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의 삶은 짜릿해! 덕후로 사는 게 너무 좋았던 요즘 공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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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은아의 머글과 덕후 사이
덕후의 지난 몇주간은 실황 음악이 주는 순연한 기쁨으로 가득했다. 다음은 4월 말 5월 초 풍요롭고 행복했던 덕후의 클래식 음악 생활에 대한 짧은 기록이다.
4월 가장 기대했던 연주회는 요즘 가장 바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려도 전혀 손색이 없는 아우구스틴 하델리히와, 역시 그 못지않게 바쁜 지휘자 유카-페카 사라스테의 만남이었다. 연주곡목은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그때 그 곡 맞다), 핀란드 지휘자와 드라마틱한 연주로 정평이 나 있는 바이올리니스트의 만남은 필승조합이 아니냐며, 게다가 사라스테는 이전에도 (머글의 개인적 취향으로 최애 바이올리니스트인) 제임스 에네스와 말끔한 합을 맞춘 호연을 선보인 바 있었기에 기대가 컸다.
[아우구스틴 하델리히와 프랑크푸르트 방송 교향악단 (지휘 안드레스 오로스코 에스트라다) -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리니스트들의 바이올리니스트' 아우구스틴 하델리히의 스케줄을 살펴보자. 그는 4월 한 달 동안 총 8회 연주했다. 미국에서 1회, 그 후 독일로 날아가 2회,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2회의 연주를 더 소화하고 서울로 와 서울시향과 세 번의 연주를 진행했다. 그의 5월은 더 바쁘다. 대만에서 2회, 미국에서 2회, 핀란드에서는 지휘자 만프레드 호네크와 연주하고, 이탈리아를 거쳐 독일로 가 세 번 더 연주하고 그 후 헝가리까지 가는 여정이다. 총 10회의 연주다. 그런데 6월은 여기에서 2회가 더 추가되어 총 12회의 연주가 예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연주에서 과로(?)의 기미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관객의 긴장과 피로를 모두 압수해 소멸시켜버리는 압도적인 연주를 선보였다. 무대에 등장한 순간부터 은은하게 풍겨오던 그의 에너지가 여간 수상하지 않았거늘 활을 긋는 즉시 다른 세계로 진입한 듯, 모든 관객, 나아가 그와 함께 연주하는 서울시향 단원들까지도 그에게 빠져들어 하나가 된 듯했다.
'이제 막 동이 터 짙푸른 숲속, 소나기의 흔적을 머금은 낙엽길을 밟으며 한참을 부지런히 걷는 것'을 소리로 표현하면 그런 색채가 나올까,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의 음험하고 고혹적인 오프닝과 더없이 잘 어울리는 그 울림이라니. 평소 드라마틱한 연주를 썩 즐기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머글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우주 같고 숲속 같고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 같기도 한 풍부한 음악 세계로 이끌었다.
자신감으로 가득 찬 보잉은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라는 의문이 절로 나올 만큼 신기에 가까웠고 그의 온몸에서 탄생하는 모든 프레이즈가 아름답고 울창했다! 아우구스틴 하델리히의 음악이 서울시향과 만나 동심원처럼 퍼져나가며 너울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좋은 음악만이 관객에게 줄 수 있는 순도 높은 만족감 그 자체였다. 우레라는 말로도 모자란 우람한 박수가 커튼콜을 가득 채웠다. 그날 콘서트홀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음악적 우주를 유영했다. 이런 뜨거운(!) 열기를 견디고도 닐센의 교향곡 5번을 옹골차게 등정한 유카-페카 사라스테도 역시 대단한 지휘자였다. 그간 (머글의 개인적 취향으로) 엉뚱한 접근의 브람스를 몇 차례 들었던 아쉬움을 일거에 날려준, 세련되고 진중한 해석이 돋보였다. 덕후라면 무릇 아우구스틴 하델리히의 실내악 연주를 놓칠 수는 없기에 바로 다음 날도 연주회장을 찾았다. 화사한 봄과 썩 잘 어울리는 멘델스존 현악 8중주가 예정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에 연달아 연주한 데이비드 랭과 이자이 소나타 덕분에 마치 아우구스틴 하델리히의 리사이틀, 실내악, 그리고 협연까지 모두 함께한 기분이었다. 연이틀 아우구스틴 하델리히와 서울시향이 선사한 도파민은 아주 오랫동안 벅찬 감동으로 기억될 것이다.
▶▶[관련 리뷰] 사라스테-하델리히 만난 서울시향…절반이었지만 찬란했던 명연 그로부터 열흘 뒤에는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연주를 갈 계획이었으나 놀랍게도 공연 단 하루 전, 그것도 늦은 오후 경 협연자가 변경되었다는 공지를 접했다.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캔슬 덕에 등장한 ‘대타' 연주자들은 관객에게 때때로 뜻밖의 발견이라거나 어부지리의 행운을 선사하기도 한다. 2017년 협연자 랑랑의 대타(?)로 무려 조성진(!)의 연주를 얼떨결에 접한 적도 있고 그보다 한 해전 2016년 지휘자 로제스트벤스키의 대타로 나선 안토니오 멘데스라는 젊은 지휘자를 발견하기도 했었다.
다음 날 아침 공지된 대타 연주자의 이름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이라니...! 열흘 전 하델리히가 남긴 명연의 여운을 아직도 곱씹는 중인데, 여기에 힐러리 한까지 듣게 되다니.. 덕후 살려!
[힐러리 한과 프랑크푸르트 방송 교향악단 (지휘 파보 예르비) -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너무 영화로워 몸 둘 바를 모르는 사이 정말 별안간에 힐러리 한의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었다. 햇빛을 머금고 반짝이며 계곡을 명랑하게 흐르는 물소리같이 아름답고 싱그러운 ‘브바협'은 또다시 덕후의 삶에 나린 축복이 아니던가. 그녀의 연주는 별다른 설명과 묘사가 불요한, 반박 불가·명불허전·탑클래스에 다름 아니었으나 더욱 놀라운 점은 단 몇시간에 별안간(!) 무대에 오른다 할지라도 최고 수준의 소리와 깊이 있는 음악을 관객에게 들려줄 수 있는 능력이었다.
프로 중의 프로, 진짜 중의 진짜인 그녀의 음악만큼이나 힐러리 한은 삶을 대하는 태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따뜻하고 쾌활한 인격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품격이 넘친다. 힐러리 한과 서울시향의 만남은 어쩌다 발견한 행운 같은 시간들이었지만 그 행운을 목도한 머글은 이를 자양분 삼아 더 진지한 덕후로 거듭날 것이다. 연주에 관한 기록인 만큼 놓칠 수 없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오보에 협연(!)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크고 아름다운 오보에 솔로 파트가 있다. 2악장 초입의 오보에 솔로는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의 정체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협연 악기인 바이올린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이다. 곡의 정점에서 두 여왕, 힐러리 한과 이미성 수석이 펼쳐낸 아름답고 우아한 발걸음은 곡뿐 아니라 관객 삶의 품격마저 한 단계 상승시킨 백미였다.
▶▶['힐러리 한' 인터뷰] 힐러리 한 “음악은 나의 모국어…브람스의 강력한 힘 느끼게 될 것”
▶▶['힐러리 한' 공연 리뷰] '여제의 품격' 보여준 힐러리 한…생생히 살아난 브람스의 불꽃 하루 뒤 참석한 'SPO Day' 연주회에서는 무대 위에서 그 누구보다 엄격, 근엄, 진지한 서울시향 단원들이 깜짝! 펼쳐 보인 재즈 음악을 짧게나마 접하는 영광을 누렸다. 평소 쇼스타코비치, 닐센, 브람스 등 거대한 스케일의 음악을 뚝딱 빚어내는 음악가들이었기에 그들의 재즈 연주는 더욱 특별했고, 선곡의 이유는 더 감동적이었다.
하루 중 가장 피곤할지 모르는 저녁 시간을 기꺼이 내어 그들의 음악을 들으러 오는 그들의 오랜 관객들에게 색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오래오래 즐겁게 추억할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을 선물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 얼마나 인류애 넘치는 마음인가. 역시, 덕후가 되길 잘했어. 덕후의 삶은 늘 새로워, 짜릿해! 덕후가 세상을 이롭게 한다. /이은아 칼럼니스트
4월 가장 기대했던 연주회는 요즘 가장 바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려도 전혀 손색이 없는 아우구스틴 하델리히와, 역시 그 못지않게 바쁜 지휘자 유카-페카 사라스테의 만남이었다. 연주곡목은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그때 그 곡 맞다), 핀란드 지휘자와 드라마틱한 연주로 정평이 나 있는 바이올리니스트의 만남은 필승조합이 아니냐며, 게다가 사라스테는 이전에도 (머글의 개인적 취향으로 최애 바이올리니스트인) 제임스 에네스와 말끔한 합을 맞춘 호연을 선보인 바 있었기에 기대가 컸다.
[아우구스틴 하델리히와 프랑크푸르트 방송 교향악단 (지휘 안드레스 오로스코 에스트라다) -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리니스트들의 바이올리니스트' 아우구스틴 하델리히의 스케줄을 살펴보자. 그는 4월 한 달 동안 총 8회 연주했다. 미국에서 1회, 그 후 독일로 날아가 2회,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2회의 연주를 더 소화하고 서울로 와 서울시향과 세 번의 연주를 진행했다. 그의 5월은 더 바쁘다. 대만에서 2회, 미국에서 2회, 핀란드에서는 지휘자 만프레드 호네크와 연주하고, 이탈리아를 거쳐 독일로 가 세 번 더 연주하고 그 후 헝가리까지 가는 여정이다. 총 10회의 연주다. 그런데 6월은 여기에서 2회가 더 추가되어 총 12회의 연주가 예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연주에서 과로(?)의 기미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관객의 긴장과 피로를 모두 압수해 소멸시켜버리는 압도적인 연주를 선보였다. 무대에 등장한 순간부터 은은하게 풍겨오던 그의 에너지가 여간 수상하지 않았거늘 활을 긋는 즉시 다른 세계로 진입한 듯, 모든 관객, 나아가 그와 함께 연주하는 서울시향 단원들까지도 그에게 빠져들어 하나가 된 듯했다.
'이제 막 동이 터 짙푸른 숲속, 소나기의 흔적을 머금은 낙엽길을 밟으며 한참을 부지런히 걷는 것'을 소리로 표현하면 그런 색채가 나올까,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의 음험하고 고혹적인 오프닝과 더없이 잘 어울리는 그 울림이라니. 평소 드라마틱한 연주를 썩 즐기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머글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우주 같고 숲속 같고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 같기도 한 풍부한 음악 세계로 이끌었다.
자신감으로 가득 찬 보잉은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라는 의문이 절로 나올 만큼 신기에 가까웠고 그의 온몸에서 탄생하는 모든 프레이즈가 아름답고 울창했다! 아우구스틴 하델리히의 음악이 서울시향과 만나 동심원처럼 퍼져나가며 너울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좋은 음악만이 관객에게 줄 수 있는 순도 높은 만족감 그 자체였다. 우레라는 말로도 모자란 우람한 박수가 커튼콜을 가득 채웠다. 그날 콘서트홀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음악적 우주를 유영했다. 이런 뜨거운(!) 열기를 견디고도 닐센의 교향곡 5번을 옹골차게 등정한 유카-페카 사라스테도 역시 대단한 지휘자였다. 그간 (머글의 개인적 취향으로) 엉뚱한 접근의 브람스를 몇 차례 들었던 아쉬움을 일거에 날려준, 세련되고 진중한 해석이 돋보였다. 덕후라면 무릇 아우구스틴 하델리히의 실내악 연주를 놓칠 수는 없기에 바로 다음 날도 연주회장을 찾았다. 화사한 봄과 썩 잘 어울리는 멘델스존 현악 8중주가 예정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에 연달아 연주한 데이비드 랭과 이자이 소나타 덕분에 마치 아우구스틴 하델리히의 리사이틀, 실내악, 그리고 협연까지 모두 함께한 기분이었다. 연이틀 아우구스틴 하델리히와 서울시향이 선사한 도파민은 아주 오랫동안 벅찬 감동으로 기억될 것이다.
▶▶[관련 리뷰] 사라스테-하델리히 만난 서울시향…절반이었지만 찬란했던 명연 그로부터 열흘 뒤에는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연주를 갈 계획이었으나 놀랍게도 공연 단 하루 전, 그것도 늦은 오후 경 협연자가 변경되었다는 공지를 접했다.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캔슬 덕에 등장한 ‘대타' 연주자들은 관객에게 때때로 뜻밖의 발견이라거나 어부지리의 행운을 선사하기도 한다. 2017년 협연자 랑랑의 대타(?)로 무려 조성진(!)의 연주를 얼떨결에 접한 적도 있고 그보다 한 해전 2016년 지휘자 로제스트벤스키의 대타로 나선 안토니오 멘데스라는 젊은 지휘자를 발견하기도 했었다.
다음 날 아침 공지된 대타 연주자의 이름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이라니...! 열흘 전 하델리히가 남긴 명연의 여운을 아직도 곱씹는 중인데, 여기에 힐러리 한까지 듣게 되다니.. 덕후 살려!
[힐러리 한과 프랑크푸르트 방송 교향악단 (지휘 파보 예르비) -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너무 영화로워 몸 둘 바를 모르는 사이 정말 별안간에 힐러리 한의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었다. 햇빛을 머금고 반짝이며 계곡을 명랑하게 흐르는 물소리같이 아름답고 싱그러운 ‘브바협'은 또다시 덕후의 삶에 나린 축복이 아니던가. 그녀의 연주는 별다른 설명과 묘사가 불요한, 반박 불가·명불허전·탑클래스에 다름 아니었으나 더욱 놀라운 점은 단 몇시간에 별안간(!) 무대에 오른다 할지라도 최고 수준의 소리와 깊이 있는 음악을 관객에게 들려줄 수 있는 능력이었다.
프로 중의 프로, 진짜 중의 진짜인 그녀의 음악만큼이나 힐러리 한은 삶을 대하는 태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따뜻하고 쾌활한 인격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품격이 넘친다. 힐러리 한과 서울시향의 만남은 어쩌다 발견한 행운 같은 시간들이었지만 그 행운을 목도한 머글은 이를 자양분 삼아 더 진지한 덕후로 거듭날 것이다. 연주에 관한 기록인 만큼 놓칠 수 없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오보에 협연(!)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크고 아름다운 오보에 솔로 파트가 있다. 2악장 초입의 오보에 솔로는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의 정체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협연 악기인 바이올린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이다. 곡의 정점에서 두 여왕, 힐러리 한과 이미성 수석이 펼쳐낸 아름답고 우아한 발걸음은 곡뿐 아니라 관객 삶의 품격마저 한 단계 상승시킨 백미였다.
▶▶['힐러리 한' 인터뷰] 힐러리 한 “음악은 나의 모국어…브람스의 강력한 힘 느끼게 될 것”
▶▶['힐러리 한' 공연 리뷰] '여제의 품격' 보여준 힐러리 한…생생히 살아난 브람스의 불꽃 하루 뒤 참석한 'SPO Day' 연주회에서는 무대 위에서 그 누구보다 엄격, 근엄, 진지한 서울시향 단원들이 깜짝! 펼쳐 보인 재즈 음악을 짧게나마 접하는 영광을 누렸다. 평소 쇼스타코비치, 닐센, 브람스 등 거대한 스케일의 음악을 뚝딱 빚어내는 음악가들이었기에 그들의 재즈 연주는 더욱 특별했고, 선곡의 이유는 더 감동적이었다.
하루 중 가장 피곤할지 모르는 저녁 시간을 기꺼이 내어 그들의 음악을 들으러 오는 그들의 오랜 관객들에게 색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오래오래 즐겁게 추억할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을 선물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 얼마나 인류애 넘치는 마음인가. 역시, 덕후가 되길 잘했어. 덕후의 삶은 늘 새로워, 짜릿해! 덕후가 세상을 이롭게 한다. /이은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