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신동 동신교회는 화가 박수근의 삶과 예술의 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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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한이수의 길 위의 미술관
③ 박수근이 다닌 동신교회
③ 박수근이 다닌 동신교회

이곳은 언제부터 시장이 형성된 것일까? 임진왜란 때 상시군으로 설치된 훈련도감 군인에게 지급하는 면포의 보급량이 전쟁이 끝나자 예전과 같이 지급되지 않았다. 생계가 막막해진 군인들은 지급받은 면포를 가공해 섬유 상품, 옷에 필요한 액세서리 같은 것을 만들어 팔았다. 차츰 성문 밖에서 생산하는 야채들도 팔기 시작하면서 조선 후기 이현시장, 배우개(배오개)가 형성되었다.
이곳에 1904년에 광장시장이 형성되었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자 모든 것이 초토화되었다. 지형으로는 다소 평평한 이곳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청계천 변 주인 없는 땅은 옹색하지만 판잣집을 지어 놓으면 그나마 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북에서 무일푼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은 천막을 치고 물물교환을 하기 시작했다. 필요 없는 것을 내다 팔고, 필요한 것을 바꾸며 살다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복, 구호물자나 외래품, 수공품 거래로 활기를 찾게 되었다.
청계천 변에 점포 겸용의 판잣집에서 한두 대의 미싱으로 옷을 만들었다. 미군복, 담요, 구호 물자 등을 염색, 탈색해 몸뻬와 잠바를 만들면서 형성된 것이 평화시장의 시초이다. 북에서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한 상인들은 시장 이름에도 '평화'를 붙여 '평화시장'이라 했다.
박수근이 이곳에 정착할 때인 전쟁 끝물인 1953년은 이렇게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집 주변에는 천막을 치고 좌판을 벌거나 물품들을 서로 교환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상인들의 물건은 조악하다. 동대문 밖에서 야채를 심어 내다 팔거나 집에 있는 귀중품, 시계 같은 것을 좌판 위에 놓고 마냥 손님들이 나타나 사주기를 기다렸다.

![[왼쪽] 박수근 <시장의 여인들> (1963년), 하드보드에 유채, 45.5 * 37.8cm [오른쪽] 박수근 <시장의 여인> (1960년), 하드보드에 유채, 30 * 29 cm](https://img.hankyung.com/photo/202405/01.36745469.1.jpg)
박수근의 그림에 억척스러운 여인들이 많이 등장하고 남자들은 빈둥빈둥 노는 모습으로 보이는 이유는 생활력 없고 소심한 자신을 남자의 모습에 많이 투영했고, 억척스러운 아내 김복순 여사의 모습을 여인의 그림에 많이 차용했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누워 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앉아 있다. 바닥이 맨땅인지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매우 더러운 환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앉은 사람은 양복을 입고 구두까지 챙겨 신었다. 이 신사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화제가 '실직'인 것으로 보아 직장이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 신사 옆의 사람은 아예 구직을 포기한 것인가. 대낮인데 바닥에 누워 있다. 막걸리라도 한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시기에 소위 말하는 박수근의 미석화법이 완성되었다. '물감층을 켜켜이 쌓아 만든 거친 마띠에르는 유화 물감과 기운생동의 먹선의 혼합체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찰의 석물이나 창호지의 질감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서구 안료가 갖는 이질감을 녹여낸 것이다.' (명지대 이주현 교수)

"국전에 <세 여인>이라는 100호짜리 유화를 출품했는데 그것이 그만 낙선되었다. 그이는 신문을 보시고 내 그림이 왜 낙선되었느냐며 우셔서 낙선이 될 때도 있지 뭘 우시느냐고, 내년에 좋은 작품을 그려 출품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위로한 적도 있다." (김복순, <아내의 일기>)
박수근의 그림은 짐머맨이나 코낸트와 같은 서구인이 좋아했지만 동족으로부터는 외면을 당했다. 학력을 중시하는 미술계 풍토에서 소학교 졸업이 전부인 박수근은 늘 방외인이었고 질시의 대상이었다. 또래의 작가들이 초대 작가가 되어 심사위원으로 위촉될 때, 그는 심사를 받는 입장이었다. 입선에서도 밀리자 그는 폭음을 하기 시작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밀레와 같은 신앙심 강한 그림을 그리게 해달라고 기도한 박수근이었지만 세상의 외면에 무너졌다. 보잘것없이 보이는 인간의 본질에 관심을 가진 그의 그림은 기독교적 신앙심에 기초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섰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늘 주변의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그림의 모티프로 삼았다.
폭음이 그의 건강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었다. 신장과 간이 나빠졌다. 그로 인해 왼쪽 눈에 백내장이 생겼다. 수술할 형편이 되지 않아 나중에 간신히 수술을 할 수 있었지만, 이 과정에서 시신경이 끊어져 한쪽 눈의 시력을 온전히 잃었다. 이후 그는 한쪽 눈으로만 작업해야 했다. 가난 탓에 눈을 잃고 한 눈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외눈 화가가 되었다.


독실한 신자인 박수근 화백도 이 교회를 다녔다. 그의 부인 김복순 여사도 남편을 따라 교회에 출석했다. 1963년 전농동으로 이사 갔을 때는 중곡동장로교회를 다녔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김복순 여사가 그곳에서 전도사로 일했다고 하니 신심은 박수근을 능가했다. 박수근은 소천 후 동신교회가 운영하는 포천의 동신교회 묘원에 묻혔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교회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한이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