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미사일 동원된 러 열병식…탱크는 딱 1대?
9일(현지시간) 언뜻 봐도 구식인 전차 한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러시아의 심장 모스크바 붉은광장을 달렸다.

옛 소련이 1940대부터 썼던 주력 전차 모델 T-34다. 이날 러시아의 제2차 세계대전 종전기념일(전승절) 79주년을 기념해 열린 열병식에 등장한 유일한 전차이기도 하다.

5월인데도 난데없이 날린 눈발 속에 T-34의 행진은 더욱 고독해 보였다. 이날 모스크바는 0도 안팎의 기온으로 25년 만에 가장 추운 날로 기록됐다.

러시아는 올해 전승절 열병식에 비우호국 귀빈에게는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비우호국 언론의 취재는 허용했다. 독일, 일본 등 다른 비우호국의 특파원과 함께 연합뉴스도 한국 언론 중 유일하게 열병식 현장을 직접 찾았다.

취재진은 오전 10시에 시작되는 행사 4시간 전부터 러시아 관영언론 로시야 시보드냐 본사에서 신분 인증과 보안 검색을 거친 뒤 미디어 전용 버스를 타고 통제된 도로를 달려 붉은광장에 도착했다.

붉은광장을 둘러싼 레닌 묘와 국영 굼 백화점, 러시아국립역사박물관 등에는 '포베다!'(승리) 문구와 각종 휘장으로 장식됐다. 붉은광장 인근 도로에도 '포베다!'가 적힌 주황색 배너가 가득했다.

군사력을 과시하는 행사인 열병식의 선봉이 T-34라는 점이 다소 의아했다.

지난 1일부터 모스크바에서 전시 중인 에이브럼스(미국), 레오파르트(독일) 등 우크라이나 '특별군사작전'에서 노획한 서방 전차들과 비교하면 왜소해 보였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에이브럼스, 레오파르트보다 앞선다고 주장하는 신형 전차 T-14 아르마타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러시아는 80년도 더 된 T-34가 실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전설적' 전차라고 의미를 부여하며 열병식의 주인공 자격이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2022년부터 우크라이나 특별군사작전을 벌이느라 전장에 배치된 최신 전차를 열병식에 끌고 올 여력이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틀 전 5선 대통령에 취임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단호한 목소리로 연설했다.

푸틴 대통령의 양옆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추위에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2차 대전에서 여성 저격수로 활약한 알렉산드라 알료시나, 할아버지는 1945년 열병식에 참가했던 최전선 군인 예브게니 쿠로파트코프로 모두 올해 100세다.

푸틴 대통령은 "누구도 우리를 위협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 "우리의 전략군은 언제나 전투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며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며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서방에 경고했다.

이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러시아는 이날 열병식에서 이스칸데르 단거리탄도미사일, 야르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미사일을 내세웠다.

러시아군의 상징인 주황-검정 리본(게오르기옙스카야 렌토치카)을 단 이스칸데르와 야르스 미사일이 이동식 발사대에 올라 줄줄이 붉은광장을 행진했다. '언제든 핵전력이 준비 태세에 있다'는 경고장같은 느낌이었다.

2010년 처음 실전 배치된 야르스는 1만2천㎞를 비행해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으며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MD)도 뚫을 수 있다고 평가받는다. 이스칸데르는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실전 사용되고 있다.

올해 열병식은 단 1대뿐인 전차 T-34가 러시아가 겪는 어려움을 보여줬다는 평가와 야르스 등 핵무기가 러시아의 위협적인 면모를 보여준다는 엇갈린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모스크바를 제외한 여러 도시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 등을 우려해 자체 열병식과 불꽃놀이를 취소했다. 참전한 가족의 사진을 들고 시내 거리를 행진하는 '불멸의 연대' 행진도 올해는 열리지 않았다.

올해 붉은광장 열병식에는 3년 만에 처음으로 항공기가 동원됐지만 과거와 비교해 규모와 시간은 축소됐다. 군사 행진은 50여분 정도만에 끝났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열병식 행사가 끝나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쿠바 등 러시아의 우호국 정상들과 함께 붉은광장을 지나가자 군중은 러시아 국기나 옛 소련기를 흔들며 "푸틴!"을 연호했다.


조시형기자 jsh1990@wowtv.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