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영화사의 큰 별이 지다… '대중 영화의 교황' 로저 코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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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로저 코먼 9일 별세… 향년 98세
B급 영화 산업과 장르,
그 안에서 배태된 영화와 작법
그 모두를 대표하는 아이콘
그가 만든 수많은 영화들과
그가 배출한 감독들의 영화들과
함께 자라 온 현세대에게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큰 부재이자,
거대한 한 챕터의 폐막
B급 영화 산업과 장르,
그 안에서 배태된 영화와 작법
그 모두를 대표하는 아이콘
그가 만든 수많은 영화들과
그가 배출한 감독들의 영화들과
함께 자라 온 현세대에게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큰 부재이자,
거대한 한 챕터의 폐막
B급 영화 산업과 장르, 그 안에서 배태된 영화와 작법 그 모두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있다면 단연 로저 코먼이다. 올해 98세를 맞은 그가 지난 5월 9일에 별세했다. 영화제작자이자 감독인 로저 코먼은 <어셔가> (1960), <흡혈 식물 대소동> (1960), <침입자> (1962) 등을 포함한 수많은 컬트 영화 작품들을 탄생시킨 이른바 B급영화의 거장이다. '대중 영화의 교황', '뉴 할리우드의 영적 대부', '컬트의 왕' 등의 수식어들이 그를 서술하는데 종종 쓰였지만 코먼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는 타이틀이라면, '미국 독립영화의 선구자'이다.
옥스포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미국으로 돌아온 코먼은 스크립트를 쓰며 본격적인 영화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가 쓴 일련의 스크립트들이 영화화되어 성공을 거두었고, 마침내 그는 그의 첫 장편이자 웨스턴 <파이브 건스 웨스트>를 직접 연출할 수 있게 되었다.
코먼은 커리어의 시작부터 주로 10대 관객들과 드라이브인을 전전하는 마이너 영화 관객들을 겨냥하는 이른바 ‘B급 영화’에 주력했다. 그가 커리어를 시작한 1950년대는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전성기가 끝나고 새로운 대중 매체인 텔레비전과 니체 영화 시장인 그라인드 하우스, 드라이브인, 동시 상영관 등이 성행하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그가 이 시기에 창단 멤버로 속해 있던 'AIP (American Independent Pictures)'는 이러한 대체 영화관들을 채우는 상품들을 제작했던 독립영화 제작사다. AIP에서 만들었던 <기관총 캘리> (1958)를 포함, 일련의 저예산 영화들로 평단의 인정까지 받아 낸 코먼은 1959년 ‘더 필름 그룹’을 창립하면서 연출뿐 아니라 제작과 배급까지 활약을 확장하게 된다. 특히 프랭크 오즈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된 바 있는 코먼의 역작 <흡혈 식물 대소동>은 작가주의 감독으로서의 로저 코먼의 이름과 그로 인한 컬트 영화의 부상을 신호하는 작품이다.
미국 영화사에서 로저 코먼은 제작하고 연출했던 작품들뿐만 아니라 그가 트레이닝한 수많은 작가, 감독들 (지금은 거장이 된)로도 큰 의의를 갖는다. 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 피터 보그다노비치는 당시 코먼의 어시스턴트로, 코먼이 연출한 바이커 영화 <와일드 엔젤스>를 포함한 몇몇 작품의 조연출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코먼이 1970년에 창립한 독립영화 제작사 '뉴 월드 픽쳐스'에서는 마틴 스콜세이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조나단 드미를 포함한 아메리칸 시네마의 간판 감독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코먼의 수많은 영화적 업적 중에서도 그가 숨어 있는 재능들을 배출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코먼의 뉴 월드 픽쳐스는 (중요성에 비해 자주 언급되지 않지만) 여성 감독의 활약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영화 산업, 특히 엑스플로이테이션과 저예산 장르영화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여성 감독들, 혹은 잠재력을 보였던 여성 신인 감독에게 연출 기회를 주는 산실이기도 했다. 바바라 피터스와 스테파니 로스맨은 로저 코먼이 제작한 프로젝트의 연출로 시작해 영화 산업으로 진출한 대표적인 사례다. 코먼의 독재적인(?) 스타일로 그와 협업했던 감독들은 뜻한 만큼 정체성을 드러낼 수 없었다는 비판적인 회고도 존재하지만 뉴 월드 픽쳐스를 통해 적지 않은 영화 인재들이 배출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들의 (뉴 월드에서의) 트레이닝이 분명 이들의 대표작들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코먼의 명백한 업적이다.
아이러니한 코먼의 또 다른 활약으로는 외국 아트하우스 영화를 배급하는 일이었다. 1970년대 메이저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이 1970년대에 들어 (블록버스터 제작의 집중으로 인해) 외국 작품들의 배급을 외면하자 코먼의 뉴 월드는 잉그마르 베르히만이나 프랑소와 트뤼포 같은 해외 거장의 작품을 배급하기 시작했다.
피터 위어 (< The Cars That Ate Paris >), 페데리코 펠리니 (< Amacord >), 조셉 로지 (< he Romantic Englishwoman >), 폴커 슐렌도르프 (<양철북>), 구로사와 아키라 (<데르수 우잘라>)와 같은 해외 시네 아스트들과 그들의 대표작들은 코먼의 뉴 월드가 아니었다면 미국 시장에 소개되지 못했을 것이다. 뉴 월드가 10년 기준 제작했던 영화들보다 배급했던 영화들이 더 많은 아카데미상 (외국어 작품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재미있는 기록이지만 동시에 미국의 영화 관객들과 시네필들이 코먼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 시사하는 사실이다. 이 지면 역시 로저 코먼을 B급 영화의 거장이라고 소개하긴 했으나 그는 분명 할리우드와 비(非)할리우드를 통틀어 가장 영민하고, 예술적이며, 영화적인 깊이를 가지고 있었던 아티스트였다. 그가 만든 수많은 영화들과 그가 배출한 감독들의 영화들과 함께 자라 온 현세대에게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큰 부재이자, 거대한 한 챕터의 폐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
옥스포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미국으로 돌아온 코먼은 스크립트를 쓰며 본격적인 영화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가 쓴 일련의 스크립트들이 영화화되어 성공을 거두었고, 마침내 그는 그의 첫 장편이자 웨스턴 <파이브 건스 웨스트>를 직접 연출할 수 있게 되었다.
코먼은 커리어의 시작부터 주로 10대 관객들과 드라이브인을 전전하는 마이너 영화 관객들을 겨냥하는 이른바 ‘B급 영화’에 주력했다. 그가 커리어를 시작한 1950년대는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전성기가 끝나고 새로운 대중 매체인 텔레비전과 니체 영화 시장인 그라인드 하우스, 드라이브인, 동시 상영관 등이 성행하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그가 이 시기에 창단 멤버로 속해 있던 'AIP (American Independent Pictures)'는 이러한 대체 영화관들을 채우는 상품들을 제작했던 독립영화 제작사다. AIP에서 만들었던 <기관총 캘리> (1958)를 포함, 일련의 저예산 영화들로 평단의 인정까지 받아 낸 코먼은 1959년 ‘더 필름 그룹’을 창립하면서 연출뿐 아니라 제작과 배급까지 활약을 확장하게 된다. 특히 프랭크 오즈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된 바 있는 코먼의 역작 <흡혈 식물 대소동>은 작가주의 감독으로서의 로저 코먼의 이름과 그로 인한 컬트 영화의 부상을 신호하는 작품이다.
미국 영화사에서 로저 코먼은 제작하고 연출했던 작품들뿐만 아니라 그가 트레이닝한 수많은 작가, 감독들 (지금은 거장이 된)로도 큰 의의를 갖는다. 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 피터 보그다노비치는 당시 코먼의 어시스턴트로, 코먼이 연출한 바이커 영화 <와일드 엔젤스>를 포함한 몇몇 작품의 조연출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코먼이 1970년에 창립한 독립영화 제작사 '뉴 월드 픽쳐스'에서는 마틴 스콜세이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조나단 드미를 포함한 아메리칸 시네마의 간판 감독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코먼의 수많은 영화적 업적 중에서도 그가 숨어 있는 재능들을 배출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코먼의 뉴 월드 픽쳐스는 (중요성에 비해 자주 언급되지 않지만) 여성 감독의 활약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영화 산업, 특히 엑스플로이테이션과 저예산 장르영화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여성 감독들, 혹은 잠재력을 보였던 여성 신인 감독에게 연출 기회를 주는 산실이기도 했다. 바바라 피터스와 스테파니 로스맨은 로저 코먼이 제작한 프로젝트의 연출로 시작해 영화 산업으로 진출한 대표적인 사례다. 코먼의 독재적인(?) 스타일로 그와 협업했던 감독들은 뜻한 만큼 정체성을 드러낼 수 없었다는 비판적인 회고도 존재하지만 뉴 월드 픽쳐스를 통해 적지 않은 영화 인재들이 배출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들의 (뉴 월드에서의) 트레이닝이 분명 이들의 대표작들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코먼의 명백한 업적이다.
아이러니한 코먼의 또 다른 활약으로는 외국 아트하우스 영화를 배급하는 일이었다. 1970년대 메이저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이 1970년대에 들어 (블록버스터 제작의 집중으로 인해) 외국 작품들의 배급을 외면하자 코먼의 뉴 월드는 잉그마르 베르히만이나 프랑소와 트뤼포 같은 해외 거장의 작품을 배급하기 시작했다.
피터 위어 (< The Cars That Ate Paris >), 페데리코 펠리니 (< Amacord >), 조셉 로지 (< he Romantic Englishwoman >), 폴커 슐렌도르프 (<양철북>), 구로사와 아키라 (<데르수 우잘라>)와 같은 해외 시네 아스트들과 그들의 대표작들은 코먼의 뉴 월드가 아니었다면 미국 시장에 소개되지 못했을 것이다. 뉴 월드가 10년 기준 제작했던 영화들보다 배급했던 영화들이 더 많은 아카데미상 (외국어 작품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재미있는 기록이지만 동시에 미국의 영화 관객들과 시네필들이 코먼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 시사하는 사실이다. 이 지면 역시 로저 코먼을 B급 영화의 거장이라고 소개하긴 했으나 그는 분명 할리우드와 비(非)할리우드를 통틀어 가장 영민하고, 예술적이며, 영화적인 깊이를 가지고 있었던 아티스트였다. 그가 만든 수많은 영화들과 그가 배출한 감독들의 영화들과 함께 자라 온 현세대에게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큰 부재이자, 거대한 한 챕터의 폐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