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도덕적 해이의 장(場)이 된 실손보험
실손보험료는 올해를 제외하고 지난 수년간 매년 10% 안팎으로 꾸준히 올랐다. 보험사들은 손해율(보험료 대비 보험금 비율)이 높아 보험을 판매할수록 적자가 커지므로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한다. 보험료가 계속 올랐음에도 보험금 청구도 계속 늘어 실손보험 손해율은 매년 100%를 초과하고 있다. 그 결과 실손보험 적자는 연간 2조원에 육박하고 실손보험 판매를 중단한 보험사가 상당수에 이른다.

실손보험 시장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정부는 실손보험금 청구 기록을 근거로 특정 비급여 진료가 지나치게 많다고 지적한다. 마치 마사지를 받는 기분으로 1년에 100회 이상 도수치료를 받는 가입자가 부지기수고 가벼운 근골격계 증상에도 실손보험 가입자에게는 자기공명영상(MRI) 검사를 유도한다.

실손보험은 의대 증원을 둘러싼 요즘의 의료 사태에 일조한 측면도 있다. 실손보험에서 보장하는 비급여 진료비를 의사가 마음대로 책정할 수 있어서 비급여 진료를 많이 하는 일부 진료과 개원의의 소득은 다른 과에 비해 상당히 높다. 이에 따라 의사들이 상대적으로 돈 안 되는 필수과를 꺼리는 현상이 심화했다.

실손보험을 포함한 보험시장은 도덕적 해이에 따른 시장실패가 일어나기 쉬운 전형적인 시장이다. 소비자가 실손보험에 가입하면 가벼운 증상에도 병원에 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의사는 실손보험 가입자에게 더 많은 의료 서비스를 권장한다. 소비 행위의 비용을 제3자인 보험사가 처리해 주기에 소비자와 의사 모두 도덕적 해이라는 문제를 일으킨다. 대부분 보험시장에서는 수요자만 문제를 일으키지만, 실손보험 시장에서는 수요자에 더해 의사마저 문제를 야기한다. 이는 보험금 청구 증가와 보험료 인상으로 이어진다. 병원 진료를 자제하는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병원비를 대신 내주는 교차보조 문제도 발생한다.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지 않으려면 자동차보험처럼 가입자의 위험도와 사고 경력에 맞춰 보험 상품이 설계돼야 한다. 가입자의 보험금 청구 빈도와 액수에 따라 개인별 보험료의 할인할증 차등이 확실해야 하고, 보장 범위가 확대되고 자기부담금이 줄어들수록 보험료가 훨씬 비싸도록 보장 범위와 자기부담금 조합을 다양하게 제공해야 한다.

이런 보험 설계는 소비자의 도덕적 해이에는 효과적이지만 보험과 관계없는 의사의 도덕적 해이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의사의 진료 행위에 대해 소비자가 과잉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고 의료시장에는 경쟁이 없는 탓에 소비자도 의료시장도 의사의 과잉 진료를 파악하고 견제할 수 없어서다. 의사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서는 결국 제3자의 견제가 필요한데, 보험사가 대안이 될 수 있다. 보험사는 과잉 진료의 일차적인 피해를 보는 당사자여서 이를 견제할 유인이 있고 과잉 여부를 파악할 만한 전문성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간 정부가 도덕적 해이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판을 깔아줬다는 점이다. 정부는 2009년 2세대 실손보험을 시작으로 상품을 표준화하고 모든 보험사가 획일적인 상품을 제공하도록 규제했다. 보험사는 연간 5000만원 한도 내에서 국민건강보험 급여 자기부담금과 비급여 진료비를 보장하고 가입자의 연령과 성별 정도만을 기준으로 보험료를 차등 적용할 수 있었다. 비급여 진료 가격과 수량에 아무런 감독도 없었다. 소비자와 의사의 도덕적 해이가 활성화될 수밖에 없는 시장 환경이 조성됐다.

정부는 2021년이 돼서야 4세대 실손보험을 도입해 비급여 항목을 특약으로 옮겼고 비급여 보험료에 대해 할인할증 제도를 도입했다. 그리고 올해 들어서야 병원의 비급여 진료 내역을 보건당국에 보고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 정도 조치로 이미 만연화된 실손보험 시장의 도덕적 해이가 해결될지는 의문이다.

결국 실손보험이 초래한 과잉 진료와 필수과 기피 문제의 실체적 원인은 소비자와 의사의 부도덕이 아니다. 바로 정부가 민간 보험시장에 개입하면서 도덕적 해이라는 부작용을 고려하지 않은 채 획일적인 보험 상품만 고안하고, 과잉 진료에 대한 적절한 감독 체계를 구성하지 않은 데서 연유한다. 정부의 미숙한 개입이 시장실패를 부른 또 하나의 사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