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노키즈존 500곳?
꽤 오래전 일이다. 가족과 여름휴가차 들른 8월의 해운대는 찌는 듯이 더웠다. 한참을 헤매다가 빙수 맛집이라고 추천받은 카페에 들어갔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마주하며 들어서는 순간, 주인이 다가오며 훠이훠이 나가라고 손사래를 쳤다. “저희는 그런 곳이 아니에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서 당혹스러웠는데, 설명은 간단했다. 노키즈존이니 나가달라는 것이었다. ‘그런 곳’을 찾아서 또 싸돌아다닐 것도 짜증 났지만, 아이에게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가 더 난감했다.

한국에는 술집, 클럽 등을 제외하고도 노키즈존이 500곳 이상이라는 워싱턴포스트의 보도가 있었다. 2017년에 국가권익위원회가 노키즈존은 차별 행위라고 판단했음에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아이들과 연관된 안전사고가 발생할 때 배상 책임이 주로 업주에게 가는 법원 판결 영향이 큰 듯하다.

0.6명대까지 내려간 합계출산율을 어떻게든 끌어올리려는 노력이 국가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아이들의 출입을 금하는 공간을 만들고 있다. ‘맘충’이라는 단어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참고로 우리는 ‘아동이 행복한 나라’를 표방하며 5년마다 국가 주도로 아동정책기본계획을 세우고 있는 나라다. 아동의 행복을 차단한 노키즈존 가게들이 세금을 더 납부하거나 벌금을 낸다는 소리도 들어보지 못했다.

MZ세대와 이야기해보면 1990년대 중반생까지는 엄마가 외출하셨을 때 이웃 아줌마가 돌봐준 기억을 많이들 갖고 있다. 지금 20대는 그런 경험이 별로 없다. 아이 하나 키우는 데 온 동네가 필요하다는 말은 아련한 추억이 돼버렸고, 우리네 삶도 그만큼 각박해졌다. 물론 맞벌이 부부도 훨씬 늘어났다.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이나 가게가 줄어들수록 아이들이 사회를 경험하고 배울 기회는 없어진다. 사람이 공간을 만들지만, 건물도 우리를 키워낸다. 공공장소에서는 남을 배려해야 함을,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어떤 것인지를 우리는 공간에서 배운다. 아이들은 공간에서 공동체를 체험하며 자라는 것이 맞다.

천도교주 손병희의 사위인 소파 방정환은 1923년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어린이선언문을 발표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만민평등을 내세운 천도교 사상은 소파가 어린이라는 단어를 만들고, 짧은 생애를 색동회 창립을 비롯한 어린이 사업에 몰두하게 하는 데 영향을 줬다. 100여 년 전 소파는 어린이를 인격의 주체로 한 단계 올렸고, 지금 우리는 어린이를 함께 있기 불편한 객체로 만드는 일들을 봐야 한다. 어린이에게도, 빙수 마니아인 소파에게도 한없이 미안해지는 5월 5일 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