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컬트가 아니에요. 처음부터 SF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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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심완선의 SF라는 세계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죽은 등산가의 호텔>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죽은 등산가의 호텔>
페테르 글렙스키 경위는 몇 년 만에 업무에서 해방되어 휴가를 보낸다. 그가 추천받은 휴양지는 눈 덮인 산에 자리한 아늑한 호텔, ‘죽은 등산가’다. 어느 등산가가 추락사한 뒤로 유명해진 이 호텔에서는 투숙 첫날부터 기이한 사건이 일어난다.
갑작스레 사라졌다가 엉뚱하게도 남의 방에서 나타난 슬리퍼. 정체를 알 수 없는 발자국과 거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울리는 전화.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책상에 놓여 있던 협박문……. 투숙객이 도둑맞았다고 호소하던 금시계는 다른 사람의 옷가방에 숨겨져 있었다. 그 옆에는 권총이 발견된다. 은으로 만든 탄환도. 누가 흡혈귀를 죽이려고 준비한 걸까?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서는 아무래도 유령 아니면 불온한 범죄의 냄새가 난다.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 수상하다. 경위와 마주치자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던 남자. 장난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름난 마술사. 남자인지 여자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건방진 젊은이. 아름답고 매혹적인 부인과 위협적으로 으르렁대는 남편(심지어 그들의 방에서는 사냥용 채찍이 발견된다). 영구기관과 불가사의한 신비에 관해 떠드는 호텔 주인. 설상가상 호텔은 갑작스러운 눈사태로 인해 한동안 외부와 단절된다. 덩그러니 고립되어 클로즈드 서클로 변한 호텔에서는 물론, 누군가 시체로 발견된다. 미스터리에서는 더없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이 소설을 쓴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소비에트/러시아의 대표적인 SF 작가다. 그들의 작품 다수가 한국에도 번역되었고, 그중 <노변의 피크닉>이나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처럼 유명한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다.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내용으로 인해 정부의 검열에 시달리던 그들은, 평소에 주로 쓰던 SF가 아니라 추리 장르의 소설을 써보자고 마음먹었다. 압력에 굴하지 않고 글쓰기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색채가 옅은 ‘수수한’, 그러면서도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래야 겨우 출간이 허용될 듯했다. 마침 영어에 능하던 형 아르카디는 미스터리 애독자였으므로, 동생인 보리스와 함께 뛰어난 미스터리를 쓰고 싶다는 마음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보기에 미스터리 장르의 작품들이 보이는 문제점은 두 가지였다. 1. 범행 동기가 빈약하다. 2. 지루하고 어설픈 설명이 필수다. 그들은 사건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져야 하는 결말 부분에서 독자들의 흥미가 뚝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결말에 오히려 반전이 가미되는 소설을 쓰고자 했다. 저자들의 후기에 따르면 소설의 원래 제목은 '살인 사건, 추리 장르에 바치는 또 하나의 임종 기도'였다고 한다. 거듭 출간에 실패하면서 수정을 가해 소설의 제목은 결국 <죽은 등산가의 호텔>이 되었다. 다만 스트루가츠키 형제도 결국 위의 문제를 타파하진 못한 듯하다. 그들은 ‘실험은 실패했다’고 고백한다. 직접 써보니 이는 미스터리의 태생적인 속성이기 때문이었다. 대신 형제는 매력적이고 썩 괜찮은 작품을 썼다는 점에 만족한다. 미스터리와 SF를 두루 읽은 독자로서는, 그들의 평가는 SF에 깊이 발을 담근 사람의 시선으로 보인다. <죽은 등산가의 호텔>은 진상을 밝히고 수수께끼를 푸는 장면보다, 수상쩍은 사건들과 정신없이 떠드는 사람들이 더욱 재미있다. 휴가 중에 마지못해 수사를 떠맡게 된 글렙스키 경위는 속으로 한탄한다. “이 호텔에서는 미치광이들이 너무 많아. (...) 미치광이들과 주정뱅이들, 멍청이들…….”(231)
더군다나 초자연적 해석에 의구심을 품는 글렙스키 경위와 다르게, 오컬트를 좋아하는 호텔 주인은 ‘미지의 것’의 매력을 강변한다. “미지의 것은 상상력에 불을 지피고, 혈관을 따라 피가 더 빠르게 돌게 하고, 놀라운 환상을 낳고, 약속하고, 유혹합니다. 미지의 것은 한밤의 칠흑 같은 심연 속에서 반짝이는 작은 불꽃과 비슷하죠.”(18)
이와 함께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사를 덧붙이고 싶다. 등장인물 하나는 흥분에 가득 차 진실을 밝힌다.
심완선 SF 평론가
갑작스레 사라졌다가 엉뚱하게도 남의 방에서 나타난 슬리퍼. 정체를 알 수 없는 발자국과 거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울리는 전화.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책상에 놓여 있던 협박문……. 투숙객이 도둑맞았다고 호소하던 금시계는 다른 사람의 옷가방에 숨겨져 있었다. 그 옆에는 권총이 발견된다. 은으로 만든 탄환도. 누가 흡혈귀를 죽이려고 준비한 걸까?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서는 아무래도 유령 아니면 불온한 범죄의 냄새가 난다.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 수상하다. 경위와 마주치자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던 남자. 장난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름난 마술사. 남자인지 여자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건방진 젊은이. 아름답고 매혹적인 부인과 위협적으로 으르렁대는 남편(심지어 그들의 방에서는 사냥용 채찍이 발견된다). 영구기관과 불가사의한 신비에 관해 떠드는 호텔 주인. 설상가상 호텔은 갑작스러운 눈사태로 인해 한동안 외부와 단절된다. 덩그러니 고립되어 클로즈드 서클로 변한 호텔에서는 물론, 누군가 시체로 발견된다. 미스터리에서는 더없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이 소설을 쓴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소비에트/러시아의 대표적인 SF 작가다. 그들의 작품 다수가 한국에도 번역되었고, 그중 <노변의 피크닉>이나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처럼 유명한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다.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내용으로 인해 정부의 검열에 시달리던 그들은, 평소에 주로 쓰던 SF가 아니라 추리 장르의 소설을 써보자고 마음먹었다. 압력에 굴하지 않고 글쓰기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색채가 옅은 ‘수수한’, 그러면서도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래야 겨우 출간이 허용될 듯했다. 마침 영어에 능하던 형 아르카디는 미스터리 애독자였으므로, 동생인 보리스와 함께 뛰어난 미스터리를 쓰고 싶다는 마음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보기에 미스터리 장르의 작품들이 보이는 문제점은 두 가지였다. 1. 범행 동기가 빈약하다. 2. 지루하고 어설픈 설명이 필수다. 그들은 사건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져야 하는 결말 부분에서 독자들의 흥미가 뚝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결말에 오히려 반전이 가미되는 소설을 쓰고자 했다. 저자들의 후기에 따르면 소설의 원래 제목은 '살인 사건, 추리 장르에 바치는 또 하나의 임종 기도'였다고 한다. 거듭 출간에 실패하면서 수정을 가해 소설의 제목은 결국 <죽은 등산가의 호텔>이 되었다. 다만 스트루가츠키 형제도 결국 위의 문제를 타파하진 못한 듯하다. 그들은 ‘실험은 실패했다’고 고백한다. 직접 써보니 이는 미스터리의 태생적인 속성이기 때문이었다. 대신 형제는 매력적이고 썩 괜찮은 작품을 썼다는 점에 만족한다. 미스터리와 SF를 두루 읽은 독자로서는, 그들의 평가는 SF에 깊이 발을 담근 사람의 시선으로 보인다. <죽은 등산가의 호텔>은 진상을 밝히고 수수께끼를 푸는 장면보다, 수상쩍은 사건들과 정신없이 떠드는 사람들이 더욱 재미있다. 휴가 중에 마지못해 수사를 떠맡게 된 글렙스키 경위는 속으로 한탄한다. “이 호텔에서는 미치광이들이 너무 많아. (...) 미치광이들과 주정뱅이들, 멍청이들…….”(231)
더군다나 초자연적 해석에 의구심을 품는 글렙스키 경위와 다르게, 오컬트를 좋아하는 호텔 주인은 ‘미지의 것’의 매력을 강변한다. “미지의 것은 상상력에 불을 지피고, 혈관을 따라 피가 더 빠르게 돌게 하고, 놀라운 환상을 낳고, 약속하고, 유혹합니다. 미지의 것은 한밤의 칠흑 같은 심연 속에서 반짝이는 작은 불꽃과 비슷하죠.”(18)
이와 함께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사를 덧붙이고 싶다. 등장인물 하나는 흥분에 가득 차 진실을 밝힌다.
오컬트가 아니에요. 처음부터 SF였죠. (334)
심완선 SF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