 가져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고전을 지속적으로 즐길 수 있는 힘은 동일한 프로그램을 전수자 각자가 각고의 수련과 사고의 시간을 보내어 새로운 미로 접근하는 것에 있다 생각한다. 그러나 그 당시의 필자는 그러한 견문이 없었고, 더불어 그러한 견문을 가지고 판소리에 임하는 작업자를 볼 기회를 놓쳤던 것 같다.
‘촌스럽다’라고 말할 때 보편적으로 공감하는 어떠한 인식, 낡고 고루하고 뻔한 것이라는 이미지가 판소리라는 장르에 잔뜩 그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시대가 필자가 판소리를 만들기 시작한 시대이다.
그래서 창작 판소리 작업을 시작할 때 내가 향유하는 타 장르 공연들이 가진 여러 요소를 적극 활용하여 서사를 뒷받침하는 시도를 했다. 연출, 무대 디자이너, 조명 디자이너, 의상 디자이너, 음향 디자이너, 배우, 안무, 음악팀과 수많은 악기 등 소위 말하는 ‘볼거리가 풍성한’ 판소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 당시 추구한 세련됨은 기존의 판소리 공연 이미지에 반기를 드는 데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브레히트의 희곡들과 만나 굉장한 시너지를 일으켰다. 그 결과로 <사천가>와 <억척가>가 나왔고, 이 두 작품은 2000년대 초반의 판소리의 대중화와 현대화에 큰 성공을 거둔 상징적인 작업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자람 '억척가' (LG아트센터 2013년 기획공연 CoMPAS13)]
그리고 이 두 작품의 성공 직후 필자의 세련됨에 대한 가치관은 큰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이는 시대의 흐름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필자의 사유가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한 것일 수도 있다. 참으로 흥미롭게도 기존의 판소리 공연의 이미지를 벗어나는 것에 성공한 이후 필자가 집중하기 시작한 것은 ‘전통 판소리 본연의 세련됨’이다. 그것은 비어있음에도 꽉 차 있는 것, 단순하고도 깊은 것, 오로지 기본적인 것의 완성도로 관객을 설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 판소리를 지속적으로 연마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며, 전통 판소리로부터 큰 매력을 느끼는 일이 멈추지 않는 경험을 하며 얻어진 것이다.
그렇다. 고전 예술 그러니까 전통 판소리는, 알고 있는 단순한 이야기로 현재의 나를 끊임없이 사로잡는 미지의 깊이를 가진 엄청난 예술이다. 2000년대 초반 느꼈던 전통 판소리에 대한 촌스러움은 사실 전통 판소리를 재현하는 고정관념이 촌스럽다고 느꼈던 것이지, 이 예술 자체는 엄청나게 세련된 예술적 구성을 갖추고 여태까지 세기를 걸쳐 살아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 변화는 창작자로서의 필자에게 굉장히 많은 질문을 안겨준다. 세련됨이란 무엇인가? 시대마다 개인마다 다른 세련됨을 어떻게 추구하겠다는 말인가? 나는 수업 때 어떠한 이유로 세련됨을 언급했을까? 좋은 질문을 던져준 친구에게 돌려주는 대답으로 이 짧은 글을 마무리하겠다.
“지금의 제게 ‘와, 저거 정말 세련됐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들은 제 예상을 뛰어넘는 창작자의 자유로움과 그를 위한 그 창작자의 지난한 고뇌의 시간이 보이는 작품입니다. 그 시간들이 무대에서 느껴질 때 나는 경이로움과 존경을 느껴요. 세련됨이란 사실 개개인의 취향일 텐데, 제게 세련된 것은 화려한 무대가 아니에요. 거대한 자본도 아닌 것 같습니다. 밀도가 높은 무대로 - 그게 사유이든 기술이든 - 저를 놀라게 하는 것이에요. 그러한 세련됨 앞에서는 조금 숙연한 기분도 드는 것 같아요. 저 또한 그렇게 관객을 놀라게 하고 싶습니다.”
소리꾼 이자람
“세련됨에 대해 여러 번 언급 하셨는데, 선생님이 생각하는 세련됨은 무엇인가요?”
“아, 제가 그렇게 세련됨에 대해 말을 자주 했나요?”
“네, 두세 번 언급 하신 것 같아요.”
아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필자는 세련됨을 중요시한다. 그리고 심지어 그를 수업 중에 주장하기도 한다.
이번 칼럼은 공연을 만드는 직종인 필자에게 세련됨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써보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비논리적인 글이 될 것이다. “나는 세련됨을 추구한다.”라는 문장이 지목하는 분야를 공연예술, 특히 판소리가 콘텐츠인 공연예술로 고정하여 이야기를 해보겠다. 필자가 판소리를 창작하기 시작한 데는 여러 가지 질문들이 있었고 그중에 세련됨과 관련한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1. 왜 내가 보고 겪는 판소리 관련 공연은 모두 비슷하게 느껴질까?
2. 내가 좋아하는 현대무용 공연이나 음악 콘서트와 같은 공연들에 쓰이는 조명이나 무대와 의상을, 판소리 관련 공연에서도 활용할 수 있을까?
3. 내가 즐기는 공연예술들과 같은 외형을, 판소리도 가질 수 있을까?
4. 내가 즐기는 공연예술들과 같은 깊이의 질문을, 창작 판소리도 가질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이 던져진 시기는 1998년에서 2000년대 초를 넘어가는 시점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 판소리와 관련한 모든 공연에 대한 필자의 감상은 ‘비슷하게 촌스럽다’였다. 촌스럽다는 게 뭘까? 언어의 의미는 ‘어울린 맛과 세련됨이 없이 어수룩한 데가 있다’는 뜻이다.
2024년 현재 촌스러움은 심지어 하나의 복고적 패션의 양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허나 위의 질문들을 던지던 2000년대 초반은 촌스러운 것을 극도로 지양하던 시대이다(적어도 필자는 그랬다). 그 당시 필자가 경험한 판소리 관련 공연들은 ‘늘 어디서 본 듯하고 그래서 상상이 가능한 형상의 미장센을 가진 공연’이었다.
더불어 ‘알던 내용의 반복이기에 내게 새로운 사고를 선사하지 못하는 공연’이기도 했다. - 이는 사실 큰 오류들이 담긴 감상이다. 알던 내용의 반복이 새로운 사고를 가져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고전을 지속적으로 즐길 수 있는 힘은 동일한 프로그램을 전수자 각자가 각고의 수련과 사고의 시간을 보내어 새로운 미로 접근하는 것에 있다 생각한다. 그러나 그 당시의 필자는 그러한 견문이 없었고, 더불어 그러한 견문을 가지고 판소리에 임하는 작업자를 볼 기회를 놓쳤던 것 같다.
‘촌스럽다’라고 말할 때 보편적으로 공감하는 어떠한 인식, 낡고 고루하고 뻔한 것이라는 이미지가 판소리라는 장르에 잔뜩 그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시대가 필자가 판소리를 만들기 시작한 시대이다.
그래서 창작 판소리 작업을 시작할 때 내가 향유하는 타 장르 공연들이 가진 여러 요소를 적극 활용하여 서사를 뒷받침하는 시도를 했다. 연출, 무대 디자이너, 조명 디자이너, 의상 디자이너, 음향 디자이너, 배우, 안무, 음악팀과 수많은 악기 등 소위 말하는 ‘볼거리가 풍성한’ 판소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 당시 추구한 세련됨은 기존의 판소리 공연 이미지에 반기를 드는 데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브레히트의 희곡들과 만나 굉장한 시너지를 일으켰다. 그 결과로 <사천가>와 <억척가>가 나왔고, 이 두 작품은 2000년대 초반의 판소리의 대중화와 현대화에 큰 성공을 거둔 상징적인 작업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자람 '억척가' (LG아트센터 2013년 기획공연 CoMPAS13)]
그리고 이 두 작품의 성공 직후 필자의 세련됨에 대한 가치관은 큰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이는 시대의 흐름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필자의 사유가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한 것일 수도 있다. 참으로 흥미롭게도 기존의 판소리 공연의 이미지를 벗어나는 것에 성공한 이후 필자가 집중하기 시작한 것은 ‘전통 판소리 본연의 세련됨’이다. 그것은 비어있음에도 꽉 차 있는 것, 단순하고도 깊은 것, 오로지 기본적인 것의 완성도로 관객을 설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 판소리를 지속적으로 연마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며, 전통 판소리로부터 큰 매력을 느끼는 일이 멈추지 않는 경험을 하며 얻어진 것이다.
그렇다. 고전 예술 그러니까 전통 판소리는, 알고 있는 단순한 이야기로 현재의 나를 끊임없이 사로잡는 미지의 깊이를 가진 엄청난 예술이다. 2000년대 초반 느꼈던 전통 판소리에 대한 촌스러움은 사실 전통 판소리를 재현하는 고정관념이 촌스럽다고 느꼈던 것이지, 이 예술 자체는 엄청나게 세련된 예술적 구성을 갖추고 여태까지 세기를 걸쳐 살아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 변화는 창작자로서의 필자에게 굉장히 많은 질문을 안겨준다. 세련됨이란 무엇인가? 시대마다 개인마다 다른 세련됨을 어떻게 추구하겠다는 말인가? 나는 수업 때 어떠한 이유로 세련됨을 언급했을까? 좋은 질문을 던져준 친구에게 돌려주는 대답으로 이 짧은 글을 마무리하겠다.
“지금의 제게 ‘와, 저거 정말 세련됐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들은 제 예상을 뛰어넘는 창작자의 자유로움과 그를 위한 그 창작자의 지난한 고뇌의 시간이 보이는 작품입니다. 그 시간들이 무대에서 느껴질 때 나는 경이로움과 존경을 느껴요. 세련됨이란 사실 개개인의 취향일 텐데, 제게 세련된 것은 화려한 무대가 아니에요. 거대한 자본도 아닌 것 같습니다. 밀도가 높은 무대로 - 그게 사유이든 기술이든 - 저를 놀라게 하는 것이에요. 그러한 세련됨 앞에서는 조금 숙연한 기분도 드는 것 같아요. 저 또한 그렇게 관객을 놀라게 하고 싶습니다.”
소리꾼 이자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