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천재라더니"…'20억짜리 외제차' 산 청년의 몰락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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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전시 중인
베르나르 뷔페(1928~1999)
천재 화가냐, 그저 그런 화가냐
그것이 문제로다
베르나르 뷔페(1928~1999)
천재 화가냐, 그저 그런 화가냐
그것이 문제로다
“뭐야, 서른 살도 안 됐는데 운전사 딸린 20억원짜리 롤스로이스를 타고 다닌다고? 호수가 딸린 성(城)에 살면서 원숭이까지 키워? 가난한 천재 예술가라더니….”
최고의 인기 화가였던 그 남자의 사진이 공개되자 사람들은 술렁였습니다. 상상했던 예술가의 모습과 잡지에 실린 남자의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거든요. 예술밖에 모르는 가난뱅이 청년인 줄 알았던 그가, 사실은 왕자님처럼 살고 있다니.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이런 위선자에게 그동안 우리가 속고 있었어!”
20대의 나이로 ‘피카소의 라이벌’, ‘프랑스 최고의 화가’로 불리던 화가 베르나르 뷔페(1928~1999). 그의 몰락은 이렇게 1956년 2월 4일 발간된 <파리 마치> 잡지의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됐습니다. 사진을 본 사람들은 뷔페에 대한 태도를 180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다작(多作)에 찬사를 보내던 사람들은 뷔페가 너무 작품을 성의 없이 빨리 그린다며 ‘돈벌이만 신경 쓰는 공장식 화가’라고 욕했습니다. 상류층이라면 뷔페의 작품을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한다던 사람들은 그를 ‘치과 대기실에나 걸릴 그림을 그리는 저질 화가’라 비하했습니다. 심지어 이렇게 말한 평론가도 있었습니다. “차라리 그가 20대에 죽었다면 영원히 위대한 화가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은 그 화가, 뷔페의 이야기를 풀어 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뷔페의 천재적인 재능이 싹을 틔운 건 이 시기였습니다. 추위를 피해 루브르 박물관의 난방 통풍구에서 몸을 녹이던 뷔페는 여러 명화를 접하고 그 그림들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뷔페의 중학교 선생님이 그 재능을 알아봤습니다. “너는 신동이야. 너는 꼭 그림을 그려야 한다. 추천서를 써줄 테니 프랑스 최고의 미술 학교에 가서 미술을 배우려무나.”
연합국의 반격으로 독일이 파리에서 물러난 1944년, 열여섯 살의 뷔페는 그렇게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에콜 데 보자르의 선생님도 뷔페의 그림을 보고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0년 후에는 네가 우리나라 최고의 화가가 될 거야.”
하지만 뷔페는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뛰어나서였습니다. “배우고 싶은 게 없어요. 저 혼자 그리겠습니다.” 1년 만에 그는 학교를 중퇴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좁고 더러운 자신의 작업실에 틀어박혀 혼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뷔페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분노와 고뇌, 우울을 캔버스에 거칠게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마음에 더 거센 소용돌이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밥도 제대로 먹지 않은 채 하루에도 몇 점씩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넉넉지 않은 형편 때문에 캔버스와 물감은 항상 부족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캔버스가 없으면 낡은 침대 시트를 찢어 만든 천을 썼고, 쓰다 버린 물감을 주워 쓰고, 그래도 물감이 모자라면 완성된 작품에서 물감을 긁어낸 뒤 재활용했습니다.
훗날 비평가들은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뷔페의 영혼은 너무나도 예민했다. 그래서 일상적인 삶도 그에게는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뷔페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건 그런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는 그에게 있어 배고픔을 채우려는 본능, 중독자가 약을 갈망하는 충동과도 같았다.” 소문은 서서히 미술계에 퍼졌습니다. “에콜 데 보자르를 중퇴한 가난한 젊은 천재가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더라.” 1947년 불과 열아홉 살의 나이에 연 개인전에서 그 소문은 사실로 확인됐습니다. 그리고 뷔페는 단숨에 파리 예술계의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온 세상이 뷔페의 성공을 돕는 것 같았습니다. 시대가 뷔페라는 사람의 등장을 애타게 기다렸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뷔페가 파리 미술계에 이름을 막 알리기 시작했을 때 마침 미술시장이 대호황을 맞은 게 대표적인 일이었습니다. “전쟁이 나면 그나마 가장 안전한 자산은 미술 작품이야.” 당시 부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습니다. 전쟁 기간 자신들의 보유 지폐가 휴지 조각이 되고, 공장을 빼앗기고, 갖고 있던 부동산이 포탄을 맞아 불타오르는 일을 숱하게 목격했으니까요. 반면 미술 작품은 그나마 숨기거나 빼돌리기 쉬웠습니다. 또 미술작품은 전쟁 중 암시장에서 많은 돈을 번 사람들이 자금을 세탁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뷔페의 작품은 그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투자처였습니다. 앞으로 값이 확 뛸 게 확실시됐으니까요.
기술의 발전마저 뷔페를 도왔습니다. 유럽에서는 당시 텔레비전의 본격적인 보급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병약한 천재 예술가의 면모를 가진 미남 뷔페는, 이런 텔레비전 시대의 ‘스타 화가’가 되기에 딱 적합했습니다.
그렇게 뷔페의 작품은 서서히 상류층을 상징하는 소품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상류층의 저녁 자리에서는 뷔페의 작품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예술을 좀 아는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유럽의 유명 미술관들도 앞다퉈 뷔페의 작품을 사 갔습니다. 문화 강대국인 프랑스가 뽑은 세계 최고 권위의 미술 행사인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국가대표 선수. 불과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연 대규모 회고전으로 관객 줄을 200m 늘어세우고 주변 도로를 마비시킨 최고 인기 작가. 미술 전문지가 꼽은 젊은 작가 1등. 뷔페를 두고 언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과 27살의 나이로 피카소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추월했다.” “피카소와 비견되는 재능.” 게다가 그는 작품을 정말 많이 그렸습니다. 20대 후반에 그는 이미 5000점 이상의 작품을 완성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그만큼 뷔페의 전시는 자주 열렸고, 대중은 그의 작품을 더 자주 보게 됐습니다.
그러니 뷔페가 엄청난 부자가 된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뷔페는 남프랑스의 성을 구입해 그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기자들의 질문 공세, 길을 걸을 때마다 몰려드는 사인 요청 등 파리에서 치르는 유명세에 지쳐서였습니다. 그리고 뷔페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그 성을 채웠습니다.
서른살이던 1958년, 뷔페는 아나벨이라는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머지않아 둘은 달콤한 신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행복에 젖어 있는 동안 자신에 대한 여론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안타깝게도 그는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1956년 잡지에 나온 뷔페의 사진은 이런 금기를 정면으로 건드렸습니다. 당시 사진에서 뷔페는 운전사가 딸린 은회색의 롤스로이스 실버 레이스에 오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차의 가치를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0억원 가량. 사진이 공개되자마자 전 유럽이 뷔페의 얘기로 떠들썩해졌습니다. 당시 고급 자동차는 지금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 사치품이었거든요. 각국 언론은 그를 ‘일주일에 4만파운드(현재 가치로 60억원)를 버는 남자’(타임) ‘붓으로 지폐를 찍어내는 청년’(파리 마치) ‘황금 팔을 가진 남자’(슈피겔)라고 불렀습니다. 좋은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곧바로 “뷔페는 위선자”라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여기엔 그의 작품과 이로 인해 형성된 이미지가 한 몫 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 뷔페는, 여전히 데뷔 당시의 불쌍하고 가난한 화가였습니다. 여전히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소박하고 거친 선으로 그려내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뷔페의 실제 삶은 달랐습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형편이 넉넉지 못한 이들이 많았던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성에 살면서 원숭이를 키우고, 롤스로이스를 타면서 그런 그림을 그려? 진정성이라는 게 전혀 없는 사람이잖아.” 뷔페에 대한 평가와 그의 명성은 급격하게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불운도 겹쳤습니다. 미술계의 대세가 뷔페의 작품 같은 구상미술(구체적인 형상이 있는 미술)에서 추상미술로 급격히 기운 겁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갓 문화부 장관이 된 앙드레 말로가 1959년 “진정한 미술은 추상미술”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게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이런 영향으로 뷔페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유럽의 제대로 된 미술관들은 그의 전시를 열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대중들은 여전히 뷔페의 그림을 좋아해 줬습니다. 덕분에 뷔페는 여전히 부자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판화와 우표 등으로 무수히 많이 복제돼 프랑스 전역의 가정과 사무실 벽에 붙었습니다. 도자기에 그림을 새기는 등 ‘아트 상품’도 내놨고, 1985년 나이키와 협업해 운동화 에디션을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뷔페의 이런 행보는 비평가와 동료 예술가들에게 경멸을 받았습니다. 한 비평가는 말했습니다. “뷔페의 슬픈 광대 그림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치과에 가본 적 없는 사람이다. 치과마다 그의 작품이 붙어있으니까.” 그는 말을 이었습니다. “뷔페는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증권거래소 벽의 렘브란트, 대기실의 라파엘로, 촌뜨기 티치아노로.” 다른 비평가는 말했습니다. “뷔페가 20대에 죽었더라면 너무 일찍 죽은 젊은 위대한 천재로 기억될 수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마지막 위대한 화가라고 불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너무 오래 살았다.” 지나치게 가혹한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뷔페 작품의 평균적인 질이 1960년대 이후 저하된 건 사실이었습니다. 새로운 차원의 발전을 이끌어내지도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뷔페가 “맨날 똑같은 작품만 그린다”고 비웃었습니다.
자신을 불태워 빛을 내는 유성처럼, 곧 꺼질 듯 위태롭지만 아름답게 불타오르는 천재. 전쟁의 고난과 위기를 너무나도 설득력 있게 묘사한 이 시대의 작가 뷔페는, 어느새 미술계에서 ‘형편없는 저속한 화가’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사실 뷔페는 평생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마음대로 살았을 뿐입니다. 그런 그를 세상은 저 하늘 끝까지 끌어올렸다가 가혹하게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세상을 떠난 후엔 또 새로운 평가를 내리려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고 있자면 질문이 꼬리를 뭅니다. 뷔페가 ‘가난한 척’을 하지 않았더라면 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10년 동안 천재로 불린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광대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뷔페는 위대한 화가인가요, 평범한 화가인가요?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한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얘기는 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의 삶이나 예술에 대한 평가는 시간의 흐름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그러니 후회하지 않으려면 순간의 분위기나 편견에 휩쓸려 속단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 보고 깊이 생각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 그런 다음에 내린 평가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 말이지요.
좋은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는 ‘Bernard Buffet: The Invention of the Modern Mega-artist’(Nicholas Foulkes 지음)를 중심으로 'Bernard Buffet: La Tourmente'(Yann le Pichon 지음), 'Bernard Buffet: The Retrospective'(Sylvie Buisson , Galerie Maurice Garnier 지음) 등을 참조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최고의 인기 화가였던 그 남자의 사진이 공개되자 사람들은 술렁였습니다. 상상했던 예술가의 모습과 잡지에 실린 남자의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거든요. 예술밖에 모르는 가난뱅이 청년인 줄 알았던 그가, 사실은 왕자님처럼 살고 있다니.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이런 위선자에게 그동안 우리가 속고 있었어!”
20대의 나이로 ‘피카소의 라이벌’, ‘프랑스 최고의 화가’로 불리던 화가 베르나르 뷔페(1928~1999). 그의 몰락은 이렇게 1956년 2월 4일 발간된 <파리 마치> 잡지의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됐습니다. 사진을 본 사람들은 뷔페에 대한 태도를 180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다작(多作)에 찬사를 보내던 사람들은 뷔페가 너무 작품을 성의 없이 빨리 그린다며 ‘돈벌이만 신경 쓰는 공장식 화가’라고 욕했습니다. 상류층이라면 뷔페의 작품을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한다던 사람들은 그를 ‘치과 대기실에나 걸릴 그림을 그리는 저질 화가’라 비하했습니다. 심지어 이렇게 말한 평론가도 있었습니다. “차라리 그가 20대에 죽었다면 영원히 위대한 화가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은 그 화가, 뷔페의 이야기를 풀어 봅니다.
가난한 천재
뷔페의 아버지는 가정에 관심 없는 바람둥이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때문에 늘 우울했습니다. 해가 잘 들지 않는 어두운 집안에는, 그래서 자주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습니다. 극도로 예민하고 섬세한 감성을 갖고 태어난 뷔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내성적인 아이로 자라났습니다. 열두 살이던 1940년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은 이런 뷔페의 마음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면서 4년에 걸친 독일의 파리 점령이 시작된 겁니다. 문화와 예술이 꽃피던 풍요로운 도시 파리는 하루아침에 좌절과 굴욕, 엄격한 통제의 공간으로 변했습니다. 독일군의 식량 배급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석탄이 부족해 불을 때지 못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얼어 죽었고, 전염병이 창궐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어린 뷔페의 마음은 끝없는 우울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아이러니하게도 뷔페의 천재적인 재능이 싹을 틔운 건 이 시기였습니다. 추위를 피해 루브르 박물관의 난방 통풍구에서 몸을 녹이던 뷔페는 여러 명화를 접하고 그 그림들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뷔페의 중학교 선생님이 그 재능을 알아봤습니다. “너는 신동이야. 너는 꼭 그림을 그려야 한다. 추천서를 써줄 테니 프랑스 최고의 미술 학교에 가서 미술을 배우려무나.”
연합국의 반격으로 독일이 파리에서 물러난 1944년, 열여섯 살의 뷔페는 그렇게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에콜 데 보자르의 선생님도 뷔페의 그림을 보고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0년 후에는 네가 우리나라 최고의 화가가 될 거야.”
하지만 뷔페는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뛰어나서였습니다. “배우고 싶은 게 없어요. 저 혼자 그리겠습니다.” 1년 만에 그는 학교를 중퇴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좁고 더러운 자신의 작업실에 틀어박혀 혼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뷔페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분노와 고뇌, 우울을 캔버스에 거칠게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마음에 더 거센 소용돌이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밥도 제대로 먹지 않은 채 하루에도 몇 점씩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넉넉지 않은 형편 때문에 캔버스와 물감은 항상 부족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캔버스가 없으면 낡은 침대 시트를 찢어 만든 천을 썼고, 쓰다 버린 물감을 주워 쓰고, 그래도 물감이 모자라면 완성된 작품에서 물감을 긁어낸 뒤 재활용했습니다.
훗날 비평가들은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뷔페의 영혼은 너무나도 예민했다. 그래서 일상적인 삶도 그에게는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뷔페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건 그런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는 그에게 있어 배고픔을 채우려는 본능, 중독자가 약을 갈망하는 충동과도 같았다.” 소문은 서서히 미술계에 퍼졌습니다. “에콜 데 보자르를 중퇴한 가난한 젊은 천재가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더라.” 1947년 불과 열아홉 살의 나이에 연 개인전에서 그 소문은 사실로 확인됐습니다. 그리고 뷔페는 단숨에 파리 예술계의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시대가 기다려온 슈퍼스타
뷔페의 작품은 사람들의 마음을 깊게 파고들었습니다. 당시 시대 상황과 사람들의 마음에 딱 들어맞는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뷔페의 작품은 암울한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거친 선, 우울한 색채에는 독일 점령기 프랑스 사람들이 겪었던 비참함과 추위, 억압과 비극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작품 속 소박한 선으로 그려진 사람들의 모습에는 왠지 모를 존엄과 품위가 있었습니다. 뷔페의 그림에서 프랑스인들은 힘든 시기를 꿋꿋이 살아낸 후 폐허 속에서 삶을 다시 일으키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우리 시대를 정확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뷔페는 이 시대의 대변인이야.” 뷔페라는 신성의 등장은 새로운 희망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럽 미술계의 ‘제왕’은 누가 뭐래도 피카소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왕좌에 오른 지 수십 년이 된 상황. 이때 등장한 뷔페는 예술계에 새바람을 일으킬 주인공으로 제격이었습니다. 그의 그림은 이전에 있었던 어떤 작품과도 달랐으니까요. 게다가 스페인 출신인 피카소와 달리 뷔페는 프랑스인이었습니다. “세계 최고 화가의 자리는 당연히 ‘1등 문화 선진국’인 우리나라 사람이 차지해야지.” 피카소가 프랑스 출신이 아니라는 점을 아쉬워했던 프랑스인들은 이렇게 말하며 뷔페를 반겼습니다.마치 온 세상이 뷔페의 성공을 돕는 것 같았습니다. 시대가 뷔페라는 사람의 등장을 애타게 기다렸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뷔페가 파리 미술계에 이름을 막 알리기 시작했을 때 마침 미술시장이 대호황을 맞은 게 대표적인 일이었습니다. “전쟁이 나면 그나마 가장 안전한 자산은 미술 작품이야.” 당시 부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습니다. 전쟁 기간 자신들의 보유 지폐가 휴지 조각이 되고, 공장을 빼앗기고, 갖고 있던 부동산이 포탄을 맞아 불타오르는 일을 숱하게 목격했으니까요. 반면 미술 작품은 그나마 숨기거나 빼돌리기 쉬웠습니다. 또 미술작품은 전쟁 중 암시장에서 많은 돈을 번 사람들이 자금을 세탁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뷔페의 작품은 그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투자처였습니다. 앞으로 값이 확 뛸 게 확실시됐으니까요.
기술의 발전마저 뷔페를 도왔습니다. 유럽에서는 당시 텔레비전의 본격적인 보급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병약한 천재 예술가의 면모를 가진 미남 뷔페는, 이런 텔레비전 시대의 ‘스타 화가’가 되기에 딱 적합했습니다.
그렇게 뷔페의 작품은 서서히 상류층을 상징하는 소품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상류층의 저녁 자리에서는 뷔페의 작품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예술을 좀 아는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유럽의 유명 미술관들도 앞다퉈 뷔페의 작품을 사 갔습니다. 문화 강대국인 프랑스가 뽑은 세계 최고 권위의 미술 행사인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국가대표 선수. 불과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연 대규모 회고전으로 관객 줄을 200m 늘어세우고 주변 도로를 마비시킨 최고 인기 작가. 미술 전문지가 꼽은 젊은 작가 1등. 뷔페를 두고 언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과 27살의 나이로 피카소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추월했다.” “피카소와 비견되는 재능.” 게다가 그는 작품을 정말 많이 그렸습니다. 20대 후반에 그는 이미 5000점 이상의 작품을 완성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그만큼 뷔페의 전시는 자주 열렸고, 대중은 그의 작품을 더 자주 보게 됐습니다.
그러니 뷔페가 엄청난 부자가 된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뷔페는 남프랑스의 성을 구입해 그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기자들의 질문 공세, 길을 걸을 때마다 몰려드는 사인 요청 등 파리에서 치르는 유명세에 지쳐서였습니다. 그리고 뷔페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그 성을 채웠습니다.
서른살이던 1958년, 뷔페는 아나벨이라는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머지않아 둘은 달콤한 신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행복에 젖어 있는 동안 자신에 대한 여론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안타깝게도 그는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롤스로이스가 뭐길래
“예술가는 부자가 되면 안 되나요?” 요즘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왜 안되냐”는 반응이 많을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예술가’로 이름난 제프 쿤스는 부동산과 미술품을 비롯해 수천억원에 달하는 자산을 갖고 있는 부자로 유명합니다. 영국의 유명 현대 예술가 데이미언 허스트는 아예 직접 부동산 개발업에 손을 댄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 분위기에서 이런 일들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술은 어디까지나 예술. 작품이 잘 팔려서 돈을 버는 거야 뭐라 할 수 없지만, 예술가가 돈 자랑을 하는 건 절대로 안될 일이었습니다.1956년 잡지에 나온 뷔페의 사진은 이런 금기를 정면으로 건드렸습니다. 당시 사진에서 뷔페는 운전사가 딸린 은회색의 롤스로이스 실버 레이스에 오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차의 가치를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0억원 가량. 사진이 공개되자마자 전 유럽이 뷔페의 얘기로 떠들썩해졌습니다. 당시 고급 자동차는 지금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 사치품이었거든요. 각국 언론은 그를 ‘일주일에 4만파운드(현재 가치로 60억원)를 버는 남자’(타임) ‘붓으로 지폐를 찍어내는 청년’(파리 마치) ‘황금 팔을 가진 남자’(슈피겔)라고 불렀습니다. 좋은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곧바로 “뷔페는 위선자”라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여기엔 그의 작품과 이로 인해 형성된 이미지가 한 몫 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 뷔페는, 여전히 데뷔 당시의 불쌍하고 가난한 화가였습니다. 여전히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소박하고 거친 선으로 그려내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뷔페의 실제 삶은 달랐습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형편이 넉넉지 못한 이들이 많았던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성에 살면서 원숭이를 키우고, 롤스로이스를 타면서 그런 그림을 그려? 진정성이라는 게 전혀 없는 사람이잖아.” 뷔페에 대한 평가와 그의 명성은 급격하게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불운도 겹쳤습니다. 미술계의 대세가 뷔페의 작품 같은 구상미술(구체적인 형상이 있는 미술)에서 추상미술로 급격히 기운 겁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갓 문화부 장관이 된 앙드레 말로가 1959년 “진정한 미술은 추상미술”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게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이런 영향으로 뷔페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유럽의 제대로 된 미술관들은 그의 전시를 열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대중들은 여전히 뷔페의 그림을 좋아해 줬습니다. 덕분에 뷔페는 여전히 부자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판화와 우표 등으로 무수히 많이 복제돼 프랑스 전역의 가정과 사무실 벽에 붙었습니다. 도자기에 그림을 새기는 등 ‘아트 상품’도 내놨고, 1985년 나이키와 협업해 운동화 에디션을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뷔페의 이런 행보는 비평가와 동료 예술가들에게 경멸을 받았습니다. 한 비평가는 말했습니다. “뷔페의 슬픈 광대 그림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치과에 가본 적 없는 사람이다. 치과마다 그의 작품이 붙어있으니까.” 그는 말을 이었습니다. “뷔페는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증권거래소 벽의 렘브란트, 대기실의 라파엘로, 촌뜨기 티치아노로.” 다른 비평가는 말했습니다. “뷔페가 20대에 죽었더라면 너무 일찍 죽은 젊은 위대한 천재로 기억될 수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마지막 위대한 화가라고 불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너무 오래 살았다.” 지나치게 가혹한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뷔페 작품의 평균적인 질이 1960년대 이후 저하된 건 사실이었습니다. 새로운 차원의 발전을 이끌어내지도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뷔페가 “맨날 똑같은 작품만 그린다”고 비웃었습니다.
자신을 불태워 빛을 내는 유성처럼, 곧 꺼질 듯 위태롭지만 아름답게 불타오르는 천재. 전쟁의 고난과 위기를 너무나도 설득력 있게 묘사한 이 시대의 작가 뷔페는, 어느새 미술계에서 ‘형편없는 저속한 화가’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좋은 화가? 나쁜 화가?
10년간의 전성기 이후 뷔페의 삶에 대해 할 얘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뷔페는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돈은 여전히 많이 벌었습니다. 미술계의 혹평도 여전했습니다. 새로운 화풍을 시도했고 때로는 인상적인 작품을 그리기도 했지만 반전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고,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1999년 71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후 사람들은 뷔페를 잊었습니다. 마치 그런 작가가 있었는지도 몰랐다는 듯이. 그렇게 잊히는 듯했던 뷔페의 이름은 2010년대 중반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2016년 파리 현대미술관이 뷔페의 대규모 회고전을 연 건 그야말로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뷔페가 세상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프랑스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파브리스 에르고트 파리 현대미술관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뛰어난 기교, 창의적인 접근 방식, 다른 작가를 압도하는 강렬함이 있다.” 반면 여전히 기존 의견을 고수하는 평론가들도 많습니다. “뷔페의 작품과 철학이 얄팍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논쟁은 현재진행형입니다.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사실 뷔페는 평생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마음대로 살았을 뿐입니다. 그런 그를 세상은 저 하늘 끝까지 끌어올렸다가 가혹하게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세상을 떠난 후엔 또 새로운 평가를 내리려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고 있자면 질문이 꼬리를 뭅니다. 뷔페가 ‘가난한 척’을 하지 않았더라면 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10년 동안 천재로 불린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광대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뷔페는 위대한 화가인가요, 평범한 화가인가요?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한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얘기는 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의 삶이나 예술에 대한 평가는 시간의 흐름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그러니 후회하지 않으려면 순간의 분위기나 편견에 휩쓸려 속단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 보고 깊이 생각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 그런 다음에 내린 평가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 말이지요.
좋은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는 ‘Bernard Buffet: The Invention of the Modern Mega-artist’(Nicholas Foulkes 지음)를 중심으로 'Bernard Buffet: La Tourmente'(Yann le Pichon 지음), 'Bernard Buffet: The Retrospective'(Sylvie Buisson , Galerie Maurice Garnier 지음) 등을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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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