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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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 대학에서 근무하다 미국 워싱턴 연구기관으로 파견된 40대 일본인 남성은 최근 자주 싣는 아식스 운동화에 지름 1.5cm의 구멍이 두 개 뚫린 것을 발견했다. 같은 신발을 새로 사려고 했지만, 한 켤레에 60달러라는 것을 알고 마음을 접었다.

엔·달러 환율이 달러당 130엔 정도만 했어도 샀겠지만, 현실은 150엔대. 세금까지 더하면 1만엔에 가까운 금액이다. 일본에서 5000엔에 샀던 것을 생각하면 두 배에 달한다. 그는 올해 가을 귀국 때까지 운동화에 천을 덧댄 채로 버티기로 했다.

9일 아사히신문,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은 40여년 만의 ‘슈퍼 엔저’ 탓에 해외에서 ‘가난하게 사는 일본인’의 모습을 전했다.

고물가에 시달리는 미국의 생활비는 달러 기준으로도 비싸다. 이 일본인 남성은 월세와 자녀 보육료만 매달 4500달러 가까이 쓴다. 작년 여름 미국에 갔을 때 환율로는 62만엔 정도였는데, 지금은 68만엔이다.

일본에서 받는 월급과 연구비는 모두 엔화로 지급되기 때문에 더 부담이 크다. 지난달 말에는 달러당 160엔을 넘기도 했다. 환율은 매일 달라진다. 그는 “오늘 밤에라도 엔화를 달러로 바꿔 놓는 것이 좋을까라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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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성은 2012년에도 미국 동부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달러당 80엔 정도였다. 10년이 지난 지금 엔화 가치가 절반 가까이 떨어진 것이다. 그는 “10년 전엔 10달러(당시 약 800엔) 정도면 맛있는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며 “지금은 20달러(약 3000엔) 정도는 내야 밖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일본인 해외 유학생도 고달프긴 마찬가지다. 미국 유학에 필요한 토플 IBT 응시료는 245달러다. 엔화로는 4만엔에 가깝다. 일본인이 주로 치르는 토익(7810엔)의 다섯 배에 달한다.

한 20대 일본인 여성은 지난 3월 대학을 졸업하고 오는 9월 한국어학당에 들어가기 위해 아르바이트하고 있다. 1년 학비와 기숙사비를 합치면 1000만원이 넘는다. 1년 전 원당 0.102엔대였던 엔·원 환율은 현재 0.116엔대로 올랐다. 연간 경비는 15만엔 정도 늘어 120만엔에 달하게 됐다. 결국 유학생이 감소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사진=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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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투자자들은 슈퍼 엔저의 원인으로 일본은행을 지목하기 시작했다. 일본은행이 지난달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완화적 금융정책을 정상화하길 기대했지만, 오히려 금융완화의 필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엔화 약세는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 탓’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일본 당국의 환율 개입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엔 매수세에 따라 엔·달러 환율은 다소 진정된 모습이다. 그러나 엔화가 상승 반전하려면 일본은행의 금융정책이 정상화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우에다 총재는 과도한 엔저에는 금리 인상으로 대응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등 ‘궤도 수정’에 나선 모습이다. 특히 지난 7일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만난 뒤 뉘앙스가 바뀌고 있다. 일본 SMBC닛코증권 관계자는 “정치권으로부터 발언을 주의해달라는 얘기를 듣고 자세를 바꾼 것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도쿄=김일규 특파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