巨惡에 홀홀단신으로 맞서다…거장의 예술은 투쟁으로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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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리뷰
“현실은 냄새나고 더럽죠. 그리고 단순한 결말로 끝나지도 않아요.”
당위가 늘 행위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 때가 많다. 앞장서 나서기 두렵다거나, 얻을 게 없다거나, 애써 이룬 것을 포기해야 한다거나. 변명거리야 여러 가지다. 무모해 보이는 용기를 연결고리 삼아 당위를 행위로 증명해낸 이들이 시간을 초월해 기억되는 까닭이다. 그리고 “10만 명이 죽었다!”라고 외치며 미술관에 드러누운 예술가 낸 골딘(71)이 이를 몸소 보여준 고결한 인간으로 존경받는 이유다.
▶▶▶ [관련 인물] 낸 골딘
15일 개봉하는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현대 사진예술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거장 골딘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동시대 미술에서 골딘은 저명한 사진가다. 에이즈 환자나 마약 중독자, 매춘부, 성소수자 같은 감춰져 있던 ‘터부’를 찍어 시대를 표현한 개념과 슬라이드쇼로 풀어낸 독창적 기법은 왕가위, 자비에 돌란 같은 예술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과 유럽 유수의 현대미술관 중 그의 작품을 소장하지 않은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개인의 삶을 필름에 담아 스크린으로 소개할 만큼 골딘의 예술적 성취가 뛰어나단 뜻이다. 하지만 만약 영화가 골딘의 예술적 면모를 조명하는 데 그쳤다면, 그저 그런 전기 다큐멘터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이 낸 골딘을 알든 모르든 간에 영화는 매력적이다”란 평가를 받고, 제79회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것은 영화가 낸 골딘이 겪은 삶과 투쟁, 생존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예술가의 빛나는 업적이 아닌, 불쾌한 잔혹동화 같은 세상에 맞서 현실 속에서 아등바등 투쟁한 인간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값어치를 지닌다.
영화는 2017년 저항그룹 ‘P.A.I.N(처방 중독 즉각 개입)’이란 단체를 결성해 전 세계 미술관을 다니며 시위를 벌이는 골딘을 추적해 나간다. 중독성 높은 옥시콘틴 성분이 든 합법적 마약으로, 5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오피오이드를 반대하고, 이를 퍼뜨린 제조사 퍼듀파마에 대한 규탄이 당위다. 문제는 퍼듀파마 소유주인 새클러 가문이 미국 사회를 주무르는 거대한 세력이라는 것. 죽음의 약을 팔아 축적한 부로 새클러 가문은 주류 미술관에 자금을 쏟아부어 자신의 이름을 딴 전시관을 만드는 등 20세기 메디치로 군림한 이들에게 골딘은 미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관련 책] 펜타닐 그런데도 골딘은 예술가로서 자기 작품이 전시될 공간이 사라질 수 있다는 위협 속에서도 행위에 나선다. “권력을 쓸 줄 안다”는 동료의 우스갯소리처럼 자기 작품을 영구 소장한 미술관들을 찾아 4년간 쉴 새 없이 새클러의 이름을 지울 것을 촉구한다. 예술이 자선을 빙자해 새클러의 피 묻은 돈을 세탁해주지 말라는 울림은 결국 통한다. 런던 국립초상화 갤러리를 시작으로, 테이트 모던, 파리 루브르, 뉴욕 구겐하임 등이 새클러가의 기부금을 사절키로 한 것. 뉴욕 메트로폴리탄은 7개 전시 공간에 쓰인 새클러의 이름을 삭제하는 결정을 내린다.
▶▶▶[관련 칼럼]50만 목숨의 대가로 기부한 美 부호... 그걸 거부한 미술관들
미국을 발칵 뒤집은 내부고발자 에드워드 스노든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 다큐멘터리 ‘시티즌 포’로 오스카를 거머쥔 로라 포이트라스의 연출은 영화 몰입도를 더한다. 사진에 빠지고, 마약과 동성애를 일삼고, 돈을 벌기 위해 매춘까지 했던 골딘의 혼란한 과거와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고결한 현재를 병치하는 구조를 통해 그의 무모한 투쟁이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인지를 흥미롭게 설명한다. “전기, 엘레지, 탐사보도를 매끄럽게 결합하는 경이”라는 외신의 평가는 꽤 적절하다. 영화를 즐기는 미술 애호가라면 한 번쯤 관람해볼 만 하다. 데이비드 암스트롱, 필립 로르카 디코르시아, 데이비드 보이나로비치, 쿠키 뮬러 등 1980년대 미국 예술을 꽃피웠던 작가, 영화배우와 이들을 담은 골딘의 사진을 보는 재미가 있어서다. 새클러의 후원을 거부한, 혹은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미술관들의 모습에선 예술의 본질에 대한 숙고도 해볼 수 있다. 15세 이상 관람가. 122분.
유승목 기자.
당위가 늘 행위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 때가 많다. 앞장서 나서기 두렵다거나, 얻을 게 없다거나, 애써 이룬 것을 포기해야 한다거나. 변명거리야 여러 가지다. 무모해 보이는 용기를 연결고리 삼아 당위를 행위로 증명해낸 이들이 시간을 초월해 기억되는 까닭이다. 그리고 “10만 명이 죽었다!”라고 외치며 미술관에 드러누운 예술가 낸 골딘(71)이 이를 몸소 보여준 고결한 인간으로 존경받는 이유다.
▶▶▶ [관련 인물] 낸 골딘
15일 개봉하는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현대 사진예술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거장 골딘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동시대 미술에서 골딘은 저명한 사진가다. 에이즈 환자나 마약 중독자, 매춘부, 성소수자 같은 감춰져 있던 ‘터부’를 찍어 시대를 표현한 개념과 슬라이드쇼로 풀어낸 독창적 기법은 왕가위, 자비에 돌란 같은 예술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과 유럽 유수의 현대미술관 중 그의 작품을 소장하지 않은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개인의 삶을 필름에 담아 스크린으로 소개할 만큼 골딘의 예술적 성취가 뛰어나단 뜻이다. 하지만 만약 영화가 골딘의 예술적 면모를 조명하는 데 그쳤다면, 그저 그런 전기 다큐멘터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이 낸 골딘을 알든 모르든 간에 영화는 매력적이다”란 평가를 받고, 제79회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것은 영화가 낸 골딘이 겪은 삶과 투쟁, 생존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예술가의 빛나는 업적이 아닌, 불쾌한 잔혹동화 같은 세상에 맞서 현실 속에서 아등바등 투쟁한 인간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값어치를 지닌다.
영화는 2017년 저항그룹 ‘P.A.I.N(처방 중독 즉각 개입)’이란 단체를 결성해 전 세계 미술관을 다니며 시위를 벌이는 골딘을 추적해 나간다. 중독성 높은 옥시콘틴 성분이 든 합법적 마약으로, 5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오피오이드를 반대하고, 이를 퍼뜨린 제조사 퍼듀파마에 대한 규탄이 당위다. 문제는 퍼듀파마 소유주인 새클러 가문이 미국 사회를 주무르는 거대한 세력이라는 것. 죽음의 약을 팔아 축적한 부로 새클러 가문은 주류 미술관에 자금을 쏟아부어 자신의 이름을 딴 전시관을 만드는 등 20세기 메디치로 군림한 이들에게 골딘은 미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관련 책] 펜타닐 그런데도 골딘은 예술가로서 자기 작품이 전시될 공간이 사라질 수 있다는 위협 속에서도 행위에 나선다. “권력을 쓸 줄 안다”는 동료의 우스갯소리처럼 자기 작품을 영구 소장한 미술관들을 찾아 4년간 쉴 새 없이 새클러의 이름을 지울 것을 촉구한다. 예술이 자선을 빙자해 새클러의 피 묻은 돈을 세탁해주지 말라는 울림은 결국 통한다. 런던 국립초상화 갤러리를 시작으로, 테이트 모던, 파리 루브르, 뉴욕 구겐하임 등이 새클러가의 기부금을 사절키로 한 것. 뉴욕 메트로폴리탄은 7개 전시 공간에 쓰인 새클러의 이름을 삭제하는 결정을 내린다.
▶▶▶[관련 칼럼]50만 목숨의 대가로 기부한 美 부호... 그걸 거부한 미술관들
미국을 발칵 뒤집은 내부고발자 에드워드 스노든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 다큐멘터리 ‘시티즌 포’로 오스카를 거머쥔 로라 포이트라스의 연출은 영화 몰입도를 더한다. 사진에 빠지고, 마약과 동성애를 일삼고, 돈을 벌기 위해 매춘까지 했던 골딘의 혼란한 과거와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고결한 현재를 병치하는 구조를 통해 그의 무모한 투쟁이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인지를 흥미롭게 설명한다. “전기, 엘레지, 탐사보도를 매끄럽게 결합하는 경이”라는 외신의 평가는 꽤 적절하다. 영화를 즐기는 미술 애호가라면 한 번쯤 관람해볼 만 하다. 데이비드 암스트롱, 필립 로르카 디코르시아, 데이비드 보이나로비치, 쿠키 뮬러 등 1980년대 미국 예술을 꽃피웠던 작가, 영화배우와 이들을 담은 골딘의 사진을 보는 재미가 있어서다. 새클러의 후원을 거부한, 혹은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미술관들의 모습에선 예술의 본질에 대한 숙고도 해볼 수 있다. 15세 이상 관람가. 122분.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