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신동 동신교회는 화가 박수근의 삶과 예술의 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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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한이수의 길 위의 미술관
③ 박수근이 다닌 동신교회
③ 박수근이 다닌 동신교회
동대문에는 단일 시장으로서 '동대문 시장'이 없다. 종로 5가 광장 시장에서부터 창신동 문구 거리까지 1.3km. 청계로 좌우, 안쪽 골목, 흥인문로 좌우에 분포하는 약 30여개 상가, 2만 7천여 점포를 통칭한 시장이 '동대문 시장'이다. 광장시장, 평화시장, 중부시장, 방산시장, 세운상가, 동대문 종합시장 등이 전부 동대문 시장이다.
이곳은 언제부터 시장이 형성된 것일까? 임진왜란 때 상시군으로 설치된 훈련도감 군인에게 지급하는 면포의 보급량이 전쟁이 끝나자 예전과 같이 지급되지 않았다. 생계가 막막해진 군인들은 지급받은 면포를 가공해 섬유 상품, 옷에 필요한 액세서리 같은 것을 만들어 팔았다. 차츰 성문 밖에서 생산하는 야채들도 팔기 시작하면서 조선 후기 이현시장, 배우개(배오개)가 형성되었다.
이곳에 1904년에 광장시장이 형성되었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자 모든 것이 초토화되었다. 지형으로는 다소 평평한 이곳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청계천 변 주인 없는 땅은 옹색하지만 판잣집을 지어 놓으면 그나마 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북에서 무일푼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은 천막을 치고 물물교환을 하기 시작했다. 필요 없는 것을 내다 팔고, 필요한 것을 바꾸며 살다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복, 구호물자나 외래품, 수공품 거래로 활기를 찾게 되었다.
청계천 변에 점포 겸용의 판잣집에서 한두 대의 미싱으로 옷을 만들었다. 미군복, 담요, 구호 물자 등을 염색, 탈색해 몸뻬와 잠바를 만들면서 형성된 것이 평화시장의 시초이다. 북에서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한 상인들은 시장 이름에도 '평화'를 붙여 '평화시장'이라 했다.
박수근이 이곳에 정착할 때인 전쟁 끝물인 1953년은 이렇게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집 주변에는 천막을 치고 좌판을 벌거나 물품들을 서로 교환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상인들의 물건은 조악하다. 동대문 밖에서 야채를 심어 내다 팔거나 집에 있는 귀중품, 시계 같은 것을 좌판 위에 놓고 마냥 손님들이 나타나 사주기를 기다렸다. 좌판을 벌여 놓았지만 사 가는 사람들이 없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구매력이 있을 리 없다. 모인 사람들을 보면 크게 무엇을 사려는 사람들 같지 않다. 마치 서로가 서로에게 구경꾼이 되는 듯한 모습이다. 좌판 위의 물건을 보면 과일 같은 것들이 몇 개 놓여 있을 뿐이다. 천막 옆 할아버지의 좌판에는 아무런 상품이 없다. 그냥 소일하려는 듯 큰 담뱃대를 빨고 있다. 궁색하기는 청년들도 마찬가지다.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없고 전쟁 통에 내려온 사람들만 가득한 시장 풍경이다. 조금 대비되는 것이 여인들의 모습이다. 시장에서의 장사는 여자의 몫이었다. 남자들이 할 일 없이 배회할 때, 여인들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좌판을 벌여 놓았다. 그러나 장사를 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 부끄러워서 호객 행위를 언감생심 하지 못한다. 젖먹이 어린아이는 봐줄 사람이 없기에 데리고 나왔다. 중간 중간에 젖을 물려야 한다.
박수근의 그림에 억척스러운 여인들이 많이 등장하고 남자들은 빈둥빈둥 노는 모습으로 보이는 이유는 생활력 없고 소심한 자신을 남자의 모습에 많이 투영했고, 억척스러운 아내 김복순 여사의 모습을 여인의 그림에 많이 차용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귀로는 늘 피곤하기만 하다. 좌판에 벌여 놓은 물건이 팔렸다면 마음이 한결 가벼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침에 챙겨간 상품이 팔리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물건을 이고 가는 머리가 무겁다. 팔리지 않은 물건을 이고 가는 여인들, 엄마 곁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아이들이 따라간다. 집에는 이보다 더 많은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무엇이라도 팔아서 쌀이라도 사 가야 하는데 빈손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울까? 1961년에 그린 그림이다. 실직자의 삶이 얼마나 곤궁했을까. <실직>은 1962년 주한 미군사령부 도서관에서 열린 박수근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이다. 전쟁이 끝나도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직장에 들어가서 돈도 벌고 결혼도 하고, 사람 노릇을 해야 하는데 상황이 그렇지를 못하다.
이 그림에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누워 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앉아 있다. 바닥이 맨땅인지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매우 더러운 환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앉은 사람은 양복을 입고 구두까지 챙겨 신었다. 이 신사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화제가 '실직'인 것으로 보아 직장이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 신사 옆의 사람은 아예 구직을 포기한 것인가. 대낮인데 바닥에 누워 있다. 막걸리라도 한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시기에 소위 말하는 박수근의 미석화법이 완성되었다. '물감층을 켜켜이 쌓아 만든 거친 마띠에르는 유화 물감과 기운생동의 먹선의 혼합체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찰의 석물이나 창호지의 질감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서구 안료가 갖는 이질감을 녹여낸 것이다.' (명지대 이주현 교수) 박수근은 어릴 적부터 미술 (도화) 시간에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이었다. 박수근이 아내에게 보낸 구혼 편지에는 프랑스의 농민 화가 밀레의 <만종>을 보고 "하나님, 저도 이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모태 신앙인 박수근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그가 이곳에 살 때부터였다. 1957년 10월 10일의 국전에서 641점의 출품작 가운데 275점이 입선작으로 선정되었다. 박수근의 작품은 탈락했다. 국전에 출품한 작품은 <세 여인>이라는 100호짜리 유화 그림이었다. 박수근의 작품치고는 대작인데 아쉽게도 이 작품은 전해지지 않는다.
"국전에 <세 여인>이라는 100호짜리 유화를 출품했는데 그것이 그만 낙선되었다. 그이는 신문을 보시고 내 그림이 왜 낙선되었느냐며 우셔서 낙선이 될 때도 있지 뭘 우시느냐고, 내년에 좋은 작품을 그려 출품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위로한 적도 있다." (김복순, <아내의 일기>)
박수근의 그림은 짐머맨이나 코낸트와 같은 서구인이 좋아했지만 동족으로부터는 외면을 당했다. 학력을 중시하는 미술계 풍토에서 소학교 졸업이 전부인 박수근은 늘 방외인이었고 질시의 대상이었다. 또래의 작가들이 초대 작가가 되어 심사위원으로 위촉될 때, 그는 심사를 받는 입장이었다. 입선에서도 밀리자 그는 폭음을 하기 시작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밀레와 같은 신앙심 강한 그림을 그리게 해달라고 기도한 박수근이었지만 세상의 외면에 무너졌다. 보잘것없이 보이는 인간의 본질에 관심을 가진 그의 그림은 기독교적 신앙심에 기초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섰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늘 주변의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그림의 모티프로 삼았다.
폭음이 그의 건강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었다. 신장과 간이 나빠졌다. 그로 인해 왼쪽 눈에 백내장이 생겼다. 수술할 형편이 되지 않아 나중에 간신히 수술을 할 수 있었지만, 이 과정에서 시신경이 끊어져 한쪽 눈의 시력을 온전히 잃었다. 이후 그는 한쪽 눈으로만 작업해야 했다. 가난 탓에 눈을 잃고 한 눈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외눈 화가가 되었다. 창신동에는 그가 다닌 교회가 아직도 건재하다. 그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화강암으로 지은 단단한 교회. 동신교회이다. 화강암 건물이 반짝거린다. 교회 관계자들에 따르면 화강암은 창신동 채석장에서 가져온 돌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 전라도 익산 어느 채석장에서 가져온 황등으로 부르는 화강암이다. 이 돌의 특징은 햇빛을 받으면 반짝인다. 그래서 지금도 교회는 최근에 지은 것처럼 윤기가 흐르고 반짝거린다. 공들여 지은 건물이라서 지은 지 6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건물이 새 건물처럼 반짝인다. 교회는 1956년에 세워졌다. 초대 김세진 담임목사를 모시고 35명의 교우들이 예배를 드렸다. 그들은 대개 6·25 때 평안도에서 공산당에 시달려 고향을 등지고 내려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평화 시장에서 옷 장사를 했다. 그들은 동대문의 첫 자 '동'과 창신동의 둘째 글자 '신'자를 합쳐서 '東信'으로 교회 이름을 정했다. 1957년 4월 25일 기공 예배를 드리고, 16개월 만인 1958년 8월 연건평 275의 예배당을 지었다.
독실한 신자인 박수근 화백도 이 교회를 다녔다. 그의 부인 김복순 여사도 남편을 따라 교회에 출석했다. 1963년 전농동으로 이사 갔을 때는 중곡동장로교회를 다녔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김복순 여사가 그곳에서 전도사로 일했다고 하니 신심은 박수근을 능가했다. 박수근은 소천 후 동신교회가 운영하는 포천의 동신교회 묘원에 묻혔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교회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어느 교회일까? 언덕 위에 있는 교회. 이곳에도 어머니는 머리에 큰 그릇을 이고 간다. 옆에는 그의 그림에서 엄마 곁에 늘 따라붙는 어린아이가 있다. 머리에 인 그릇에는 팔다 남은 물건이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인생의 무게이다. 아마도 이 여인은 교회에 들어가서 자신이 지고 있는 삶의 무게를 예수님에게 아뢰었을 것이다. 교회는 늘 박수근의 삶을 지탱해주는 기둥이었다.
한이수 칼럼니스트
이곳은 언제부터 시장이 형성된 것일까? 임진왜란 때 상시군으로 설치된 훈련도감 군인에게 지급하는 면포의 보급량이 전쟁이 끝나자 예전과 같이 지급되지 않았다. 생계가 막막해진 군인들은 지급받은 면포를 가공해 섬유 상품, 옷에 필요한 액세서리 같은 것을 만들어 팔았다. 차츰 성문 밖에서 생산하는 야채들도 팔기 시작하면서 조선 후기 이현시장, 배우개(배오개)가 형성되었다.
이곳에 1904년에 광장시장이 형성되었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자 모든 것이 초토화되었다. 지형으로는 다소 평평한 이곳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청계천 변 주인 없는 땅은 옹색하지만 판잣집을 지어 놓으면 그나마 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북에서 무일푼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은 천막을 치고 물물교환을 하기 시작했다. 필요 없는 것을 내다 팔고, 필요한 것을 바꾸며 살다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복, 구호물자나 외래품, 수공품 거래로 활기를 찾게 되었다.
청계천 변에 점포 겸용의 판잣집에서 한두 대의 미싱으로 옷을 만들었다. 미군복, 담요, 구호 물자 등을 염색, 탈색해 몸뻬와 잠바를 만들면서 형성된 것이 평화시장의 시초이다. 북에서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한 상인들은 시장 이름에도 '평화'를 붙여 '평화시장'이라 했다.
박수근이 이곳에 정착할 때인 전쟁 끝물인 1953년은 이렇게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집 주변에는 천막을 치고 좌판을 벌거나 물품들을 서로 교환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상인들의 물건은 조악하다. 동대문 밖에서 야채를 심어 내다 팔거나 집에 있는 귀중품, 시계 같은 것을 좌판 위에 놓고 마냥 손님들이 나타나 사주기를 기다렸다. 좌판을 벌여 놓았지만 사 가는 사람들이 없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구매력이 있을 리 없다. 모인 사람들을 보면 크게 무엇을 사려는 사람들 같지 않다. 마치 서로가 서로에게 구경꾼이 되는 듯한 모습이다. 좌판 위의 물건을 보면 과일 같은 것들이 몇 개 놓여 있을 뿐이다. 천막 옆 할아버지의 좌판에는 아무런 상품이 없다. 그냥 소일하려는 듯 큰 담뱃대를 빨고 있다. 궁색하기는 청년들도 마찬가지다.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없고 전쟁 통에 내려온 사람들만 가득한 시장 풍경이다. 조금 대비되는 것이 여인들의 모습이다. 시장에서의 장사는 여자의 몫이었다. 남자들이 할 일 없이 배회할 때, 여인들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좌판을 벌여 놓았다. 그러나 장사를 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 부끄러워서 호객 행위를 언감생심 하지 못한다. 젖먹이 어린아이는 봐줄 사람이 없기에 데리고 나왔다. 중간 중간에 젖을 물려야 한다.
박수근의 그림에 억척스러운 여인들이 많이 등장하고 남자들은 빈둥빈둥 노는 모습으로 보이는 이유는 생활력 없고 소심한 자신을 남자의 모습에 많이 투영했고, 억척스러운 아내 김복순 여사의 모습을 여인의 그림에 많이 차용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귀로는 늘 피곤하기만 하다. 좌판에 벌여 놓은 물건이 팔렸다면 마음이 한결 가벼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침에 챙겨간 상품이 팔리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물건을 이고 가는 머리가 무겁다. 팔리지 않은 물건을 이고 가는 여인들, 엄마 곁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아이들이 따라간다. 집에는 이보다 더 많은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무엇이라도 팔아서 쌀이라도 사 가야 하는데 빈손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울까? 1961년에 그린 그림이다. 실직자의 삶이 얼마나 곤궁했을까. <실직>은 1962년 주한 미군사령부 도서관에서 열린 박수근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이다. 전쟁이 끝나도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직장에 들어가서 돈도 벌고 결혼도 하고, 사람 노릇을 해야 하는데 상황이 그렇지를 못하다.
이 그림에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누워 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앉아 있다. 바닥이 맨땅인지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매우 더러운 환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앉은 사람은 양복을 입고 구두까지 챙겨 신었다. 이 신사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화제가 '실직'인 것으로 보아 직장이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 신사 옆의 사람은 아예 구직을 포기한 것인가. 대낮인데 바닥에 누워 있다. 막걸리라도 한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시기에 소위 말하는 박수근의 미석화법이 완성되었다. '물감층을 켜켜이 쌓아 만든 거친 마띠에르는 유화 물감과 기운생동의 먹선의 혼합체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찰의 석물이나 창호지의 질감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서구 안료가 갖는 이질감을 녹여낸 것이다.' (명지대 이주현 교수) 박수근은 어릴 적부터 미술 (도화) 시간에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이었다. 박수근이 아내에게 보낸 구혼 편지에는 프랑스의 농민 화가 밀레의 <만종>을 보고 "하나님, 저도 이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모태 신앙인 박수근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그가 이곳에 살 때부터였다. 1957년 10월 10일의 국전에서 641점의 출품작 가운데 275점이 입선작으로 선정되었다. 박수근의 작품은 탈락했다. 국전에 출품한 작품은 <세 여인>이라는 100호짜리 유화 그림이었다. 박수근의 작품치고는 대작인데 아쉽게도 이 작품은 전해지지 않는다.
"국전에 <세 여인>이라는 100호짜리 유화를 출품했는데 그것이 그만 낙선되었다. 그이는 신문을 보시고 내 그림이 왜 낙선되었느냐며 우셔서 낙선이 될 때도 있지 뭘 우시느냐고, 내년에 좋은 작품을 그려 출품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위로한 적도 있다." (김복순, <아내의 일기>)
박수근의 그림은 짐머맨이나 코낸트와 같은 서구인이 좋아했지만 동족으로부터는 외면을 당했다. 학력을 중시하는 미술계 풍토에서 소학교 졸업이 전부인 박수근은 늘 방외인이었고 질시의 대상이었다. 또래의 작가들이 초대 작가가 되어 심사위원으로 위촉될 때, 그는 심사를 받는 입장이었다. 입선에서도 밀리자 그는 폭음을 하기 시작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밀레와 같은 신앙심 강한 그림을 그리게 해달라고 기도한 박수근이었지만 세상의 외면에 무너졌다. 보잘것없이 보이는 인간의 본질에 관심을 가진 그의 그림은 기독교적 신앙심에 기초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섰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늘 주변의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그림의 모티프로 삼았다.
폭음이 그의 건강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었다. 신장과 간이 나빠졌다. 그로 인해 왼쪽 눈에 백내장이 생겼다. 수술할 형편이 되지 않아 나중에 간신히 수술을 할 수 있었지만, 이 과정에서 시신경이 끊어져 한쪽 눈의 시력을 온전히 잃었다. 이후 그는 한쪽 눈으로만 작업해야 했다. 가난 탓에 눈을 잃고 한 눈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외눈 화가가 되었다. 창신동에는 그가 다닌 교회가 아직도 건재하다. 그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화강암으로 지은 단단한 교회. 동신교회이다. 화강암 건물이 반짝거린다. 교회 관계자들에 따르면 화강암은 창신동 채석장에서 가져온 돌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 전라도 익산 어느 채석장에서 가져온 황등으로 부르는 화강암이다. 이 돌의 특징은 햇빛을 받으면 반짝인다. 그래서 지금도 교회는 최근에 지은 것처럼 윤기가 흐르고 반짝거린다. 공들여 지은 건물이라서 지은 지 6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건물이 새 건물처럼 반짝인다. 교회는 1956년에 세워졌다. 초대 김세진 담임목사를 모시고 35명의 교우들이 예배를 드렸다. 그들은 대개 6·25 때 평안도에서 공산당에 시달려 고향을 등지고 내려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평화 시장에서 옷 장사를 했다. 그들은 동대문의 첫 자 '동'과 창신동의 둘째 글자 '신'자를 합쳐서 '東信'으로 교회 이름을 정했다. 1957년 4월 25일 기공 예배를 드리고, 16개월 만인 1958년 8월 연건평 275의 예배당을 지었다.
독실한 신자인 박수근 화백도 이 교회를 다녔다. 그의 부인 김복순 여사도 남편을 따라 교회에 출석했다. 1963년 전농동으로 이사 갔을 때는 중곡동장로교회를 다녔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김복순 여사가 그곳에서 전도사로 일했다고 하니 신심은 박수근을 능가했다. 박수근은 소천 후 동신교회가 운영하는 포천의 동신교회 묘원에 묻혔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교회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어느 교회일까? 언덕 위에 있는 교회. 이곳에도 어머니는 머리에 큰 그릇을 이고 간다. 옆에는 그의 그림에서 엄마 곁에 늘 따라붙는 어린아이가 있다. 머리에 인 그릇에는 팔다 남은 물건이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인생의 무게이다. 아마도 이 여인은 교회에 들어가서 자신이 지고 있는 삶의 무게를 예수님에게 아뢰었을 것이다. 교회는 늘 박수근의 삶을 지탱해주는 기둥이었다.
한이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