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단어, 실수로 알아버린 '로봇 기수'가 묻는다 "왜 달려야 하죠?"
‘휴머노이드’는 ‘인간의 형태를 한 것’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외형을 한 로봇을 부르는 말로 쓰인다. 창작가무극 ‘천 개의 파랑’의 주인공 ‘콜리’는 휴머노이드 기수다. 외형은 인간을 본떠 만들었지만, 그 마음은 인간보다 더 사람 냄새나는 로봇이다.

천선란 작가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공연은 로봇이 보편화된 2035년을 배경으로 한다. 경마장 기수로 만들어진 휴머노이드 ‘콜리’는 제조 과정에서 실수로 천 개의 단어를 배울 수 있는 학습칩이 들어간다. 학습칩이 들어간 탓에 ‘콜리’는 호기심이 많다. 인간의 감각을 묘사하는 단어에 대해 질문을 쏟아낸다. ‘파랗다’, ‘따뜻하다’,‘행복하다’, ‘좋다’, ‘아름답다’ 등 단어를 습득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선을 기른다.

콜리의 시각으로 바라본 인간은 속도에 집착한다. 말도 최대한 빠르게 달려야 하고, 사람들도 빨리 전진해야 한다. 사람도, 동물도, 기술도 빠르게 나아가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인 세상에서 낙오되는 자들은 버려지고 잊힌다.
천 개의 단어, 실수로 알아버린 '로봇 기수'가 묻는다 "왜 달려야 하죠?"
‘천 개의 파랑’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낙오자들이다. 콜리의 경주마 ‘투데이’는 관절이 닳아 달리지 못하고, 콜리도 낙마해 하반신이 부서졌다. 고등학생 연재는 명문대 진학을 포기하고, 연재의 언니 은혜는 걷지 못해 휠체어를 타야 한다. 연재와 은혜의 엄마 보경은 사별한 남편과의 추억에 얽매여 과거 속에 살아간다.

콜리는 “왜 달려야 하나요?”라고 질문한다. 그는 모두가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달려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앞만 바라보는 사회가 그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는 약자, 동물, 그리고 관심이 필요한 우리 주변 사람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천 개의 단어, 실수로 알아버린 '로봇 기수'가 묻는다 "왜 달려야 하죠?"
장애인, 동물권, 과학 기술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 산만해질 수 있는 이야기가 음악 덕분에 지루하지 않다. 콜리, 투데이, 연재, 은혜 등 많은 캐릭터 사이 얽힌 복잡한 관계도 가사로 전달해 섬세한 감성 묘사도 놓치지 않았다. 극의 후반부에서 호흡이 늘어지는 대목이 잠깐 보이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깔끔하고 직관적이다.

곡 자체의 완성도도 높다. 박천휘 작곡가가 만든 청아하고 맑은 분위기의 넘버가 ‘파랑’이라는 작품의 컨셉과 잘 어우러지고 등장인물들의 순수함과 연약함이 잘 묻어있다.

로봇을 활용한 연출까지 몰입도를 높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공상과학 소설을 무대에 올리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로봇과 말을 표현한 퍼펫이 완성도가 높고 실감 난다. 로봇 강아지가 등장한 장면도 유머 포인트가 되면서 현장감을 부여한다.
천 개의 단어, 실수로 알아버린 '로봇 기수'가 묻는다 "왜 달려야 하죠?"
고동욱 영상디자이너가 구상한 이동식 LED 화면도 무대를 알차게 꾸민다. 장면에 따라 기다란 직사각형의 LED 화면이 가로 세로로 이동하면서 다양한 배치를 보여준다. 경마장, 마구간 등 구체적인 배경을 그리다가도 등장인물의 감정을 추상적인 패턴으로 묘사하면서 음악과 대사의 전달력을 높인다.

소설 <천 개의 파랑>에서 다차원의 감동을 느낀 독자라면 더 진한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다. 무대에 올리기 위해 넘어야할 산이 많지만 완성도 높게 극복한 공연이다. 부서지고 다친 작은 존재들이 연대하는 모습, 아름다운 음악과 메시지가 균형을 이룬다. 오랜만에 재미와 감동 모두 놓치지 않은 창작 가무극이다. 공연은 서초동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5월26일까지 열린다. 구교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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